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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게 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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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해설 - 무관 1992년 01월 119호
초발심시편정각初發心時便正覺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
처음 발심한 때가 정각을 이룬 때요
삶과 죽음, 열반이 항상 서로 함께했다
처음 시작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입니다. 이 어렵다는 까닭은 잘 알지 못하고 시작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안다는 것은 또한 익숙하다는 것과 같으므로, 습관이 되지 않은 일에는 두려움마저 느껴지는 것입니다.
한해가 가고 다시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미래는 우리에게 언제나 불확실하기에 불안스럽기만 합니다.
우리는 새해를 맞게 되면 새로운 설계를 하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범위를 한정하고 그것을 실행해 갈 시간을 짜맞추는 일입니다. 이러한 설계는 자신의 능력을 고려해서 하지만, 바깥의 조건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상황을 전제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소홀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미래는 불확실하게 여겨집니다. 만일 우리가 미래에 대한 조건들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좋은 조건과 악조건을 알 수 있다면, 실천해 가는 과정을 두려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초발심시편정각 생사열반상공화\"는 \"위이창섭법분제 位以彰攝法分齊\" 라고 해서 위치가 서로 화합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곧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성眞性이 나고 죽음이 없으며, 자성이 없고, 연기도 없어서 모든 상대를 초월했다는 것을 확연히 알아서 마음을 내어 계획하고 실천해 가려는 마음을 초발심이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자신감을 가지고 출발한 사람은 그 일에 충실하며 설사 악조건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물러서지 않는 굳센 의지를 가지고 실천해 가게 됩니다. 그것은 신념이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신념을 열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화엄경에서 보살의 수도해 가는 계위階位가 모두 오십이위五十二位인데 그 가운데에 열 단계를 말합니다. 그 첫 단계가 신심信心인데 한 생각 깨끗한 마음이 바로 부처의 성품임을 알아서 달리 생각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저 선종에서 마음 밖에 따로 부처님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신심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이 마음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단계는 염심念心인데 마음에 이러한 믿음을 가지면서 조금도 부족하거나 모나지 않는 생각으로 잊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의 마음이 어느 때는 부처님과 다르지 않다고 믿다가 어느 때는 부족하다고 여기면 안 됩니다. 우리의 생각이 바뀌는 것은 식識이 하는 것이요, 이 마음은 생멸과 자성과 연기라는 상대를 벗어나 있음을 늘 기억하여 떠나지 않는 상태입니다.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도전을 해 가면서 발전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셋째 단계는 진심進心인데 앞으로 실천 실행해 나가는 의지력 또는 추진력을 말합니다. 이것은 곧 능히 묘하고 뚜렷하게 통달해서 나아가서 참으로 깨끗한 바탕에 들어갈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우리는 보배가 있는 곳을 알면서도 그곳에 가지 않으면 그 귀중한 물건을 내 손으로 만지고 내 눈으로 볼 수 없으며, 또한 쓸 수도 없습니다. 노력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 순수한 자리에 나아갈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넷째 단계는 혜심慧心인데 어떤 일을 실천하는 데에는 먼저 해야 할 것과 뒤에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기 위해서는 밭을 갈고 이랑을 만들고 흙덩이를 가늘게 부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씨앗을 뿌리고, 가늘게 잘 부수어진 흙으로 덮어야 만이 새싹이 트는 것입니다. 일을 쉬지 않고 일관성 있게 해 나가면 관찰의 능력이 생깁니다. 이러한 관찰의 능력이 갖추어지는 것을 지혜로운 마음이라고 합니다.
다섯째 단계는 정심定心인데 지혜로운 마음, 다시 말해서 사물의 앞뒤와 순서, 그리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상태를 파악해서 그 모습과 본질을 꿰뚫어 보게 되면 마음이 자연스럽게 안정됩니다. 그리하여 깊고 고요한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여섯째 단계는 불퇴심不退心인데 마음이 슬기롭고 깊어서 안정되면 맑고 밝아서 오직 앞으로만 나아가게 될 뿐 물러서는 마음은 없어지게 됩니다. 어떠한 노력이나 물러섬이 없이 간다는 의지만이 있게 되는 상태입니다.
일곱째 단계는 호법심護法心인데 마음이 법에 의지하고 보호하며 생각을 잃어버림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어느 것이 바르고 어느 것이 굽었는가를 아는 사람은 바른 길만을 가고 그른 길을 버리게 됩니다.
