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원택 스님은 중국의 장강삼협과 황산을 다녀왔다.
함께 간 사제 스님들은 한결같이, 중국제일 명산이라는 황산도 설악산보다는 못하다고, 설악산을 입을 모아 추어댔다. 입 다물고 앉은 사람은 원택 스님뿐이었다.
설악산은 들머리밖에 가보지 못했던 터라 이야기 속에 끼어 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강원도의 설악산커녕 해인사의 가야산 상봉에도 두 번이나 올랐나. 산에 함께 오르자는 말은 원택 스님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가운데 하나라고 하니, 원택 스님은 산을 떠난 적은 없어도
산승 은 아니라는 우스갯소리를 들을 법하다.
산뿐 아니라, \"어디 뻘뻘 나댕기는 것\"은 그의 취미가 아니다.
은사스님 모시고 사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다고 그는 말했다.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친구 따라 백련암에 놀러 왔다가
\"눈에 불이 출출 나고 불량스러워 보이는 \" 성철스님에게 붙들렸다.
닫기지 않는 판자 문틈으로 스며든 냉기로 다기물 이 얼어 터지는
엄동에 법당에서 삼천배를 끝낸 원택스님은 삭발을 했다.
72년도 1월 이었다.
서른 살을 코앞에 둔 나이에 무명초를 잘리고 열 번째 상좌가 된 그에게 성철스님은 말했다.
\"어, 그놈 인상 좋네.\"
친구와 함께 처음 뵈온 날 들은 말씀은 \"웬 놈들이고!\"였으니 진일보하기는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백련암에서 살고 있으니, 이곳에서 보낸 이십오 년 세월이 그의 법랍과 똑같다.
일고여덟 살에 출가하여 구순에 이르도록 이 곳에서 못 박힌 듯 살고
있는 비구니 스님도 계시기는 하나, 스님 세대로서는 가장 오래다.
구십년대 초에 세 해 도안 해인사 총무 소임 맡아서 큰절 내려가 살던때 말고는 ,어느 스님의 표현처럼, \"솥 밑의 누룽지처럼\" 백련암에만 그저 딱 붙어서 살아온 것이다. 은사 스님이 기대했던 참선공부도 상기가 들고, 뒤이어 디스크가 덮쳐 때를 다 놓쳐버렸다.
출가한 지 몇 달만에, 마당에 떨어진 신문지 쪼가리가 하도 반가와, 놓고 보고 치겨 들고 보고 하다가 \"신문지 들고 춤추는 놈\"이라는 야단 들은 뒤로 간경 공부도 해보지 못했다.
그리고 꼬박이 큰스님 곁에 머물렀고, 세 해 전에 스님 가신 뒤로도
\"뒷마무리 일\"로 아직도 그 곁에 머물고 있는 셈이다.
삼년, 큰스님 떠나신 지 벌써 그렇게되었다.
원택 스님에게 큰스님은, 다른 무엇보다 \"산승 은 산을 떠나서는 안 된다\" 는 수행자로서의 면모를 분명하게 보여 주신 분이었다.
참혹한 사회 현실에 대해 아무런 입장표명도 안 해 주시는 그 분을 두고, 불교계를 대표하는 종정으로서 그러실 수가 있느냐고, \"보수주의 시자 니부터 깨 놓아야겠다고\" 섭섭해 한 스님들도 많았다.
그러나 성철스님의 일관된 뜻은 산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리의 그 섭한 뜻을 전하는 원택 스님에게 소리치곤 했다.
\"안 나가기가 나가기보다 더 힘들다!\"
그 스님 열반하시자 다비하는 날, 해인사로 십만 또는 삼십만의 애도
인파가 몰렸다. 경부고속도로에서 팔팔 고속도로로 갈라지는 화원인터체인지부터 차가 움직이지 못했다.
그때에 성철스님의 처신을 불만스러워했던 스님들도 이제 와서 그렇게 산중을 지켜주신 것에 대해 \"동의하고 싶다\"고 할 만큼 세월이 흐르고, 역사가 또 바뀌었다.
스님 살아 생전에 ,물도 먹여 줄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게으르고 어긋나는 제자들을 탓하면서, \"공부를 하든 말든...\" 하고 팽개치듯 말하다가도 꼭 세 사람은 필요하다고 아쉬워하곤 했다.
참선을 잘해서 도를 통할 사람, 경전연구를 부지런히 해서 불교 이론에 화통 하게 될 사람, 그리고 심리학, 자연과학, 심령과학 따위의 학문을 통하여 불교에 최신 과학의 이론 체계를 세운 뒤 포교에 나설 사람, 그렇게 세 사람이었다.
위대한 사람은 참 많지만, 그들의 역량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이 아닌가, 원택 스님은 요즘 그렇게 생각한다.
