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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은 중생의 피난처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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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민영 1996년 10월 176호
중생의 기대를 스님들은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스님들에게는 더욱 단호한 각오와 비원의 요구가 절실하다
원효대사는 계율을 지키기 어려웠을때 서슴없이 승복을벗고
거사의 자리로 내려앉았다. 그럼에도 원효의 학문과 지혜는 그 새대를 밝혀주는 선지식이 되었으니, 내려앉는 데도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가.

민영님은 1934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으며, 1959년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1991년 제6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시집으로
「단장」「용인 지나는 길에」「엉겅퀴꽃」「바람 부는날」들이 있다.

절집을 처음 찾아간 것은 열두살 가을이였다.
고향 철원에 있는 도피안사였다. 돌아간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위해
홀로된 어머니와 같이 갔다.
도피안사는 우리 고향 사람들의 원찰이었다. 신라 때 창건한 절로 규모는 크지않으나 아름다워, 그 이름 못지 않은 \'피안\' 같은 절이었다.
이절의 주불은 신라 경문왕때 주조된 철제 비로자나불인데, 내 고향에는 이 부처님에 관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아득한 옛날 철원에서 큰 홍수가 난적이 있었다. 홍수는 마을과 논밭을 모두 힙쓸었고, 사람들은 거센 물살을 피해서 산으로 올라갔다.
결국 그들은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며 산중턱에 움막을 짓고 살았는데,양식도 부족하고 입을 옷도 없어서 사는 모습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오직 부처님께 빌기만 하였다.
도피안사 부처님이 밤마다 연하대위에서 내려와서 외출을 하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부터였다. 처음에는 몰랐으나 회를 거듭하자 주지 스님도 알게 되었으며, 이 야심한 밤에 부처님이 어디로 가시는 걸까 하여 따라 나서게 되었다.
부처님은 절에서 내려와 주민들이 살고 있는 움막촌으로 가고 계셨다.
그러더니 어느 집으로 들어가서 등잔에 불을 켜고 뭔가를 하시더란다. 이미 배고픔에 지친 식구들은 깊은 잠이 들었는데, 부처님은 그들의 머리맡에 앉아서 아이들이 입다 놔둔 해어진 옷을 꿰매고 계셨다.
그러다가 부처님이 \"아!\" 하고 나직히 신음하셨다. 옷을 꿰매던 바늘이 부처님의 오른쪽 둘째 손가락을 찌른 것이다. 바늘에 찔린 손가락에선 빨간 피가 방울방울 솟았지만, 부처님은 그것을 얼른 입 안에 넣어 빨고는 피가 멈추자 또다시 바느질을 계속하시더란다. 그래서 도피안사 비로자나불은 지금도 왼손바닥으로 오른손 둘째 손가락을 감싸쥐고 앉아 계시다.
어쩌면 이것은 비로자나불을 그 절에 모신 뒤 상상력이 풍부한 누군가에 의해서 꾸며진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부처님의 손모양은 비로자나불에서 똑같은 수인手印을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쇠로 만든 부처님의 손가락에서 피가 나왔다는 것도 믿기가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전설에서 귀담아 들어야 할 교훈 한가지를 찾아야 할것같다. 부처도 세상이 어렵고 곤궁할 때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일을 하셨다는 것이다. 그것도 손가락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고된 노동을 !
수행하는 젊은 스님이 거쳐야 하는 일 가운데 운수雲水가 있다고 들었다. 운수란 말 그대로 구름이나 물처럼 이 세상을 떠돌아다니면서
탁발도 하고, 이 험한 사바세계에 부처님의 이상을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궁리하는 일 이라고 한다.
그런데 내가보기에 요즘 스님들의 운수 행각이 예전과는 자못 달라진 느낌이 든다. 구름처럼 물처럼 떠돌아 다니는 것은 예전과 같지만, 젊은 스님들이 동냥(탁발)은 고사하고 힘든 일은 하지 않는 것 같다.
스님들에게도 3D 현상이 찾아왔는가? 예 하나를 들겠다.
낭화浪華(가명)스님을 처음 만난 것은 광화문에 있는 한 서실에서였다.내친구 현당이 그 서실의 주인이기에 글씨를 쓰고 있는 스님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강원도 유명산의 한 암자에서 온 수행승이라고 했다.
스님은 얼굴 생김새가 준수하고 맑아 보이는 호감이 가는 젊은이었다. 한두 번 만나는 동안에 저녁도 같이 먹고 이야기도 나누었다.
두눈에 불빛이 깃든 옹골진 이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스님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래서 왜 요즘에는 낭화스님이 글씨를 배우러 오지 않느냐고
현당에게 물었더니,
\"그스님 요새 몹시 바쁘답니다\" 하는 떫은 대답이 돌아왔다
때는 서울 근교에 있는 어느 절에서 스님들이 두 패로 나뉘어 주도권 다툼을 하고 있을 무렵인데, 낭화스님도 합류했다는 것이다.
현당은 \"다시는 서실에 찾아오지 말라고 일렀습니다. 젊은 수도자가
무슨 할 짓이 없어서 그런 싸움에 낍니까?\" 하고 화를 내듯 말했다.
나역시 현당과 생각이 같았다. 낭화스님의 깨끗한 용모로 보아 그럴 사람이 아닌데 하면서도 그것이 사실이라니 믿지 않을수 없었고, 또 이것이 우리 불교가 안고 있는 고질적인 병폐 가운데 하나라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상사는 각 사찰의 소유가 종단 중앙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데서 온 것인 듯한데, 이래서는 대중들의 신임을 받기 어렵다. 이 세상에는 아직도 가난과 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고, 뜻하지 않은
사고로 혈육을 잃어버려 슬픔에 잠긴 사람들도 적지 않은데, 그런 이들에게 마음의 위안과 보시를 베풀어야 할 부처님의 제자들이 본래의 본분을 망각한다면 그 누가 절을 중생의 피난처로 여길 것인가?
생각컨데, 이것은 힘든 노동을 하는것과 관계가 있을 듯하다.
절에서하는 수행도 쉽지는 않겠지만, 과문한탓인지 나는 젊은 스님들이 고아원이나 양로원, 병원같은 구호기관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일했다는 이야기를 별로 듣지 못했다. 특히 다른 종교와 비교할 때 불교의 사회참여나 봉사 활동이 소극적이었지 않나 하는 의심이 들때도 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마음속에 잡념이 깃들고, 잡념에 사로잡힌 자는 부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다.
부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할 때 중생구제의 대원력은 공염불일 수밖에 없다. 적어도 동체대비의 대원력이 이루어지기까지 부처의 뜻을 헤아렸다고 말할수 없다. 중생이 스님을 믿는 것은 스님들이 부처의 뜻을 이 사바세계에 구현할 최적의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중생의 기대를 스님들은 저버리지 말아야한다.
그래서 스님들에게는 더욱 단호한 각오와 비원의 요구가 절실하다.
원효대사는 계율을 지키기 어려웠을 때 서슴없이 승복을 벗고 거사의 자리로 내려앉았다. 그럼에도 원효의 학문과 지혜는 그 시대를 밝혀
주는 선지식이 되었으니, 내려앉는데도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가.
오늘날 수행자가 산 속에만 수행하는 것이 시대에 뒤진 일이라는 생각이든다. 너무나 세속의 때가 끼어 중생의 모범이 되지 못하는 것도
바람직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중생이 둥지를 틀 그런 승단이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