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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각의 내용으로서 정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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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곁의 부처 - 장휘옥 1996년 10월 176호
인간이 원하는 가장 이상적인 세계를 불교에서는 정토라 한다.
정토淨土란 문자 그대로 \'맑고 깨끗한 국토\'를 말한다. 이 곳은 깨달은 자 부처나 깨닫기 위해 수행하고 있는 보살이 사는 세계로서, 맑고
깨끗하기 때문에 어떠한 고통이나 괴로움도 없이 영원히 평안하고 안락하다.그러므로 불교에서는 고통과 번뇌로 가득한 이 세상을
예토穢土라 하여, 언젠가는 이 예토를 벗어나 영원히 안락하고 청정한 세계인 정토에 태어나기를 바란다.
정토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고뇌로 가득찬 이 사바세계를 떠나 사후에는 좀더 나은 세계에 태어나기를 원願하는, 아미타불의 서방극락세계·아촉불의 동방묘희세계 등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불교 본래의 입장에서 자력의 수행에 의해 깨달음을 얻는 것이 그 목적으로서, 마음이 깨끗해지면 국토도 깨끗해지고 부처의 눈으로 보면 현실의 사바세계도 정토가 된다고 하는 「유마경」의 불국토사상이나「화엄경」의 연화장세계,「법화경」의 구원실성久遠實成의 영산靈山 정토 등을 말한다.
그러나 이 두 종류의 정토는 둘이면서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불교의 진리는 중생의 근기에 따라 방편으로 여러 가지를
설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로 귀결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실은 불교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 바로 이 점이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면 정토니 예토니 하는 세계, 즉 국토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즉, 국토는 자自·타他의 인연과 내內·외外의 인연에 의해 성립되어 있다고 한다. 자·타의 인연이란 부모와 자식, 부부 등의 인간관계를 말하고, 내·외의 인연이란 인간과 환경과의 관계를 말한다.
이와 같이 인간의 생활은 자타와 내외의 업연 관계로 성립되는 것이므로, 우리가 외부 세계外界라 부르는 것도 인간의 업과 과보로서 느끼는 세계이다. 여기서 느낀다고 하는 것은 감각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외부세계란 감각의 내용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보고 듣고 맛보고 접촉하는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세계는 우리의 감각에 의해 느껴지는 세계이다.
그런데 느끼는 것은 우리의 심신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어떠한 세계에 사는지는 어떠한 심신을 가지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이것은 동물의 세계를 상상해 보면 쉽게 이해할수 있다. 하늘을 나는 새나 물 속을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들은 각각 다른 세계에 존재하고 있다. 인간의 세계도 이와 마찬가지다. 맹인에게는 색깔의 세계가 없고, 귀머거리에게는 소리의 세계가 없다. 건강 상태에 따라서는 추위와 더위의계절도 또한 다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욱 분명한 것은 , 그 사람의 성격과 기질에 의해 세계가 다르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공통의 세계라 하는 것에도 여러가지 층이 있다. 가족의 세계·동족의세계·인류의세계·동물의 세계·식물의 세계 등 중첩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갖가지 공통의 세계에 살고 있으며, 동시에 갖가지 특수한 세계에 살고 있다.
이 공통의 세계를 불교에서는 공보共報라 하고, 특수한 세계를
불공보不共報라 한다.
공보란 공통된 업의 과보라는 뜻이고, 불공보란 각 개인에 한정된 업의 과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국토란 공업의 과보로서 느껴지는 것이고, 인간 개개인은 불공업의 과보로 이루어진 것이다.
한국인의 국토는 한국인이 다 같이 지은 업, 곧 공업에 의해 성립된 것이고, 각 개인의 신체는 그 사람 각자가 행한 업, 곧 불공법에 의해 받는 것이다.
그러나 공업과 불공업은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이 시대에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똑같이 이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은 공업에 의한것이고, 많은 시대 가운데 하필 이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은 개인의 불공업에 의한것이므로 공업과 불공업은 결코 서로 분리해서 생각할수 없는 것이다.
위의 내용에 의해 분명해진 것은 , 우리가 어떤 세계에 사는가 하는 것은, 어떠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 곧 국토는 우리 업의 과보로서 느껴지는 세계이다. 업을 깨끗하게 하면 국토도 깨끗해진다. 선업에 의해 좋은 국토 곧 정토가 형성되고, 악업에 의해 나쁜 국토 곧 예토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국토를 깨끗하게 만드는 것을 \'정토의 수행\'이라 하고, 그 깨끗해진 세계를 \'정토\'라 한다.
그러므로 정토 수행은 열반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열반이란 불교의 이상으로서, 차별과 동란을 떠난 일여적정一如寂靜의 경지를 말한다. 생과 사, 선과 악 등의 모든 대립을 초월한 , 적멸안온한 이 열반의 경지야말로 일체 존재의 의지처가 되는 절대적 세계이며 , 평안한 낙토樂土인 것이다. 만일 이 열반의 경지가 생사고락 하는 인간 생활을 무시하고 어딘가 초월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것이라면, 불교교리는 일종의 관념으로 끝날 것이다. 그러나 실은 유전하고 생멸하는 찰나적인 일체현상 가운데 법신法身이라 불리는 그 영원한 진리가 내재해 있고, 생사고락하는 현실적인 인간 생활 속에서 열반의
경지는 파악되는 것이다.
어느날 제자가 스승에게 \"색신色身은 멸하는데 어째서 법신法身은 견고합니까?\"라고 물었더니, 스승은 \"산 벚꽃이 피어서 비단과 같고, 골짜기 물이 가득 고여 쪽빛과 같다\"라 하였다. 불멸의 법신은 산 벚이 일시에 확 피어 나풀나풀 떨어지는 그 찰나 속에 있으며, 영원한 생명은 깜빡거릴 틈도 없이 흘러가 물살이 빠른 여울의 소용동이 한복판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현상 가운데 실재實在를, 찰나 가운데 영원을 발견해 가는 사물에 대한 견해가 제법실상諸法實相의 진리이다. 이것은 반야般若의 색즉시공色卽是空의 견해이고, 법화法華의 제법실상의 사상이며, 화엄의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의 세계관이다. 이것은 말을 바꾸면 세계의 재인식이고, 경계(境)의 발견인 것이다.
이와 같이 유한한 것, 멸해가는 것을 무한한 것, 영원한 것으로 파악할수 있는 눈을 불지견佛之見 이라 한다. 사바세계가 이러한 불지견에 의해 응시될 때, 이 잡다한 현상세계는 그대로 제법실상으로서, 부처님의 국토 곧 불국토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정토의 일반적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