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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지금, 각자가 서있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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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지명 1992년 01월 119호
보통 사람으로서의 우리는 잘못된 것은 남에게 미루고 잘된 것은 자신에게 돌리기 쉽다. 우리 가운데에 많은 사람들은 한국 불교가 그 긴긴 세월의 전통에 걸맞을 만큼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지금처럼 엉망진창의 혼미 속에 있는 근원적인 원인이, \"나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잘못\"에 있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기본적인 가르침, 다시 말해서 유심조사상唯心造思想이나 공사상空思想의 핵심은 우리가 문제삼고 있는 것의 원인들이 밖에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바로 나의 정신적 육체적인 일거수 일투족\"에 있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유심조사상은 중생심衆生心의 미혹迷惑한 시각과 발상과 행동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공사상은 직접적인 수행에서 얻어진 깨달음이 아닌 집착의 알음알이에 기초한 분별의 문제점을 밝힌다. \"불자\" 곧 \"깨달은 이의 가르침을 구도행求道行으로 따르는 이\"라는 말을 넓은 의미에서의 \"수행자修行者\"라는 단어와 동일시해도 무방하다면, 우리는 외적으로 핑계를 마련해서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위로하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의 한국 불교의 실정상 출가 수행자들이 엄밀한 의미에서의 수행자 모양을 갖추기는 어렵다. 선원, 율원, 승가대학, 일선 포교소, 종무행정, 또는 그 밖의 문화 예술분야에서 수행하거나 종사하는 이들이, 지금의 위치에서 이타적利他的 보살도菩薩道를 포함한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닦아야지, 그 자리를 떠나서는 별도로 수행을 생각할 수 없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의 잠재 의식 속에는 수행은 산 속에서 하는 것으로 굳어 있다. 그래서 많은 수행승들이 \"토굴병\"에 걸려 있다. 대중과 떨어져서 세상사나 종단사를 잊고 속편하게 지내는 것이 수행으로 착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도시의 공해나 소음과 마찬가지로 계곡에는 물 흐르는 소리의 시끄러움이 있고, 산 속에는 매미나 새소리의 시끄러움이 있다. 또 강이나 바다에는 파도의 울렁거림이 있다. 토굴 속에도 규모나 격식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나름대로 살림살이의 번거로움이 있다.
옛날에 세 스님이 십 년을 수행하기로 작정하고 노동자 복장을 하고 시중으로 파고들어 갔다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새로운 수행의 길을 제시한다. 우리가 익히고 닦아야 할 것은 조용한 데에서 조용하게 지내는 것이 아니라, 시끄러운 데에서 시끄럽지 않을 수 있는 힘이다. 수십 년의 산속 수행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거창한 기대를 풍기면서 시정에 들어갔다가는 자신도 망치고 종단도 망치는 선배들을 많이 보아 왔지 않은가. 우리 한국 불교가 살 수 있는 길은 바로 지금, 각자가 서있는 자리에서 지혜와 불법을 향한 자기 맡은 바를 열심히 행함으로써 그것을 수행으로 삼는 것이다. 선객禪客이 선방에 앉아서 졸고 있는 모습 그 자체가 포교이듯이, 일선 포교당에서 나름대로의 신심과 배움으로 부처님 법을 찬탄하고 전하는 것 자체가 수행이다. 산 속의 절에서 공양주로 일생을 보내는 이가 포교사이듯이, 시중에서 펜대를 잡고 사찰의 종무 행정에 충실하고 있는 이도 수행자이다.
대승불교는 기본적으로 수행과 깨달음을 동시적으로 본다. 단지 청중의 근기에 따라 시간차를 붙여서 발표할 뿐이다. 금강경에서는 \"보살이 보살이 아니므로 보살\"이라는 논리를 되풀이해서 설명한다. 수행 말고는 별도의 깨달음을 상정하지 않고 수행 자체를 궁극 목표와 동일시한다는 뜻이다. 화엄경의 \"마음과 부처와 중생의 무차별\"도, 수행이 있기만 하면 셋이 모두 똑같다는 말이다. 법화경에서 삼라 현상이 본래 적멸상임을 강조한 뒤에 \"불자가 도를 행하면 다음 세상에 성불하리라.\"고 한 것도 도를 행함과 성불 사이에 시간 간격을 두지 않으려는 데에 속뜻이 있다. 본래 적멸상이므로 그것을 믿고 그 길로 향했을 때에 그것이 바로 성불이라는 말이다.
보조국사普照國師의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성철스님이 돈오돈수頓悟頓修로 구태여 바꾸어 나타내는 것도 깨달음과 수행 사이에 아무런 시간 간격을 두지 않으려는 데에 은근한 뜻이 있다. 조동종曹洞宗의 선사들을 예로 들면 도원선사道元禪師는 좌선즉성불坐禪卽成佛을 가르치는데, 별개의 성불을 기다려서 수행해서는 안되고 수행의 과정 자체를 바로 깨달음이나 보살도의 전부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임신년 새해 아침의 수행론은 간단하다. 지금 서있는 그 자리에서 지혜와 자비를 위한 직무를 다하는 것이 바로 수행이요, 그 수행이 바로 성불이라는 말이다. 궁극의 깨우침은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행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