여덟째 단계는 회향심回向心인데 언제나 맑고 밝은 마음을 보호하면서 빛을 돌이키어 부처님의 지위를 향해서 나아가는 상태를 말합니다. 자신의 의지력을 키워서 더 큰 것을 향해 나아가는 자세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아홉째 단계는 계심戒心인데 늘 부처의 마음을 되새겨서 마음에 허물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늘 알음알이를 따라서 떠돌게 되고 그 떠도는 것이 경계와 부딪혀서 새로운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번뇌입니다. 이러한 알음알이를 없애는 일은 언제나 부처님의 광명, 다시 말해서 실행했던 모범을 따르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 계심은 지혜와 선정을 일으키는 근본으로써 삼학三學 가운데에 첫 번째에 해당됩니다.
열째 단계는 원심願心인데 어떠한 행위일지라도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실천한다면 능히 이룬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밥을 먹는 것은 살기 위함이고, 일하기 위함이고, 즐거움을 갖기 위함이고, 행복해지고자 함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살기 힘들고 일하기 어렵고 고통스럽고 불안한 일들이 많아서 불행스럽게 여겨집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일들은 어떻게 관찰해서 분석하고 판단했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원을 세워서 분명한 목적 의식이 있다면 괴롭고 불행스럽게 여겨지는 상황이나 일들도 또 다른 의미와 느낌으로써 우리에게 기쁨을 줍니다.
초발심이란 이러한 열 가지의 신심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러한 믿음은 자신감을 가지게 하는 것이요, 실다운 것이며, 또 의지를 가지게 하므로 부처가 되는 시작인 것입니다.
이제 초발심이 바로 정각이라는 뜻은 선재동자가 법계를 여의지 아니하고 일백 개의 성을 돌면서 문수보살의 인도를 따라서 어진 이들을 차례로 만나면서 그 목적을 이행해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삶의 터전인 공간이 있고 이 공간 속에서 이동해 가는 것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의 세계라는 입장을 가지게 되면 옮긴다는 공간적인 의미는 불필요한 것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전체를 부분만 보면 조각에 지나지 않지만 크게 보면 한덩어리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본디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난다고 하는 것은 본래의 자리에 다다르는 것이요, 간다는 것은 본래의 자리로 향해 가는 것은 일컫습니다.
삶 속에는 공간만이 아니라 시간도 함께 합니다. 그러나 앞에서 구세 십세에 이미 시간은 부정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여기에서 문득 정각을 이루었다고 하는 것은 시간에 대한 개념을 다시 일깨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간은 삼세에 융합하고 또 공간에도 융화되어 조금도 걸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과 열반이 각각 나누어진 개념이 아니라 법계라는 의미 속에 녹아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을 하나로 묶는다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늘 삶과 죽음을 나누어 둘로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누는 것이 바로 속박이 되는 것임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누고 나누어서 나눌 수 없는 상태는 언제나 그 나누기를 시작했던 처음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참다운 삶의 본질을 실현시키는 의미요, 서원을 전개시키는 무대입니다.
나고 죽는 것을 윤회라 하고 원인과 조건들에 의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생존 양식의 변화라고 한다면, 남에게 끄달려서 살아가는 삶을 분단 생사分段生死 라하고 어느 것이든 자신의 자유 의지에 따른 원력으로 살아가는 삶을 변역 생사變易生死라고 합니다. 이 둘 가운데에서 구별이 되는 삶, 다시 말해서 자신의 의지로 변역시켜 가며 살아가는 삶을 열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 열반이 언제나 서로 함께 한다는 것은 공간과 시간의 조화 속에서 자유 의지를 가지고 주위를 변화시켜 가면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식 주관은 개체를 결정하고, 모든 잘못된 대상화의 근본 원인이 되어 본질적인 지혜(마음)를 덮어서 맑고 밝고 깨끗한 거울이 되지 못하게 합니다. 이러한 주관을 버림으로써 근본지(진리의 체현)에 다다르게 될 것입니다.
무관 월정사로 출가하여 해인강원을 나왔다. 대구 은적사 부설 룸비니 유치원장을 거쳐 해인강원 강주를 역임했으며 지금은 월간 해인의 편집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