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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스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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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고려대장경 - 이윤수 1996년 10월 176호
존경하는 수기스님을 뵙게 돼 감격적입니다.
(빙그레 소탈한 미소를 지으신다.)

스님, 저는 지난 8월말에 해인사 승가대학 학인 스님들과 바닷길을 따라서 대장경 이운경로를 탐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칠백 육십 년 전 고려인의 향기를 찾아 걷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역사를 찾아 나선 학인 스님들의 진지한 모습은 감동적이었습니다?.

역사란 \'인간 노력의 기록\'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경과하면서 그 기록이 어둠에 뒤덮기도 하고 그 기록에 잡티가 묻어 흐려지기도 합니다.
그 때문에 역사 속의 진실을 찾아간다는 것은 어느 때고 벅차고 힘겨운 일임에 틀림없지요. 후세에 전해지는 기록이 역사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 그보다 역사에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사실\' 로 \'생명력\'을 지니고 남는다는 것입니다.
\'고려\'가 여러분들의 내부에서 잃어버린 역사, 잊혀진 역사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님을 확인하게 돼 정말 반갑습니다.
더구나 공부하는 스님들이 내딛었던 역사 탐구의 시간이었던 만큼 의미 있었을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고려는 수많은 학승들이 눈빛 푸르게 탐구하는 분위기로 가득했습니다. 서로 닮기 위해서 자극 받아 정진하던 때였습니다.
그런 정신들이 빛 바램 없이 이어질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 없겠지요.


그렇지만 스님, 고려를 두고 역사 학자들은 우스개 소리로 \'고려의 역사는 고려만 하다가 끝나는 것 같다\' 고들 이야기합니다. 고려 역사에 대한 연구만큼은 체계가 잡히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데요. 그이유가 어디에 있는 걸까요?

물론 자료가 턱없이 부족하다 보니 고려 쪽에 대한 연구가 미진한 탓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봉사 코끼리 만지는 격\' 이란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숱한 외침을 겪으면서도 눈부신 문화를 구가하고 찬란한 역사를 이끌어온 고려를 총체적으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체계가 서지 않는 걸 겁니다.
고려는 통일신라시대의 흥성한 불교를 이어받아 정치와 생활의 이념으로 삼았습니다. 풍수지리설과 유학이 팽배할 만큼 다양한 사상이 수용된 나라였습니다. 그것은 불교의 원융함 이 바탕돼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적 사상이 삶의 바탕, 역사의 바탕을 이룬 나라가 바로 고려입니다. 그 때문에 나라전체의 문화적 역량이 컸다고 나 할까요.


그럼, 스님께서는 전란의 와중에도 대장경이라는 대작불사가 원만하게 이루어진 요인이 문화적 역량이 컸던 데에 있다고 보십니까?

모든 필요 충분조건들이 다 갖추어졌던 것이 가장 큰 힘이었을 겝니다. 이를테면 뛰어난 학승들이 포진해 있었다는 점, 그 때문에 대장경 목록 작성에서부터 기획, 준비, 추진, 과정이 순조로울 수 있었지요. 원나라에 사경 잘하는 스님을 몇 백 명씩 파견할 만큼 사경문화가 꽃피어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니 고려대장경을 새기기 전에 있어야 할 붓글씨 원본들이 충분히 준비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경판 마다 한 사람이 쓴 듯 고른 글씨체를 보이는 것 역시 판각에 있어 실력있는 각수들이 무궁무진했다는 증거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인력자원이나 무르익은 문화적 분위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잊고, 자신을 버리고 국난극복을 위해 보시의 정신으로 모두가 하나 됐던 \'고려인의 대원력\' 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재물로써 보시할 수 있는 이는 재물로, 사경이나 판각 등 조성에 동참할 이는 여러 해 동안 가족조차 잊은 채로 고려대장경 조성에 하나가 돼 보이지 않았습니까. 전란의 와중에서 고려인의 무아와 통일의 정신, 이는 참으로 엄청난 대작불사를 원만하게 회향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이지요.


스님께선 대장경 조성의 총책임자셨습니다. 중책을 맡으신 분으로서 어떤 점에 중점을 두고 이 불사를 진행하셨습니까?

대장경의 조성은 수많은 사람들 이 나를 잊고 동참한 불사였습니다.
정책적인 것이 어떤 것이었든 상관하지 않고 오직 초조대자경이 조성돼 거란족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처럼, 다시금 고려대장경을 조성해 몽고의 침입을 물리치려고 했던 고려의 민중들, 그들의 정신을 난 한시도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만큼 대적불사에 동참한 그들의 건강과 그들의 무사고를 자고 깨면 챙기는 것이 일과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불사이다 보니 사고가 빈번할 수밖에 없습니다. 함께 땀흘리며 뛰어다니며 독려하고 불편한 점은 없는지를 보살피고 사고를 최소화하는 데에 만전을 기했습니다.
가장 소중한 저들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 내 할 일이다 하는 각오였다고나 할까요?
더불어 몽고군의 말발굽에 유린당하는 이 땅과 이 땅의 민초들이 대장경의 조성을 통해 불보살님 의 가피속에 하루속히 구해질 수 있기를 기도하는 일도 빼놓을 수 없었지요.

대장경 조성 과정에서 스님을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것은 어떤 점이었습니까?


1996년을 사는 스님들게 한번 물어보시죠. 열에 아홉 분이 틀림없이 이렇게 답하실 겁니다. 대작불사를 하는 동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순간순간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다 마치고 나니 정말 까맣게 잊게 되더라, 라구요.
저 역시도 그렇습니다. 고통스러웠던 지난 일은 전혀 기억되지 않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워 기억하고 싶지 않으신 건 아닐까요?
(예의 소탈한 미소를 살짝 흘리셨다.)


반면에 보람도 남다르셨을 겁니다?

그렇다 마다요.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대장경 조성을 위해 민초들이 강제로 동원했다면 그렇게 아름다운 글씨체가 한결같이 판각될 수 있었겠습니까? 인경을 위한 목판인쇄물로서가 아니라 호국의 염念과 예술혼이깃든 고려대장경이 탄생된 것은 보시 정신에 입각한 백성들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준비 기간까지를 포함한 십 육 년 의 대장경 조성 역사가 단순히 경판을 만든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지요. 고려대장경의 조성, 그것은 고려인의 피와 혼으로 빚어진 대결집 입니다.

스님 , 아무리 들추려고 해도 고려대장경은 많은 신비에 싸여 있습니다. 특히 오늘의 첨단 과학으로 중명 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은 듯합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서구적인 세상에 길들여진 눈으로 우리의 옛 역사를 돌아보면 절대 선조들의 정신과 마주할 수 없을 겁니다.
신라의 신라다운 첨단과학문명을 오늘의 첨단과학으로 재단하려 하고, 고려의 고려다운 정신을 오늘의 사고로 저울질 하기 때문에 그리 여겨지는 것은 아닐까요?
고려대장경에 관한한 신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직 드러나지 않아 불가사의하게 여겨질 뿐이지요.
모두들 1996년의 눈으로 바라보려 하잖습니까?
그 눈을 칠 백년 전의 눈으로 되돌려서 고려대장경을 생각해 보십시오.
고려인의 정신으로 눈높이를 맞추면 아마 모든 해답들이 나올겁니다.

대장경 조성의 총재임자라는 크나큰 역할을 담당하신 스님에 대한 자료가 너무 미약합니다. 스님 같은 분의 자료가 남아 있지 않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자료로 절 보려고 하는 분들껜 그 자료가 바로 제 모습의 전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