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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 과 선禪의 교리적 지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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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법성 1996년 10월 176호
선禪은 선나禪那의 줄인 말이며, 선나는 인도말 디야나Dhyana의 소리옮김이다. 디야나는 사마타Samatha와 비파사나Vipasyana라는 두 측면 의 실천이 하나 됨이니, 사마타는 존재에 대한 뒤틀린 관념과 허위
의식을 쉬어 그침(止)이며, 비파사나는 존재의 연기적 실상을 살펴
드러냄(觀)이다.
그런데 사마타의 쉬어 그침은 보는 마음(能觀心)과 보여지는 경계(所觀境)에 실로 그렇다 할 것이 없으므로 쉬어지는 것이니, 쉬어 그치되 쉬어 그침이 없는 그침만이 사마타의 바른 모습이 된다. 또한 바파사나의 살펴드러냄은 보는 마음과 보여지는 경계에 실로 그렇지 않다 할 것이 없으므로 살펴 드러내는 것이니, 살펴 드러내되 살펴 드러냄이 없는 살핌만이 비파사나의 바른 모습이 된다.
사마타의 쉼이 쉼이 없는 쉼이므로 사마타의 쉬어 그침은 늘 살핌 그대로의 쉼 즉(卽觀之止)이 되는 것이며,비파사나의 살핌은 살핌없는
살핌이므로 바파사나의 살펴 드러냄은 늘 쉼 그대로의 살핌
(卽止之觀)이 되는 것이다.
선은 이처럼 지관止觀이 함께 굴러가고 함께 행해지는 것이니, 지관구행止觀俱行의 선을 경전과 어록에 따라서는 정혜쌍수定慧雙修라 하기도 하고, 정혜등지定慧等持라 하기도 하고, 적조동시寂照同時라 하기도 한다.
이때 지관구행, 정혜쌍수가 수행의 도중사途中事에서 선을 말하고 있다면, 정혜등지, 적조동시는 깨달음의 가리사家裏事에서 선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수행의 도중사 가운데 실로 끊을 번뇌가 없으며, 깨달음의 가리사 가운데 실로 얻을 보리열반이 없다면, 도중사는 가리사를 떠나지 않으며 가리사는 도중사를 여의지 않는 것이니, 정혜쌍수와 적조동시를 서로 다른 법이라 말해서는 안 된다.
옛 조사는 다만 닦음에 실로 닦을 것이 있다는 집착을 깨기 위해
\'보리자성이 본래 청정하다(菩提自性本來淸淨)\'고 말하되 깨달음에 실로 깨칠 것이 있다는 집착을 깨기 위해 「화엄경」은 \'보현행원으로 보리를 이룬다 (以普賢行 悟菩提)\' 고 말한다.
돈오돈수(頓悟頓修)란 한번 깨쳐서 다시 더 닦을 것이 없는 정체된 경지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도중사가 온통 가리사 이며 무념의 깨달음이 온통 머뭄 없는 묘행(無住妙行) 으로 전개됨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위 없는 참사람은 지금 어느 곳에서 안심입명하는가 (無位眞人 在甚魔處 安心入命). 곧 \'십자가두 에 티끌 먼지 뒤집어 쓴사람 (十字街頭 蒙塵人)\' 이라 할 것이다.
경전의 가르침(文字般若)은 세계의 실상(實相般若)을 깨친 붓다의 지혜의 삶(觀照般若)이 언어적으로 발현된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의 실상은 경전의 가르침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지만, 경전의 언교를 떠나 있는 것도 아니다.
경전의 언어도 연기된 것이므로 언어상言語相이 스스로 고요한 것이니, 언교의 있는 모습에 집착하는 자도 언교를 떠나 따로 적멸한 실상을 구하는 자도 여래의 참뜻을 보지 못하는 자이다.
교외별전敎外別傳은 가르침의 언설상에 매몰되어 실상에 돌아가지 못하는 자들의 집착를 깨기 위한 주장일뿐 속제로서의 가르침 밖에 진제가 따로 있다는 뜻이 아니다.
연기적 세계관에서 본 원류로서의 선은 교가 아니되 교 아님도 아니며, 선은 행이 아니되 행 아님도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 선과 교, 선과 행의 이원화로 갈등하는 한국 불교의 사상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선이 종파화 된 뒤의 조사어록만으로 선의 지표를 세우기보다 ,종파 이전의 원류적인 경교에서 출발해서
조사어록으로 내려오면서 선의 이론적 지표를 다시 점검해야한다.
근본불교의 수행관은 「대품반야경」에 모두 집약되며 불타가 제시한 모든 해탈의 실천은 육바라밀로 요약된다. 그리고 대품반야에서 선나바라밀은 선일 때 보시바라밀이며, 선일 때 지혜바라밀이며, 선일 때 정진바라밀인 역동적인 선으로 표현되니, 이 뜻을 영가 선사의 「증도가」는 \'육도 만행이 체 가운데 뚜렷하다\' 고 말한다.
