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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불교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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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별대담 - 김기애 1992년 01월 119호
때 : 1991년 11월 25일
장소 : 쉐라톤 워커힐 국제 회의장
대담 : 티치 민 차우(베트남 불교협회 부회장) 고은(시인)
고은 우리 나라에서 열린 제5차「불교와 국제평화 학술회의」에서 세계 여러 나라 불교 학자들과 인류에게서 가장 심오한 주제인 평화와 정의에 대해 유익한 토론을 갖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특히 어렵고 먼길을 노령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오신 베트남의 티치 민 차우 스님을 만나게 되어서 더욱 기쁜 마음입니다.
이번의 만남은 베트남 전쟁이 끝나면서 단절된 양국 사이의 교류가 다시 시작된다는 점에서 장차 한국 불교와 베트남 불교간의 교류와 협력의 새장을 여는 의미로 매우 중요하게 상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민차우 감사합니다. 저 자신 불교 국제 교류에 관심이 많아서 세계 여러 나라의 불교 단체를 방문한 적이 많지만 한국에는 처음입니다. 한국 불교의 여러 스님과 단체를 만나 보고 느낀 점이 많습니다. 특히 스님과 신도 모두 열심히 불교를 공부하고 포교하는 것에 대하여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번 회의에서 많은 한국의 불교 학자들과 대화하게 된 것도 저로서는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은 먼저 저를 소개했으면 합니다. 저 자신 불교와의 인연은 1950년도에 시작된 한국전쟁의 비참한 광경에서 비롯됩니다. 전쟁 기간중에 같은 민족 구성원끼리 서로 죽이고 죽는 것을 많이 목도하고, 소년으로서 심한 충격을 받고는 염세적 허무주의에 이끌려 승려가 되었습니다. 십여 년 동안 절에 있으면서 불교 체험을 다양하게 했고 불교신문을 창간하여 불교의 현대화와 새로운 전달자로서의 역할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1960년 4.19혁명을 산속에서 겪으면서 세속의 삶, 다시 말해서 역사에서 한 개인의 역할에 대한 고민과 갈등을 겪다가 세속 삶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환속하였습니다. 그 뒤에 저는 문학과 역사적 삶에 대한 깊은 애정 속에서 보다 진보된 세상을 이루기 위한 시를 써 오고 있으며, 그 과정 속에서 정권의 탄압을 받아 옥고를 치른 적도 있습니다.
저는 전쟁이 한창이던 베트남에 다녀온 적이 있고 또 그 전쟁에 우리의 젊은이가 대리전을 치르러 가서 양국간에 적대와 미움을 부른 적도 있어서 베트남을 생각할 때에는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늘 깊은 내적 갈등을 안고 있습니다.
민차우 예, 잘 알겠습니다. 우리가 평화를 이야기할 때에는 그 이면에는 반드시 전쟁의 참화에 대한 각성으로 논의되어지는 것으로 볼 때에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비도덕적이요 참혹한 전쟁이라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이해는 한번쯤 우리가 걸러 보아야 할 문제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일정한 전진과 반전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지금의 우리 상황에 맞는 이해의 일치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베트남에는 언제 다녀오셨지요?
고은 아마도 1969년도로 기억됩니다. 당시는 베트남 전쟁이 가장 치열하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스님의 간단한 소개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민차우 저희 가족은 유교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 절에 가서 스님의 설법을 듣고 마음 한가운데에 어떤 기쁨이 넘치고 있음을 깨닫고 스님이 되었습니다. 처음 절에 와서는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한 것이어서 기쁨에 넘치는 나날이었습니다. 젊은 정열을 간직한 저는 베트남 전역에 불교를 전파하리라는 신심으로써 전투적으로 포교에 힘썼습니다. 전통적으로는 불교가 아니지만 불법을 배우고 익히면서 차츰 불교의 정수에 가까워졌습니다. 마흔두살쯤부터 불란서 식민지에서 독립한 남 베트남의 사이공 시 덩반DuongVan 절에 주로 머물렀습니다.
