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문을 공부하리란 기대를 가지고 올라온 서울은 내 뜻만큼 만만치 않았다. 먼 친척 아저씨가 경영하던 필방에서 일을 도우며 공부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나, 세속과 인연이 없었던 까닭인지 아저씨가 남의 빚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공부할 기회는 쉽사리 오지 않았다.
내 사정을 딱하게 여긴 아저씨는 당신과 잘 알고 지내던 선학원의 남 전스님에게 나를 보냈다.
\"게 있다가 공부할 수 있으면 해라.\"
선학원은 우리 불교가 일본의 탄압으로 시달리고 있을 때, 올바른 민족종교로서 우리 불교를 일으키는 일에 뜻을 모아 전국 선원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선 도량으로 세운 것이다.
만공, 용성, 혜월, 도봉, 석두, 남전, 상월스님 등 여러 고승대덕들이 중심이 되어 1920년 서울 인사동에 설립하였는데, 내가 1923년에 선학원으로 들어가 보니 내 은사 스님이 되신 남전스님 , 그리고 석두, 도봉, 만해 스님 이렇게 네 분이 주석하고 계셨다.
선학원에 머물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행자\'가 되었다.
행자로서의 나날은 시집살이도 보통 매운 시집살이가 아니었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도량을 청소하고 대중 스님들의 공양을 준비하는 것은 물론, 방방마다 군불을 지피고 장을 봐오고...
나무시장에 가 마차로 실어온 통나무를 패서 요사채 뒤뜰 담벽 에 쌓아놓은 뒤 방방마다 군불을 지피다 보면 어느새 하루해가 저물었다.
다른 행자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순전히 혼자서 선학원의 온갖 허드렛 일을 날마다 소처럼 해대는 내게 남전스님이 말하였다.
\"마음에 틈이 생기면 쓸데없는 생각이 끼어들어 사람을 게으르게 한다. 그러면 마음에도 때가 묻기 마련이다.\"
남전 스님은 선지가 밝은 선사였고 학문이 높은 학자인데다 빼어난 명필이었으나 좀처럼 그분에게 불경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그저 오며 가며 스님의 글쓰는 모습만 보았을 뿐이다. 아침, 저녁으로 올리는 예불을 위해 염불을 익혔고 행자 생활 육 년 동안 「부모은중경」을 스님에게 배웠을 뿐이다.
그러고는 일이었다. 전국의 선객들이 서울에 오면 으레 들르는 곳이 선학원이었다.
그러므로 늘 객 스님들이 끊이지 않았고 , 그 분들의 뒤치닥거리는 내 몫이어서 늘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천성이 워낙 번민 이라는 것을 모르고 담백한 성품이었으나, 그 시절
십대 소년이었으니 다른 젊은이들처럼 세상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았고, 고향에 다닌 글방 말고는 학교 문턱에도 가 보지 못한 터라 야학에라도 나가 우리말과 글을 배우고 싶었다.
운동도 좀 하고 싶었으나 엄한 남전스님 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스님은 내 바깥출입을 일체 금했다. 밖에 나가면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어 안 된 다는 것이었다. 은사 스님의 말씀은 곧 법이었으니, 나는 그러한 소망들을 마음 갈피에 접어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해, 남전스님이 무슨 일로 선학원을 비울 일이 생겼다.
나는 오래 생각하지 않고 야학에 나갔다. 종로에 있는 청년회관에서 하는 야학이었다. 그리고 끝나고 난 열 시에 청계천 옆 동대문에 임시로 만들었던 스케이트장에 들르곤 했다. 그 오밤중에 누가 스케이트를 타러 나오랴 싶겠지만 가보면 나 같은 사람이 여럿 있었다.
한겨울의 그 칼바람을 맞으며 스케이트를 타다 보면 귀가 떨어져나갈 듯 얼얼했지만 추운 줄 몰랐으니, 젊은 혈기 탓이었을 게다.
