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을 들추지 않아도 한해는 가고 또 오는 것입지. 남으로 남으로부터 오는 제비처럼 시간은 질서 정연하게 자리를 잡는 것입지. 해가 바뀌어도 바뀔 줄을 모르는 조계종의 꼬락서니와 토굴병에 걸린 기성 승가의 현상황을 먼빛으로만 보아 버리고, 비교적 수월하게 사는 방법을 택하면서 문득 지금쯤은 동해의 푸른 물결로 출렁거리고 있을 존자를 보고 있는 것입지.
발레리의 말처럼 늘 새롭게 시작되는 바다, 그 바다는 무엇으로 존재하는지……
인간의 얼룩진 한숨과 숱한 눈물이 그토록 바다로 들어가는데, 어찌 바닷물이 짜지 않겠느냐는 한 노인의 말을 기억하고 있습지. 잡다한 일 비워 버리자고 황폐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고파 산중 가사자락에 묻힌지 십 수 년. 해탈의 가람 속에서 결코 해탈로 태어나지 못하고 번뇌의 물방울로 새벽을 마시는 나는 오늘도 별표정없이 무수한 군상들 틈에서 쓴웃음을 지으며 타성의 굴레를 달리고 있습지.
판에 박힌 사문의 호흡, 별 자극도 없이 무디게 살면서 그래도 마냥 새롭게 태어나야 된다는 사명감 같은 거친 호흡은 도시의 자동차 차선처럼 줄지어 지나가는데 백 미터 전방에 펼쳐진 새로운 거리를 빤히 쳐다보면서 그것들은 늘 졸음처럼 나의 육근六根을 달리게 하는 것입지.
나는 기억하고 있습지. 내가 그를 처음 보았을 때를 말입지. 상상도 못 할 유신 독재가 홀연히 종을 치고 각종 매스컴들이 서울의 봄을 신나게 흔들어 대는 그 해 봄이었습지. 생명의 이파리들이 반도 산천을 초록으로 물들이고 있을때, 헐렁한 예비군복을 입은 청년이 산을 오르고 있었습지. 아저씨라고 하기에는 아직 앳된 그가 막 군대 생활을 마치고 불과 몇 달 전에 내가 왔던 그 길을 그렇게 온 것이었습지. 핏기 없는 얼굴, 넋나간 듯한 그의 표정에서 낙관적인 융통성보다는 허무적인 어두움을 느끼게 했습지. 꾸욱 다문 입술로 간혹 말을 할 때면 헤벌린 입이 엄청 순진하게 생각되었습지.
그가 어떻게 하여 이곳에 왔을꼬. (면벽 구년하려고?)
어느 날 무심히 스물 몇 살의 나이로 군대 계급장을 떼자 갈 곳이 없었다고 했습지. 제대를 하자마자 그저 무엇에 떠밀린 듯이 산에 가서 잠이나 한번 실컷 자고 싶었다는 그. 또랑또랑한 감성도 분노의 비수도 인간애로의 변신도 잊은 채. 아, 졸아야 되는데, 잠을 자야 되는데, 편안하게 백지처럼 잠들기 위하여…… 온 까닭을 물었을 때에 그는 독백처럼 허탈한 가슴과 쉰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습지.
늘 신경질적인 그의 버릇. 침묵으로 반항하며 떠돌던 그가, 한 노사老師를 만나고 얻어 낸 \"판대기에 털난 이빨을 어이 할꼬\"는 그가 떠나기 전까지 무섭게 낚아 내려는 그의 화두였습지. 그 때부터 그는 동해의 푸른 물결을 그리며 죽음의 시작과 생의 끝을 좇고 있었습지.
언젠가 봉암사에서 여름 안거를 마치고 평소 고무신과 채식 주의를 고집하던 그가 신형 르까프 신발을 사 신고 와서 돼지갈비나 한번 먹자고 했습지. 그날 밤 잠든 자의 곁에서 잠들지 못하고 새벽까지 홀로 울던 소쩍새 소리를 기억하십지. 그때 그가 말했습지.
\"난 말입지. 저 소리를 들으면 마른 늪에 나가 낚시를 하고 싶어지는 것입지. 아, 내가 출가하던 날 밤에도 소쩍새가 울었습지. 그러나 말입지……\"
그 해 겨울, 르까프 밑창이 아직은 성성한데 그는 고향을 찾아 빛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그 바다를 건너고 있었습지. 슬픈 환락과 전도된 가치의 언덕에서 서성이던 그가 최초의 자아를 향하여 동해에 낚싯대를 던지고 있었습지. 동해의 햇살을 어루만지며 관음의 뿌리와도 같은 창망한 바다의 한 가운데로 갔습지.
입을 헤벌리고 누런 이빨을 내보이며 싱싱하게 웃던 그가 오늘 아침에는 동해의 찬란한 빛으로 떠올라 메마른 늪에서 무료하게 졸고 있는 나의 육근을 향하여 외치고 있습지.
\"그만 졸으십지. 속도를 줄이십지. 빤질빤질한 도로가 아닌 비포장 도로를 또르르 또르르 걸어서 가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