스물두살 때에 마하야나(대승) 전통에 따라 승려가 되었고 불란서에 가서 잠시 공부하다가 1952년부터 1955년까지 스리랑카에 유학하여 영어와 팔라 어를 배우고 학위를 받았습니다. 삼 년 동안 공부한 뒤에 스리랑카의 고승으로부터 달마 아사리Dharma Ajaria를 받았습니다. 그 뒤 육 개월 동안 미얀마에 가서 참선 수행을 했고, 인도에 가서 구 년 동안 왕사성 근처의 나란다에서 팔리어 장경을 수학하였습니다. 인도의 비하르Bihar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육 개월 가량 머물면서 현장법사에 대한 책을 세 권 썼습니다. 법현 스님의 책도 번역했고요. 1965년 베트남에 귀국하여 사이공에 베트남 최초의 불교 대학인 Vanhans Buddist University를 설립하여 불교의 현대화에 노력하였습니다. 이 때 학교의 학생 수는 칠천 명 정도, 부설 연구 기관으로 언어연구소를 두어 경전 번역 사업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1975년 전쟁이 끝난 뒤에 이 학교를 국가에 헌납하고 다시 불교전문학원을 설립하여 비구와 비구니들을 교육하고 있습니다. 이 학교는 사년제이며, 학생 수는 백오십 명 정도입니다. 지금은 파리니카야를 십 년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월남어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고은 지금은 어디에 계시는지요?
민차우 호지명 시 Vanhans 불교 사원에 거주하면서 주로 파리어와 영어로 된 불교 서적을 월남어로 번역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고, 이번 국제 회의도 제가 영어에 의사 소통의 능력이 있어서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고은 한국에는 계율을 숭상하는 고승들이 많은데 북방불교, 다시 말해서 대승불교에서 전해 주는 계율보다 스리랑카와 미얀마 등지의 소승불교의 계율이 오히려 부처님의 정통 불교에 가깝다는 것이 최근 한국 불교에 전해진 재미있는 현상입니다. 이러한 계율의 수지와 준수의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또 스님께서 체험하신 불교 수행의 개인적인 경험, 예컨대 깨달음의 순간을 경험하셨는지요?
민차우 불교는 다양성을 그 특색으로 하고 있고, 그 가운데에서도 부처님법의 골수만 이해하고 실천하면 그것이 계율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또한 저의 개인적인 경험은 구체적인 체험보다 매일 한 시간씩 참선하고 한 시간씩 경전을 읽는 데서 행복을 느끼고 있습니다.
고은 남방불교를 소승이라 하고 북방불교를 대승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분명히 이야기하면 불교가 소승적 체계에서 한 단계 발전한 것이 대승불교라는 뜻일 겁니다. 하지만 반드시 대승불교가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발전된 대승불교보다 소승불교가 부처님의 원음에 가깝다는 것이 소중하게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민차우 아주 미묘한 질문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우리 불교도가 좀더 개방되고 폭넓은 교류를 통해서 서로의 장단점을 비교해야 할 것이고, 더 연구해야 할 과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 베트남 불교는 테라바다(소승)와 마하야나(대승)의 체계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고은 스님의 말씀대로 베트남 불교는 동남아 불교의 소극성과 중국 영향에서 비롯한 대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베트남 전쟁 기간 중에 부전과 독재와 카톨릭의 횡포에 항거해서 분신 자결도 하고 쾅뚝 스님과 같은 분들도 나왔는데, 나는 그것을 간단히 소승으로만 보지 않고 중국의 대승과 남방의 소승이 결합해서 내는 큰 에너지라고 생각합니다.
민차우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저 자신도 베트남 불교의 역동성을 대승과 소승의 결합에서 찾고 싶습니다.
고은 그러면 그 때 분신하신 스님들은 지금도 기념하고 있는지요?
민차우 국가에서 주관하여 기념을 하지는 않습니다만 우리 불교 단체에서는 매우 중요한 기념일로 지정해서 매년 행사를 치르고 있습니다.
