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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자의 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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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현진 1992년 01월 119호
황량한 마을 부서진 절 말하기조차 어려운데
재공양은 고사하고 죽 끓일 쌀 한톨 없구나
무심한 창문과 가는 먼지만 허허로이 바라보니
산새 우는 소리뿐 친한 벗 하나 없다
혼자서 떨어지는 낙엽소리 듣노니
누가 말했던가 출가인은 애증을 끊었다고
모르게 흐르는 눈물 옷소매를 흠뻑 적신다
조주 고불

어젯밤 사이에 내린 눈이 발목을 족히 덮고도 남을 만치 쌓여 있다. 새벽 먹을 거리를 찾아 헤맸을 산토끼 발자욱만 어지러이 널려 있는 산길을 따라 오르다가 잠깐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먼산을 본다.
진작 준비해야지 했던 겨울 양식 몇 가지를 눈발이 흩날리는 것을 보고 나서 부랴부랴 찾아 나섰던 나의 게으름을 탓하며, 제법 땀에 젖은 등짝을 훌훌 털고 나니 다시 싸한 냉기가 온몸을 파고 든다.
내장산의 풍치야 사계절을 두고 그 고운 자태가 가히 선경이지만, 눈 덮인 산 능선은 그윽한 모성의 품인 양 넉넉하기 한량없다. 서해를 건너온 대륙풍이 스치고 지나는 산등성이는 마른 잡풀과 앙상한 나뭇가지에 차가운 냉기를 품고 있지만, 이젠 눈덮인 부드러운 능선을 드러내며 겹을 이룬 산줄기가 겨울 햇살에 빛을 내며 사뭇 절정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있다.
토굴 생활. 관광지로 번잡스럽기만 한 큰절(내장사)에서 한참 더 산 깊숙히 들어서 있는 원적암은 사람의 발길이 거의 없어 홀로 지내기에 그런 대로 적당한 한적함이 있다. 그 한적함이 좋아서 조금은 지치고 피곤한 운수의 길에 오롯한 쉼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풀어놓은 걸망이 벌써 일년을 넘기고 있다. 여름날 심어 둔 배추와 알타리무우로 김치를 담그고 겨울 한철 지낼 쌀과 방구들을 데울 땔나무도 준비하면서 보낸 지난 가을은, 그런 대로 토굴 생활의 아기자기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그저 말만 듣고 직접 해보지 못한 김치도 담가 보고 법당 앞을 수북히 덮는 낙엽도 쓸어모아 불태우며 분주함 속에서 보낸 지난 가을은 그런대로 지낼 만한 계절이 아니었나 싶다.
옛날 어떤 스님이 토굴 생활을 하는데 공양주라도 있어야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두 손을 불쑥 내밀더라는 말을 듣고 희미한 웃음을 지은 적이 있지만, 혼자의 생활은 대중 처소의 정진보다 분주함이 더한 데가 있다. 그렇지만 겨울로 접어들면서 가끔씩 보이던 등산객의 발길이 끊어지고 소란스러운 산새와 풀벌레 소리도 뚝 끊어져 적막함만이 감도는 산중의 일상은 적요한 외로움으로 다가온다. 해인사 성철스님을 모시고 있을 때에 수행의 요체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철저히 고독에 사무쳤을 그때가 공부의 시작이다\" 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지금 이곳 토굴에서 정진하다 보니까 그 말씀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어둠이 내리는 마당을 한 바퀴 돌고 들어와 앉은 좌복에, 창호지 문창살을 헤집고 다시 달빛이 비쳐 든다. 잠시 제쳐 두었던 조주무자 화두를 챙겨 보지만 대밭을 스치는 바람소리와 휘황한 달빛은 걸음을 마당으로 재촉한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을 느끼며 거니는 산책길은 또다시 허허로운 외로움이다.
눈이 쌓여서 길이 끊어진 산중에서 느끼는 단독자의 단상. 홀로 있는 것은 모든 것과의 단절인가. 존재의 심원인가? 사무치는 홀로의 존재를 자각했을 때에 비로소 인간은 세계와 화해하고 열려진 자세로 세상과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대비심일 수 있고 눈물일 수 있고 가없는 사랑일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홀로 있음의 단절, 홀로 있음의 근원, 홀로 있음의 눈물, 홀로 있음의 사랑.
그래, 이 겨울, 적요의 한복판에서 우리 살아가는 것의 참모습을 돌아볼 일이다. 고요함 속에 비추어 보는 우리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행여 우리의 자화상은 헝클어지고 뒤틀리고 무너져 내리지는 않았는지, 더 많이 소유해야 하고 더 높이 올라가야 하고 더 많이 지배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조주스님의 옷소매에 젖은 눈물에 비치는 달과 노령산맥의 적설에 비치는 달은 하나인가, 둘인가?
그럼 다시 이 자리에 조주무자의 의지는 어떠한가?
구천 하늘에 천둥이 치는데, 노령 계곡에 백설이 춤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