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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 이운 해로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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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대 - 수다라 역사탐방단 1996년 10월 176호
이 몇 년 동안 답사 문화가 유행처럼 번졌다.
답사의 현장에는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옛 분들의 자취가 남아있고 , 그 자취들로 하여 옛 분들이 살았던 시대의 자화상, 문화, 예술의 정도를 가늠하고 평가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 자취가 그 곳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것은 그의 역사를 증언하는 표지였다.
팔만대장경 이운 해로 답사는 지금까지의 그런 상식적인 답사가 아니었다.
고고학자들이 무엇이 있음직한 장소에 가서 땅을 파 대는 그리하여 무엇인가 발견되기를 기대하는 그런 낭만적인(?)답사도 아니었다.
배를 타고 훌쩍 지나갔을 그 길에 어떤 흔적이 남아있을 리 만무다.
더구나 오백여 년이 지난 일이 아닌가. 그럼에도 팔만대장경 이운 경로 답사는 값진 의미가 있었다.
팔만대장경 조성은 1236년에 시작, 1251년에 완성되었다.
이 완성된 경판을 강화에서 해인사로 옮긴 것은 1398년(태조7)으로 보는 게 정설이다.
598년 전의 그 이운 길을 답사에 나선 이들은 해인 승가대 학인 스님 25명, 강원에 올해 여름방학이 시작되던 지난 8월28일부터 31일 까지 삼박 사일 동안 실시했는데 , 오랫동안 힘써 오던 해인골프장 저지 운동이 마무리가 되지 않은 상태라서 학인 스님들의 역할은 분산되었다.
처음에는 사십여 명의 스님들이 동참할 예정이었으나 골프장대책위를 비울 수 없어서 스물 다섯 명이 해인사를 출발했다.
대장경 이운 방법에는 두 가지 설, 육로와 해로가 있다.
바닷길이 정설로 굳어지곤 있지만 근거가 분명하지는 않다.
따라서 육지 길로의 가정도 배제할 수 없다.
만일 육로를 택했다면 강화 선원사를 출발하여 한양 지천사-한강 광나루-장호원-충주를 거쳐 문경새재를 넘고 상주 낙동강으로 내려와-고령 장경나루-백운동 자재제 고개를 거쳐 해인사에 도착했을 것으로 본다.
바닷길은 강화 선원사-한양 지천사 태안반도-안흥항-변산반도 법성포 목포-여수-부산 낙동강-고령 장경포 백운동 가재제 고개를 넘어 해인사에 닿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 두 이운 방법 중 육로 답사는 십 년 전 해인승가대 학인 스님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598년 만에 처음으로 이번에 해로 답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해인승가대교지「 수다라」(편집장 본학스님) 주최 \'수다라 역사탐방\' 은 598년 만의 틈 속으로 발을 내디딘 것이었다.
그것 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했다.

해인사 구광루 에서 입제식을 마친 스님들은 해인사에서 가장 가까운 포구 장경나루로 향했다.
장경나루는 본디 개경포開經浦였다.
대장경이 들어와 경을 열었다는 뜻이다. 이곳을 뒤에 일본 사람들은
개포開浦라 했고, 대장경이 해인사로 들어오기 직전 육로와 해로의 마지막 도착 지점이 이 곳이다. 해인사에 불과 삼십 킬로미터쯤 떨어진 장경나루는 허허로운 여느 강가에 지나지 않았다. 뱃길이 쇠퇴한 지 얼마던가. 그날의 역사가 잊혀진 지 얼마던가.
번화했을 장경나루는 흔적조차 없고 작은 통통배 한 척만 세월을 흩날리고 있었다.
오직 그 이름 \'장경나루\'만 고스란히 남은 채. 흔적 없이 천연덕스럽긴 강화도 매한가지다. 완성된 대장경이 해인사로 내려가기 직전까지 머물러 있었다는 선원사, 강화로 천도한 최씨 무신정권이 원찰로 세웠고, 대장경 조성의 총지휘본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선원사는 절터의 범위조차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선원사 뒤편 마을은 도감마을 , 대장도감이 있어서였는지 , 아니면 강도시대의 훈련도감 자리였는지도 밝혀볼 일이다.
드넓은 바다가 매립지로 변한 들판을 뜰앞의 정원으로 삼고, 바로 뒤곁의 삼천여 평을 선원사지 사적지(사적 제 259호)로 두고있는 선원사.
그 역사적인 사찰의 복원 불사를 굳건한 원력으로 세우고 매진중인
주지 성원스님의 역할이 주목되는 것은 왜일까.
팔만대장경이 , 고려시대 당시 전국의 3대 사찰로 가슴 벅찬 불사를 진행한 선원사터지만 종단차원이나 정부당국의 관심에서 외면된 채 한 스님의 원력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아, 여기서 고려대장경, 팔만대장경 조성 불사와 관련된 단 한 점의 유물이 라도 얼굴을 내민다면...
그러나 대장경이 빠져나간 물살은 거칠고, 역사는 여전히 냉정하였다.
또 하나의 관심은 한양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었던 지천사다.
지금의 시청 앞 프라자호텔 자리라고 한다.
강화 앞바다에서 마포 용산강을 경유해 들어온 대장경판을 잠시 서울구경을 하도록 맞이했다고 전하는 지천사는 대체 어떤 절이었을까.
태조왕이 나와 대장경을 맞이하고 이천 명의 군사가 동원되어 호위하였으며, 오교양종의 스님들이 경을 독송하면서 대장경판을 맞아들였다는 지천사는 분명 어떤 영향력이 있던 절이었음에 틀림없다.
표지석 하나 없이 깔끔(?)하게 지천사를 잊고 있는 그 터는 무엇을 말하는가.

한 장에 3.25킬로그람의 무게를 가진 대장경판.
그 팔만천이백오십여덟 장의 대장경판은 어떤 배에 어떻게 실려 물 위를 달렸을까.
호남 지방의 생산물을 서해 바다를 누비며 실어날랐던 전남 영광의 법성포.
천이백 년 전 부용창芙容倉이 있었던 법성포法聖浦의 경유는 자연스런 코스였을 것이다. 이 번화했을 포구 또한 불교와 깊은 관련이 있었음을 그 이름이 암시하고 있지만 그 이상의 내력은 알 수가 없다.
남해 분사도감이 있었다는 \'남해\'의 비밀도 만만치 않고 , 그 곳을 지금의 남해군 고현면 대사리로 추정하게 하는 정황들은 많다. 물이 빠져나가면 아득하게 펼쳐지는 갯벌, 구십 년 전 매립되었다는 관음포만의 바다.
지리산에서 나는 경판용 자작나무를 섬진강에서 띄우면 바로 이 곳 관음포구만으로 들어온다는 사실, 마을 뒤편의 야산에 큰 절이 있었대서 불려지는 대사리大寺里, 마을 논바닥을 수미터 파니 숯검댕이 나무토막들이 나왔다는 증언...
그러나 이러한 물증과 정황들로 발굴의 그날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대장경판이 긴긴 뱃길을 가면서 경유한 지점은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학인 스님들에 따르면 \"옛 뱃길을 따라 답사다운 답사를 하려면 보름은 잡아야 한다\" 고 아쉬워했다.
대장경판이 험난한 뱃길 도중에 머물렀던 지점, 경유했을 지점을 따라가 보는 일도 이 젊은 학인 스님들이 처음이라는 데서 우리는 놀랍고도 감사한 마음이다.
아직 밝혀져야 할 팔만대장경의 비밀은 많다.
누군가가 그 비밀을 밝혀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신비의 역사로 남겨 두어야 하는 것인지 그것 또한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