고은 트리 쾅 스님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계신 지요?
민차우 트리 쾅 스님은 중국어로 된 불경을 월남어로 번역하는 일에 전념하고 계십니다. 엔쾅이라는 절에 사시는데 저와는 아주 절친한 사이이고, 저의 절에서 자전거로 삼십여 분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경전 번역하는 일로 자주 만나서 토론도 합니다.
고은 통일이 된 뒤에 베트남 불교의 현황이 궁금합니다. 불교 수행과 포교가 지금의 베트남 정치 체계에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요?
민차우 1981년 베트남 불교 승가회가 설립되어 여러 종파를 하나로 통합하여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월남 정부는 불교와 카톨릭만을 종교로 허락하고 있지요.
고은 카톨릭도 인정을 받는군요. 카톨릭의 상태는 지금 어떻습니까?
민차우 이백만이 넘는 신도가 있고 조직이 잘 되고 돈도 많아서 절보다 부자입니다. 베트남에서는 불교가 가장 가난한 종교이지요. 개신교도 최근 들어 전교 활동을 열심히 하는데 돈을 써서 개종시키려고 합니다. 한국의 상황은 어떤지요?
고은 어떤 면에서는 불교가 가난하다는 것이 진정한 불교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불교가 부자가 되면 불교로부터 떠나는 것의 시작일 것입니다. 불교의 교조 석가모니는 현실적으로 거지였지요. 그러나 진리에 관한 한 무한한 공급자였고, 진리가 가득 차 있다는 데에서 그는 큰부자가 아닙니까?
민차우 부처님은 절대로 가난을 원망하지는 않았지요. 저 자신도 남은 생애 동안 열심히 불교 전파의 소임을 다할까 합니다. 사람의 심성에 실다운 희망일 수밖에 없는 불교를 위해서는 저는 어떤 험한 곳, 괴로운 곳에도 나서려 합니다.
고은 우리 한국에서의 수도 생활은 새벽 세시에 일어나서 참선하고 밥먹고 경전을 읽는 식으로 진행됩니다. 베트남에서의 생활은 어떤지요? 하노이, 호지명, 다낭과 같은 도시에는 절이 있는지요?
민차우 절에서의 전통은 어디서나 매우 비슷합니다. 그러나 한국에서처럼 절이 산속에 많지는 않습니다. 베트남 전역에는 절이 오천여 개 정도가 있고, 승려는 이만여 명 정도가 됩니다. 테라바다의 절은 캄보디아의 영향을 받아서 오십여 개 정도의 사찰이 있는데 경전도 팔라어로 공부합니다. 그 밖에는 대부분 마하야나 전통의 절입니다. 가오다이라는 일본 불교의 영향을 받은 유파도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행정상으로는 통합되어 있지만 각기 독특한 수행 전통을 지키고 있습니다. 대승불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서 채식주의자들이지만 베트남 특유의 전통을 지키고 있습니다.
고은 우리 불교는 그 동안 각 지역마다 저마다의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발전해 왔습니다. 한국에서는 간화선이 선수행의 주종을 이루고 있지요. 베트남 불교에서의 선수행은 어떻고 얼마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요?
민차우 베트남 불교에서 선수행은 두 가지의 전통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타가타(여래) 선이고 또 하나는 아차리아(조사) 선을 들 수 있지요. 자타가타는 소승불교의 전통을 가지고 있고, 아차리아는 대승선의 전통을 따르고 있습니다. 자타가타의 수행법은 비파사나인데 저 자신의 경험으로는 아차리아 선보다 우리에게 쉽게 다가오지 않나 싶어 자타가타 수행법을 따르고 있습니다.