스케이트를 열심히 탄 덕분에 뒷날 선학원을 떠나 범어사 강원에 있을 때 , 봄만 되면 귀에서 진물이 나와 몇 해를 고생했다. 기실, 귀가 고장난 것은 꼭 스케이트 탓만도 아니었다.
선학원 살림을 위한 장을 꼭 내가 보러 다녔다.
자전거를 타고 남대문이며 동대문 시장으로 장을 보러 다녔는데, 바람이 찬 날은 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야학에 다니면서 이희승, 최현배 선생의 한글 강의도 들었는데 , 우리말 사랑에 혼신을 다하고 있던 그분들이 누구보다도 애국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출타하였던 남전스님이 돌아오면서 나의 바깥출입은 여섯 달로 끝났다.
그러나 그 시절, 나는 많은 책을 읽었다. 장을 보러갔다가 돌아오는길에 잠깐씩 서점에 들러 조선교육회 에서 발행한 교과서와 「초등 대한 역사」,「고등 소학수신서」등 민족 교육에 사용된 교과서는 물론
「대한 국어문법」,「조선문전」등을 구입 해다 공부했다.
「조선 문단」이나 「개벽」등 문학 잡지들도 열심히 읽었다.
그 잡지들은 내게 무자비한 식민지 통치에 대한 저항의식을 일깨워 주었다.
그 무렵이었을 게다. 모두 잠이 든 한밤중이었다.
누군가 요란하게 대문을 뒤흔들어 나가보니 만해스님 이었다.
\"우리나라는 기필코 독립할 걸세. 그날을 위해 미리 축배삼아 한 잔 했지.\"
만취한 채 휘적휘적 두 팔을 흔들며 승방채로 걸어가던 그 분의 뒷모습에서 묻어나던 나라 잃은 선지식의 고뇌와 비애를 오래도록 나는 잊지 못했다. 만해스님이 시집 「님의 침묵」을 출간하였을 때 그 시집의 출판을 알리기 위해 책방마다 시집을 돌리고, 시집을 판 돈을 스님에게 갖다 드린 적도 있다. 성품이 강직하고 별 말이 없던 분으로 기억된다.
딱히 출가를 위해 선학원에 간 것은 아니었으나 육 년 동안을 선학원에 있으면서 은사 스님인 남전스님을 비롯해 선학원에 주석하던 스님네들의 언행에서나, 전국에서 모여들던 선객들을 보며 자연스레 불교가 무엇인지 수행승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눈여겨 보며 중물이 들었고,
남보다 유난히 긴 행자 생활을 한 선학원 시절이다.
지금처럼 행자 기간이 정해져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언제 끝날지 도 모르는 행자 시절을 보내며 강원으로 가서 체계적인 공부를 하고 싶은 목마름이 커가고 부엌에 들어가는 일에 대한 염증이 깊어질 무렵
범어사 주지스님이 남전스님에게 얘기했다.
\" 저 아이도 이제 놓아줄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범어사로 보내어 경전 공부를 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범어사 주지 스님의 말씀에 남전스님은 나를 비로소 놓아 주었다.
실로 행자 생활 육 년만 이었다.
범어사로 가면서 , 스님에게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어렵게 꺼냈다.
\"범어사에 가기 전 고향집에 다녀왔으면 합니다.\"
선학원에 있으면서 받았던 월급이 2 원, 그 돈을 책을 사 보는 일 말고는 쓰지 않고 모아 두었는데 , 가난으로 고생하는 고향의 어머니에게 드리고 싶었으나 은사 스님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한번 집을 떠나왔으면 그만이지 집에는 왜 간다는 거냐.
범어사에서 한 일 년 지낸 뒤 가도록 해라.\"
나는 그 돈을 은사스님에게 맡기고 늘 그리움에 목말랐던 어머니를 뵙지 못한 채 범어사로 떠났다.
유난히 길고 고되었던 선학원에서의 여섯 해, 열 다섯에 들어가 스무 살 이 되어 나온 행자 시절을 그렇게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