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가을날, 길목에서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세상속의 염화미소 - 성전 1996년 10월 176호
가을은 낙엽을 떨구어 이 지상의 길을 덮는다. 길을 걷던 자도 또는 길을 찾는 자도 이 가을에는 길에 대하여 막막한 물음을 지니게 된다.
길이 사라지고 난 뒤 그 길 앞에서의 막막함. 가을에는 그 누구도 당당하게 자기의 길을 갈 수가 없다.
다만 사라진 길 앞에서 길에 대한 끝없는 모색으로 깊은 사색에 잠길 뿐이다. 활동과 행진은 이맘때쯤에서는 침잠과 사색의 시간으로 바뀌고 낙엽이 떨어지듯 사람들은 낙엽의 추락의 깊이만큼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실존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우수와 불안, 그래서였을 것이다.
가을의 사람들에게는 낙엽 타는 냄새와 같은 아주 깊은 인간의 내음 을 맡을 수 있다.
사람의 내음이 짙어지는 가을이면 나는 웬지 사람을 사랑하고만 싶다.
저물녘 도시의 거리를 쳐진 어깨로 걸어가는 사람을 볼 때 , 그리고 퇴근길에 저녁 찬거리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여인의 야윈 뒷모습을 볼 때 내 눈에는 예기치 않았던 눈물이 고이곤 한다. 텅빈 거리을 핥고 지나던 바람처럼 쓸쓸하게 번지는 눈물.
아주 오래 전 가을, 텅 빈 들녘을 지나 담장을 끼고 길게 이어지는 집으로 가는 오솔길을 걸으며 어머니는 내게 말했다.
너는 사내 아이치고 눈물이 너무 많다고 . 발길에 낙엽만이 바스락거리며 부서지고 어머니 말씀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눈물은 그렇게 말을 잊게 했다.
슬픔이라는 말을 알기 전의 나이였던 내게 눈물은 표현을 모르던 자의 어떤 생득적인 자기 표현이기도 했다.
나의 양친은 알고 있었을까.
내 눈물이 그들에게 다가올 죽음과 그들과 나 사이에 놓인 이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을.
어린 나이의 내가 왜 그런 생각을 지니게 되었는지 지금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양친에 대한 나의 사랑이 깊었다는 것과 사랑한 만큼 \"함께\" 라는 것에 대해 불안해했다는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영문도 모를 죽음과 이별이 나의 뇌리를 메울 때마다 나는 오솔길을 결어 텅 빈 들녘으로 나가고 했다.
들녘의 바람소리를 들으며 서성이다 보면 밤은 너무도 쉽게 찾아왔다.
다만 서성임으로 맞이한 밤.
어둠이 깊어졌다고 느꼈을 때면 영락없이 나를 부르는 양친의 목소리가 들녘을 떠돌곤 했다.
어둠 속에서 만나는 그들의 목소리는 언제나 솜이불처럼 포근했다.
그들과 함께 별빛을 받으며 오솔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 시켜 주곤 했다.
이제 출가사문이 되어 염의 를 입고 도시의 길을 걸으며 죽음과 이별, 그리고 귀가길 의 위안을 함께 주던 내 살던 곳의 오솔길을 떠올린다.
그 오솔길에서 막연하게 나를 감싸던 문제들이 이 길 위에서는 좀더 분명히 보일 듯도 하다. 좀더 길을 걷다 보면 죽음과 이별의 의미에 대하여 분명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낙엽이 내려 내 기억 속의 오솔길을 덮는다. 그 곳에는 답이 없다는 듯 그 길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사라진 길 위에 서서 나는 고뇌한다.
생사의 대사가 끊어져 이별과 만남이 다한 길에 대하여 .
낙엽이 떨어져 길을 덮는 가을 , 보이지 않는 길목을 나는 서성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