그 역할을 노장님이 혼자서 다 감당하셨다 여겨지기 때문이다..
살아 계실 때 그 무형의 재산에 대해서는 까맣게 모르고 세월 보냈구나, 그런 아쉬움이 많이 든다.
그런 뜻으로 한 말씀도 아니었으려니와, 그것이 단 세 사람으로 될 일이었겠는가.
여러 십 명이 달려들어도 해내기 힘든 일일 터였다.
그만한 깨달음이 있었으니, 몫몫이 해야 할 일은 깜냥껏 추어내야 할 터였다.
떠나신 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은 큰스님을 역사 속에서 제대로 자리잡게 하고, 그물줄기를 조금이라도 더 멀리 흘러가게 하는 것이라고 그는 믿는다.
생전에 원전 연구의 필요성에 대해 누차 역설했던 성철스님의 뜻은 백련문화재단을 설립하게 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87년에 설립된 이 재단의 주요 사업내용은 불경연구가 지원 및 불서편찬, 그리고 불교 지도자 양성 같은 일들이었다.
그 사업의 일환으로 올 삼월에 \"성철 선 사상 연구원\"이 개설되었다.
원장인 목정배 교수를 비롯하여 서울대 윤원철 교수, 그리고 연세대 신규탁 박사 등 여섯 사람이 참여하고 있는 이 연구원은 불교 전반에 대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선에 대한 연구로 차츰 방향을 좁혀가게 되리라 한다. 그리하여 궁긍적으로는 , 선종의 본래적이고 전통적인 종지는 현재 대세를 이루고 있는 보조의 돈오점수 사상이 아니라, 돈오 돈수 사상이라는 성철스님의 주장에 이론의 체계를 세우게 하기 위함이다.
뒷마무리 일 가운데 목전에 닥친 큰일 가운데 하나가 사리를 봉안할 사리탑을 세우는 일이다.
설계안을 공모했으나 마땅한 것이 없어 제일동포 설치 미술가인 최재은 씨에게 설계를 의뢰했다.
웅장하지도 않거니와 , 상당히 모던하여 기존의 것과는 사뭇 다른 파격적인 조형물이 될 이 사리탑은 큰스님 삼주기 즈음에 기공식을 올리게 된다.
설치 미술가라니!
-삼성서울병원영안실 앞에 있는 푸른색 커다란 눈물방울의 조형물이 그의 작품이다.-
설계안을 두고 문중에서조차 설왕설래가 없지 않았다.
모던한 이형이 줄 위화감과 웅장하지도 않으니 초라해지지는 않겠는가 하는 우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옛날의 것 그대로 답습하는 구각에서 벗어나 \'이 시대의 탑\'을 한번 만들어 볼 시점에 이르렀다\" 고 일축하고 말았다.
이 일은 \"백련암 누룽지\" 인 \"택스님\" 의 면모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보아도 될 듯하다.
그의 한 발 앞서가는 기획력 과 그것을 성사시켜 나가는 추진력은 남다른 데가 있음은 절집 안에서도 널리 알려진 바이다.
\"선종사상 처음으로 시도된 선서 간행불사\"인 「선림고경총서」를
기획하고 제작해 낸 과정도 그러했다.
\"고불 고조들의 말씀이 한문으로만 적혀 있으니 , 언어 생활이 다른 요즘 사람들이 쉽게 읽힐 수가 없는 만큼\" 대장경에 수록된 옛 조사 스님들의 말씀가운데 참선을 위해 가장 요긴하다고 생각되는 서른여 가지 책을 가려 번역하게 한 것이다.
그것을 회원제로 해서 제작비를 마련하고자 했다. 성철스님이 주장하는 돈오 돈수는 평지 돌출적인 혼자만의 의견이 아니라, 육조나 마조나 백장도 모두 이야기한 것임을 그 작업을 통해 밝혀 두어야 할 터였다.
기획의 뜻은 성철스님도 인정하였으나, 유가지, 그것도 회원제로 하여 미리 돈을 받고 재원을 마련하자는 데에는 한사 반대를 하고 나서셨다. 그러나 원택 스님은 , 법 보시야 인연 있는 사람만 얻어 보게 되는 한계가 있는 배포법인 만큼 , 유가지로 해야 책을 읽을 마음이 있는 사람들에게 두루 익히게 될 터임을 굳게 믿었고, 또 사실이 그러했다.
성철스님 열반 한 달 전에 서른 일곱 권으로 완간 이 되어 그 일은 성공했다. 회원제 개념은 역경원에서 먼저쓰고 있었던 것이지만, 문중 단위로는 최초로 시도된 일이었다.
수자 들의 반대도 만만찮았다.
선서 번역 일은 선지가 없이 도모할 일이 아니라 했다.