이제 대품반야와 대품의 석론인 「대지도론」이 선을 행인 선으로 밝혀내며, 선과 바라밀행, 선과 보현행이 둘 아닌 선의 사상적 지침을
세워 줄 것이다.
중국 불교에서 선종의 경전적 연원이 되는 선경禪經은 구마라집이
역출한 「좌선삼매경」과 불타발타라가 역출한「달마다라선경」이다.
「좌선삼매경」은 반야 법화 등 실상론계의 경전과 선의 결합을 이루어왔으며, 달마다라선경은 화엄 능가 등 유심론계의 경전과 선의 결합을 이루어 왔다.
「좌선삼매경」과 「달마다라선경」의 역출 이후 선 수행론을 전체적으로 집약하고 해석한 책은 천태의 「마하지관摩詞止觀」이다.
「마하지관」은 돈오선의 기본 입장을 원돈지관圓頓止觀으로 표현하고, 선수행 방법론을 상좌삼매常坐三昧, 상행삼매常行三昧, 반행반좌삼매半行半坐三昧, 비행비좌삼매非行非坐三昧의 네 가지 삼매로
요약한다.
상좌삼매인 일행삼매一行三昧는「육조단경」에서 재해석되고 조동의 좌선 수행론으로 전승되며, 반행반좌인 선송일여禪誦一如의 선풍은
법안 가풍속에 계승되며, 비행비좌의 수자의삼매隨自意三昧는 행行,
주住, 좌坐, 와臥에 걸림 없는 간화의 선풍으로 전개된다
「육조법보단경」은 당조에 들어 선이 종파화 되는 초기 과정을 반영하고 있는 선종의 근본 종전이며, 수정주의적인 선정 해탈론에 대해 돈오선頓梧禪의 사상적 정통성을 확보해 준 책이다.
또한 「단경」은 동정일여의 생활선을 제창하며 세간을 떠나지 않고 보리를 깨닫도록 가르쳐준다.
대주 혜해 선사의 「돈오입도요문론」은 지위와 차제에 떨어지지 않는 돈오선의 입장을 극명하게 밝혀주는 저술로 계, 정, 혜가 서로 분리될수 없는 실천의 기본 강령을 제시하고 있다
간화선풍看話禪風과 묵조가풍默照家風의 양대종장은 대혜종고大慧宗暠
와 천동정각天童正覺이다.
원론적인 선 이론으로 보면 대혜의 간화는 관觀 으로서 지止를 거두는 선법이며, 묵조는 지로써 관을 거두는 선법이니, 「대혜어록大慧語錄」과 「천동광록天童廣錄」의 번역과 대중적 유포야말로 한국 선불교의
토양을 비옥하게 할 것이다.
법안종 영명 연수 선사는 종파화 된 선불교를 회통적 선풍으로 돌이키려 했던 분으로 선사의 「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은 선과 정토, 무상행과 유상행, 선과 육도만행六度萬行의 하나 됨을 말하고 있다.
한국 불교 선수행의 기본 조류는 간화선풍이다. 한국에서 간화선풍의 체계적인 소개는 보조 선사의 「간화결의론看話缺疑論」 이 효시를 이루며, 제조사의 공안의 집성은 진각 혜심과 그 문인들의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의 편찬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간화의 방법론에 의한 임제법통의 전수는 고려말 태고, 나옹, 백운 세 분 선사에 의해 이루어진다. 백운경한 선사의 가풍은 임제법통을 이었으나, 무념선無念禪의 독특한 가풍을 이루는 바 「백운선사어록」에 대한 새로운 착안이 필요하다.
경과 조사 어록을 읽는 것은 문자의 찌꺼기를 찾는 일이 아니라 문자 반야를 통해 선과 바라밀행에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반대로 선수행에 힘을 기울이되 경교에서 설한 바 바른 지견과 바른 행에 귀착하지 못하면 암증暗證의 선에 매몰될 것이다.
문자법사와 암증 선사를 모두 뛰어넘는 곳에 참된 경 읽기와 바른 선정이 있다.
천태는 그 뜻을 \'손으로 책을 잡지 않고 늘 이 경을 읽으며, 마음으로 사유하지 않고 법계를 비춘다.(手不執券 常讀是經 心不思惟 邊照法界)\' 고 말하고 , 대혜선사는 \'숨 내쉬되 만 가지 경계에 걸리지 않고 숨 들이쉬되 오음과 십팔계에 머물지 않으면 백천만억 권의 경을 늘 읽는다. (出息不涉萬緣 入息如是經 百千萬億券)\'라고 하니, 선류禪流들 은 눈을 들어 자세히 살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