초가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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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해인삼매 - 도종환
1992년 01월 119호
마음 무거워 무거운 마음 버리려고 산사까지 걸어 갔었는데요
이끼 낀 탑 아래 물봉숭아 몇 포기 피어 있는 걸 보았어요
여름내 비바람에 시달려 허리는 휘어지고
아름다운 제 꽃잎이 비젖어 무거워
흙바닥에 닿을 듯 힘겨운 모습이었어요
비안개 올리는 뒷산 숲처럼 촉촉한 비구니 스님 한 뷴
신발끄는 소리도 없이 절을 돌아 가시는데
가지고 온 번뇌는 버릴 곳이 없었어요
사람으로 태어난 우리만 사랑하고 살아가며 고통스러운 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만물은 제가 지고 선 세속의 제 무게가 있는가 봐요
내리는 비 한 천 년쯤 그냥 맞아주며
힘에 겨운 제 무게 때문에 도리어 쓰러지지 않는
석탑도 있는 걸 생각하며
가지고 왔던 것 그대로 품어 안고 돌아왔어요
절 지붕 위에 초가을비 소리없이 내리던 날
시작메모
이 세상 모든 만물은 모두 지고 가야 할 제 무게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때론 아름답고 빛나는 삶도 그 아름다움 때문에 짐이 되고 세속에서 쌓아놓은 모든 것이 우리를 힘겹게 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이룩하고 어떻게 버려야 하는 것인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