그러나 \"보고 싶어도 한문이 짧아 볼 수 없는 사람을 위하여, 도의 개울을 건너게 하는 징검다리를 놔 드릴 터이니, 선지 있는 자가보고 잘못된 데를 일러주면 고쳐 놓겠다\" 고 말했다.
그 스님들이 걱정했던 대로, 그 결과물에 큰 잘못은 없었던지, 끝내 놓고 나니 \"애썼다\"고 격려해 주었다. 지금은 그에 이어, 스님 계신 동안에 기획되었던 「오등회원五燈會員」(열 권)과 「명추회요冥樞會要」(세 권) 발간을 준비중이다.
성철스님은 말씀하셨다.
\"내 집은 단청하지 않는다.\" 66년부터 주석 하여 94년에 열반하시기까지
머문 백련암을 이루는 당우 들은 그래서 색色 이 없다.
명암만 있을 뿐이다. 이 가운데 유난히 검은 옻칠과 청동 부장물로 눈길을 끄는 곳이 고심원古心院이다. 문이 채 달리기 전에 성철스님은 떠나셨지만, 당호는 손수 지은신 것인다. 원택 스님은 이 곳에 조각가 강대철 씨가 현재 조성중인 성철스님의 좌상을 모시려고 한다.
희랑 조사의 예가 있기는 하지만, 법당에 조사의 조상彫像을 모시는 일이 우리나라에서는 낯선 경우이고, 중국에서는 조사의 신체를 그대로 쓰는 육신 보살상은 흔히 볼 수가 있다고 했다.
이즈음 들어 몇 군데 절에서도 큰스님 조상 모시기가 시도되고 있지만,
이 또한 스님의 \"한발 앞서 나가는 기획\"임에 틀림없다.
이런 \"개안\" 은 그가 사리탑에 대한 외국의 경우를 참관하고자 일본에 들렀을 때 이루어졌다. 몇 군데 절을 둘러본 것에 불과하지만, 그 곳에서는 하나같이 절 입구의 큰 법당에 개 창조를 모셔 놓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는기껏 일 년에 한번 제사를 모시는 정도이니, 조상에 대한 공경심은 부족한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 것이다.
성철스님의 영정 제작에 쏟아 부은 그의 열성도 그러했거니와 , 사리탑과 조형물에 이르기까지, \"유형의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형상적인 것도 무시할 수가 없다\" 는 것이 원택 스님 의 생각이다.
그것이 불교의 무소유사상에는 반反한는 것이 되더라도, 형상화하는 일을 주도할 예술가들에 대한 그의 인식은 확실히 남다른 것이다.
그 형상이 역사 속에서 살아나는 것은 전적으로 예술가의 손에 달린 것이라고 \"새삼스럽게\" 말했다. 그는 그래서 \" 알아주는 \" 수준급 예술가들과의 교유를 더없이 귀하고 다행스럽게 여긴다.
가야산 자락이 비에 젖기 시작하나 싶더니, 삽시간에 아랫녘 사바는 사라지고 , 해인사는 한 채의 커다란 배가되어 운무 위로 둥실 떠오른다. 백련암은 그 꼭대기에 있다.
그에 댈 것은 아니지만, 서울에 있는 해인 편집실도 높은 축대에 지어져 까치집 같은 곳이다.
개발 제한 지역으로 묶여 있어서 전망하나는 시원히 확보된 이 누옥의 반 이상을 뒤덮고 있는 것은 마당의 감나무이다.
까치집 느낌은 거침없이 가지를 뻗어 올린 이 감나무 때문이기도 하고, 비만 오면 빗물받이 물통을 갈아대야 하는 까치집과 다를 바 없는 \"무방 비성\"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뜻깊은 곳이다.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해인지가 창간된 지 십칠 년, 절 집안에서 월회보 형식으로 펴내는 간행물의 시조이자 전범이 되어 준 책이라고 해도 크게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진보적인 내용으로도 그랬고, 참한 책의 모양새로도 그러했다.
강원 학인들 의 원력으로 청소년 포교지로 시작되어 사부대중을 위한 짬진 읽을 거리로 발전하기는 했다.
그러나 이제는 \"발상의 전환\"을 꾀해볼 때에 이르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을 털어놓은 원택 스님은 해인지 의 편집자문위원이다.
대구 편집실 시대를 거쳐 서울 편집실 시대를 시작할 때에 수월찮은
제작비와 편집실 마련 등에 한몫을 하기도 했거니와 , 음으로 양으로, 십년이 넘도록 편집위원으로서 해인지 의 지속적인 발간에 큰 힘을 보탰었다.
\"택 스님 숨은 공로는 아무도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어서 한마디하는 거야.\"
택 스님 , 오늘 옛친구들 만나 말이 헤퍼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