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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집을 짓는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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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경일 1992년 01월 119호
가을인가 싶더니 몰란결에 겨울이다.
시간의 흐름은 마치 강물 같아서 새것과 옛것으로 구별할 경계가 없다. 그저 변함없이 한결같은 속도로 흐를 뿐이다. 그런데 겨울이 해마다 새로운 해탈감으로 다가서는 까닭은 무엇인가? 아마도 창밖에 서있는 쓸쓸한 나목의 군상 속에서 앙상하게 변해 버린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일 것이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변화하는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 그것은 누구의 표현처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상감이다. 세월은 쉼없는 흐름이고 시간과 공간에 기반한 존재라면 너나할것없이 변화해 가는 것이 지당한 이치인데, 한해가 저물고 또 새해가 시작되는 이 시점에서 이토록 가슴 한 구석이 허황함은 무슨 까닭인가? 행여 방일하고 게으름으로 헛되이 세월을 보냈기 때문은 아닐는지?
이렇게 지나간 세월에 대한 아쉬움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흐르는 시간의 강물에 발을 담그고 있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통찰처럼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멈추어 서있는 동안 세계는 변해왔던 것이다.
변화한다는 것, 그것은 살아 있는 모든 존재의 가장 본질적인 모습이다. 그렇기에 살아 있는 생명은 운동으로써 변화하는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또 자연의 질서에 따라서 쇠멸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운동은 살아 있음을 의미하고 존재는 변화와 운동으로써 삶의 집을 짓는다. 변화 발전하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해서 운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방일과 게으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게으름은 죽음의 집이라고 했다. 정진하지 않는 방일은 살아 있으되 살아 있음이 아니라는 뜻일 게다. 그러기에 옛 선사들은 하루해가 저물면 땅을 치면서 오늘도 성불하지 못했음을 한탄하며 통곡을 하셨다고 한다. 날마다 무명의 껍질에 싸여서 정체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철저한 부정을 함으로써 선사들은 수동적인 삶을 거부하셨던 것이다. 세계와 우주의 변화를 창도해 내는 것이야말로 옛 스승들이 목표하셨던 삶이기에 또 하루가 무명의 업장 속에서 정체해 버린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자연의 변화에 발맞추어 변화한다는 것이 이토록 소중함에도 변화한 자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쳐 놀라는 것은 타의에 의한 변화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흐르는 시간에 이끌려 왔음을 의미한다.
능동적인 자세로 변화를 준비하고 맞이한다는 것은 생명이 살아갈 존재의 집을 짓는 일이다. 끊임없이 스스로 정진하고 활동적인 자세로 자기 혁신을 할 때에 세월의 흐름은 더이상 허황한 박탈감일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 방일하지 말고 열심히 정진하여라\" 라고 당부하신 부처님의 말씀 속에서 지극한 수행이야말로 무상한 세월의 흐름을 극복하고 창조와 자각의 신세계로 우리를 나서게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임신년 새해에는 끊임없는 정진과 수행으로 자기 한계를 극복하는 해가 되기를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