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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운석과 고려국신조대장 교정별록의 제2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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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고려대장경 - 최세영 1996년 09월 175호
1996년 8월, 나는 다시 강화에 다녀왔다. 96년 8월은 아주 이상한 달이었다. 나는 광복51주년을 맞는 특집 다큐멘터리 ‘이제, 빛으로’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일본 종군 위안부할머니들의 증언을 기록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증언―이 할머니들이 우리 땅에서 함께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주는 무게에 나는 가위눌려 있었다. 역사의 증언자로 살아가는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과거로의 시간 여행이 즐거운 여행이 아님을 알았다. 그것은 고통의 시간 여행이었으며, 역사의 진실은 오십일 년 전의 세월 그 캄캄한 깊은 땅 속에서 점을 자고 있었다. 그리고 96년 8월 6일 밤, 삼십오억 년 전의 화성 운석 앨런힐스84001이라 이름 붙여진 감자만한 돌덩이가 우주 외계생명의 비밀을 전하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화성에 생명체가 있었다. 미우주항공학자들은 인류 최대의 발견이라며 흥분했다. 화성의 작은 생명체가 억겁의 시간을 뛰어넘어 인류를 찾은 것이다. 과학자들은 이 화성탐사에 재미난 이름을 붙였다. 인류 미래로의 귀환―화성에서 인류미래의 단서를 발견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열흘 뒤 96년 8월 16일 이 땅에서는 칠백육십 년 전의 역사로 한걸음 다가서고자 하는 일이 시작되고 있었다. 강화도 선원사에서 제2차로 고려대장경 판각 장소 발굴 작업을 위한 일이 조심스럽게 진행되었다. 강화도 선원사지는 고려대장경 판각 장소로 추정된다는 학설이 있던 곳이다. 고려 무선정권 시절 최우의 원찰로 지어진 선원사가 곧 대장도감이 설치되었던 곳이고 또 고려대강경을 판각한 곳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 일은 1976년 제1차 발굴조사작업 때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 뒤 이십 년이 지난 오늘 인천시에서 이억 원의 예산을 들여 그 지역 일대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 발굴 작업이 문화재전문위원과 역사학자들에 의해 다시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 곳이 대장경판각 장소였다는 단서는 현재 아무것도 없다. 몇 개의 주춧돌과 기와의 파편들이 나왔을 뿐 고려대장경 판각 장소에 대한 의문을 풀어주지는 못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자.
다만 이 모든 일들이 96년 8월에 일어났다. 과학의 해명을 기다리고 있는 화성 운석이 인류를 찾아 던진 외계생명체에 대한 화두 그리고 우리 땅에서 오십일 년 전 일어난 참혹한 역사, 그러나 우리 땅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눈 감고 못본 척 하고 싶은 비극의 역사는 초토화된 고려땅까지 이어져 있었다. 삼십오억 년 전 인류 미래로의 귀환이라는 놀라운 충격과 우리 역사의 오십일 년 전 그리고 칠백육십 년 전 과거로의 귀환이라는 시간 여행을 동시에 체험하며 내가 간 곳이 강화였다. 96년 8월이었다. ‘강화’에는 ‘고려’가 있다. 슬픈 역사 고려가 있다. 그 당시 고려는 어디로 가고 있었던 것일까.
우리는 흔히 ‘미래’와 ‘과거’라는 말을 쓴다. 미래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세계이며 과거는 결정된 세계를 말한다. 우리가 이 미래와 과거를 향해 가자면 아인슈타인 의 특수상대성원리를 응용해 빛의 여행을 떠나야 한다. 빛의 속도보다 빠르면 시간은 반대로 흐른다. 나는 빛의 속도보다 빠른 시간 여행을 통해 고려로 가고자 생각했다. 고려로 가는 길-오로지 내가 빛보다 빠를 수 있는 시간 여행의 방법은-은 나의 상상력밖에 없다.
신촌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강화행 버스를 타고 두 시간 남짓 걸려 나는 강화읍에 도착했다. 강화읍에 도착하기 전 나는 갑곶진의 썰물을 보았다. 작은 소용돌이 물살이 빠르게 일어났다. 사라지는 자리에 잿빛의 갯벌이 드러났다. 그것은 수없는 세월 동안 이루어진 눈물의 강이 지나간 자리였다. 눈물로 온몸을 적시며 건너간 고려인의 눈물 젖은 강이었으며 그 눈물이 질펀하게 스민 갯벌, 고려의 땅이었다.
1232년 7월 개경을 떠난 왕이 승전부를 거쳐 강화도의 객관에 들어섰을 때는 장마비가 내렸다. 짐을 옮기는 백성들의 고달픔이 더했다. 장마비는 열흘 이상 계속되었다. 말과 사람이 함께 진흙벌에 빠져서 지쳐 쓰러져 가며 죽어갔다. 장마 빗길에 울며 통곡하는 사람들이 그 강을 건넜다. 그해 1232년 부인사에 보관되어 오던 초조장경이 몽고군에 의해 불타버렸다. 그 뒤 사 년 뒤인 1236년 고종 23년에 고종은 이미 불타버린 대장경의 복원과 국난극복을 염원하는 뜻에서 대장경을 다시 간행하도록 지시했다. 최우는 궁궐이 있는 강화도에 대장경 간행을 위한 담당관청인 대장도감을 설치했다.
강화도 어디에 대장도감을 설치했을까. 그러나 이렇다 할 만한 그 칠백육십 년 전 역사의 흔적은 아직 발굴되지 못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단지 고려사에 단 한 줄의 기록밖에 없다.
“고려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백관을 거느리고 행차해서 분향을 했다. 현종 때 판본이 임진의 몽고란 때에 훼손되었기에 왕과 군신이 다시 발원해서 도감을 세워 십육 년만에 완성하였다.”
―고종 38년 9월 임오조王午條의 기록이다.
그럼 고려성 서문 밖에 대장도감이 있었던 것일까? 나는 그 알 수 없는 서문 밖의 길을 걸었다. 1236년 이 때 수기스님은 이미 대장경 교정 작업을 마치고 목판 작업을 위한 판하본 필사작업에 들어갔던 것은 아닐까? 어느 필사자는 그 첫머리의 글을 이렇게 쓰고 있지는 않았을까?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如是我聞)’ 라는 글을. 삼십오억 년 전의 화성 운석에서 우주 생명의 놀라운 전언을 들었을 때의 나처럼 그 필사자의 봇끝은 조심스럽게 떨리지는 않았을까?
삼십오억 년 전의 화성 운석은 그저 단순한 돌이 아니었다. 그 돌은 생명을 지니고 있었다. 우주 생명의 정보와 존재의 비밀을 지닌 화두였다. 인류 미래로 귀환하기 위한 진언이 담긴 살아있는 돌이었다. 나는 칠백육십 년 전의 역사, 그 과거로의 귀환을 위한 시간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그 때까지 고려대장경이 무엇인지 나는 몰랐다. 부처님 입멸이후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로 시작되는 그것은 바로 인류 미래로의 귀환의 진리가 통채로 담긴 광주리(Pitaka 藏)였다. 이 광주리를 인류 역사상 가장 바르고 보편적인 가치로 가득 채우고 엮었던 사람의 진리가 담긴 광주리를 찾아가는 길이 되었다.

나의 여정은 이제부터 새로운 시작이다.
서문 밖길에서 한 노스님을 만났다.
고려대장도감으로 가는 길이 어느쪽입니까?
대답이 없다.
스님의 존함은?
대답이 없다.
자, 차나 한잔하고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