고은 불교의 역사에서 불교가 인류의 자취에 끼친 영향은 막중하고 훌륭한 선지식의 업적도 긍정되지만, 불교의 역사를 부정적으로 보면 일단 소승불교도 실패했고 대승불교도 중국적인 전개가 광범위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 자취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다시 말해서 불교의 실패라고 하는 점에 맞추어 우리는 이러한 실패를 어떻게 극복하고 새로운 불교의 역사를 열어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민차우 참으로 간단하지도 쉽지만도 않은 문제입니다. 진정으로 불교가 역사에 편입되어 자기 몫을 다해왔느냐 하는 의문도 들지요. 또한 역사의 관점을 어떻게 세워야 하는가 하는 문제도 있고요. 문제는 작은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까지 아시아의 근대화 과정 속에서 우리 불교가 충분한 교육을 향수했느냐에 관건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저의 견해로는 불교도에게 세속적인 교육과 불교만의 전통적인 교육이 똑같이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합니다.
고은 스님과 말씀을 나누고 있으니 베트남 전쟁 당시의 상황이 지나간 일이 아니라 현재의 일처럼 생각됩니다. 짐작하건대 베트남과 우리나라의 교류는 고대로부터 있어왔지만 최근세사에서는 젊은 시절 호치민이 조선조 말기 사회 개혁가였던 다산 정약용 선생이 쓴 목민심서를 즐겨 읽었고, 아예 다산을 존경해서 다산이 죽은 날을 기려 제사까지 지냈다고 들었습니다.
민차우 네, 그는 정약용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정약용을 알고 목민심서를 읽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책은 한문으로 쓰여졌으므로 아마 호치민이 쉽게 읽을 수 있었겠지요.
고은 지금 베트남을 생각하면 보트 피플의 상황이 먼저 떠오릅니다. 이런 문제를 국가에서 잘 해결할 수 있도록 불교 단체에서 건의해 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민차우 어려운 문제 가운데에 하나입니다. 그들이 나라를 떠나는 데에는 많은 까닭이 있습니다. 실로 우리는 전쟁 때문에 고통이 너무 컸습니다. 그 상처가 쉽게 아물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리고 지금 당장은 심각한 경제 위기도 맞고 있습니다. 당과 정부도 개방 정책을 펴서 베트남의 어려움을 타개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우리 불교도 사원이 애초부터 전 인민의 소유이듯이 정부의 정책에 동의하고 모든 것을 자급 자족하는데, 이것도 분명 정부를 돕는 일일 것입니다. 불교 신도들은 정말 열심히 생활합니다. 그들은 신앙심이 깊어서 제가 운영하는 불교 학교를 도와주기도 합니다.
고은 베트남은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까닭에 그 사상의 전형은 마르크스 주의라고 생각됩니다. 마르크스 주의와 불교의 관계는 어떤지요? 과연 조화가 가능한지요?
민차우 그것은 다분히 지혜와 지능이 요구되는 문제입니다. 두 가지 체제의 공통점을 찾아서 공존해야 할 것입니다. 사회주의 체제에서도 국가에 해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 승려의 교육이나 활동을 허용합니다. 국가 재건 사업에 승려도 참여하고 있고 국가에서도 환영합니다. 우리가 벌이는 국제간의 화해와 평화 운동도 고무적으로 평가합니다. 그래서 이런 국제 회의에 제가 참여하게 된 것이지요.
고은 저는 베트남 민족을 아시아에서 아주 위대한 민족으로 생각합니다. 고대로부터 중국의 침략에 항거하여 자기를 지켜왔고, 근세에는 서구의 침탈에 맞서서 위대한 승리를 가져왔습니다. 지금은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맞고 있지만 베트남 민족의 위대함은 이것을 이겨내리라고 생각합니다
민차우 감사합니다. 한국 불교와 베트남 불교의 앞날에 희망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한국 승려와 베트남 승려의 우정이 더욱 다져지길 바라고 신도간의 교류도 확대되었으면 합니다. 부처님 말씀을 믿고 따르고 있는 이상 우리는 모두 형제가 아니겠습니까?
고은 베트남의 여러 스님과 트리 쾅 스님에게 안부 전해 주시죠.
늦은 밤까지 토론에 임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