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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중심으로 본 종교의 역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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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해인사 개산 1,200년 - 호산 1996년 09월 175호
한세상을 살아 감에 있어 길고 긴 삶의 여정은 결코 편안할 수만 없으며 또한 혼자서 외로이 걸어가는 길은 더욱 아니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우주의 무한광대한 법칙 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사슬에 얽매여 이끌고 이끌리며 더불어 공존하며 자기를 닦아 나가는 것이 삶인 것이다. 어느 한쪽의 독선에 의해서도 안 되며 다른 한쪽의 배타에 의해서도 될 일이 아니다. 인간이 모여 한 무리를 만들고 사회를 구성해 나갈 때 사회는 정치, 경제에 앞서 종교의 필요성을 더 절감하게 된다. 이처럼 종교는 인간생활의 궁극적인 의미를 확실히 규정 짓고 삶의 문제를 풀어줄 수 있는 꿈의 작용을 할 수 있어야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신앙은 인간의 마음 속에 형성되고 있는 개개인의 행동적 특성들을 순화시켜 종교적 행동으로 승화시켜야 한 구성체를 이롭게 이끌어 나갈 수 있다. 신앙심이 깊어질수록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종교적 특성들을 행동으로 표출시켜야 사회는 더욱 아름답고 풍요로워진다. 신앙심은 모든 행동의 원천이기 때문에 그 신앙 체제를 확립함에 있어 주어진 형태에 따라 인간의 인격에 미치는 영향이 다르게 나타난다. 신앙체제가 확립되어 있는 사회는 그만큼 더 여유롭지만, 종교의 본질에 대한 오해와 무지로 인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한다면 사회는 이기와 질투 그리고 교만심으로 얼룩져 혼탁해지기 십상이다.
서양의 종교문화 전통은 동양의 종교문화에 비하면 관념적인 사고에 의지하여 흐르는 경향이 짙으며 매우 이성적이고 이론적으로 흐른다. 신앙체제의 형성에 있어서도 수행보다는 신앙구조를 이해하고 그것을 믿느냐 안 믿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동서양의 기본적 종교의 구조 차이는 선을 중심으로 한 신앙체제를 형성하고 인류가 탐구하고 연구하는 그 모든 것을 신의 은총이나 배려로 보고 있지 인간 노력의 부산물이 아니라는 관점이다. 내 생활의 모든 것을 신에게 의지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 속에서 일체의 인간적 행위조차 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반면에 동양의 종교문화는 신 중심적인 서양보다는 자기 수행을 중심으로 자연과 우주 그리고 아我라는 수행적 삶에서 비롯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불교의 세계는 더욱 넓고 광범위 하며 불교의 요체 가운데 사제四諦를 간략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고집멸도苦集滅道의 네 가지 개념에 따르면 인생은 고뇌로우며(苦), 그것은 집착 갈애 등 인간의 욕망이 모여 그 원인을 이루고 있으며(集), 그 현실에 처하여 인간은 그 욕망들을 어떻게 소멸하여 이상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지(滅), 그리하여 이상을 달성하는 데에는 어떤 방법과 수행을 하여야 좋은지(道)이다. 이 사성제를 불교의 기본 뼈대라고 볼 때 불교의 체계 속에는 어디에도 신의 관념은 들어 있지 않다. 또한 신의 관념을 필요로 하지 않고 있다. 단 불교의 후반부에는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의지하여 사후에 극락왕생하기를 기원하는 정토사상이 삽입되어 있지만 근본적으로 불교의 체계는 철저한 자기 수행적 삶으로 일관되고 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서양에서도 선을 앞세우지 않는 휴머니즘적 종교의 성향도 엿보이기는 하고, 철학자 듀이(John Dewey)처럼 인간의 최고 이상을 지향하여 전인간적인 감격을 가지고 추구해 나가는 것이 종교다라고 규정하기도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이 실재하는지 하지 않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인간이 신의 실재에 대하여 어떤 사상을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 나가느냐가 중요하다. 자기 자신에게 종교란 어떤 의미에서 받아들여야되는지 가치 중립적 사고에서 주관적 입장과 객관적 입장을 조용히 관조해 보면 될 일이다. 인간의 욕구라는 것은 인간자신을 행동하게 하는 기본적 힘의 근원이라고 가설할 때 이것을 어떻게 억제하여 전체적인 순리에 부응할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다. 채워질 수 없는 인간의 욕구란 것은 어떤 형태로서 표출되어 나를 괴롭히는가? 그것은 종교의 인간문제이다. 인간의 욕구라는 것은 얼마든지 자유롭고 또한 무제한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볼 때 인간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생활 환경은 이 지구상 어디에도 존재치 않는다. 아무리 과학이나 기술어 발달한다 해도 그것은 불가능의 연장선 상에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간문제의 궁극적 해결을 목적으로 한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 모두를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종교의 힘일 뿐이다. 하여 종교의 역할은 시대가 바뀌어도 없어지거나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종교의 중점은 원하는 것이 과연 이루어지느냐 않느냐의 여부가 아니다. 인간 생활을 영위하는 방법이 초점이 되어 인간에게 어떤 이상적 가치를 부여하고 인간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실아가는 것이 좋은지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기적 중심의 종교는 소멸할 수 있어도 이런 점들을 제시하고 해결할 수 있는 종교는 소멸되지 않는다. 불교가 이천오백 년 역사 속에서도 소멸되지 않고 더욱 굳건히 버티고 선 까닭이 여기에 있다. 물론 궁극적 가치 기준의 내용이나 해석의 방법은 시대에 맞춰 적응해 나갈 수 있겠지만 내면적인 깊고 오묘한 종교의 핵심은 변질되지도 퇴색되지도 않는다.
종교는 현실에 어떤 힘을 가지고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가? 인간의 문제와 정말로 한 덩어리가 되어 시대를 초월하여 존속하고 그 역할을 다할 수 있는가? 이것이 현대 종교의 기본 과제이다. 인간의 마음에 빛을 주고 인간 생활에 사는 보람을 주는 것, 이것이 바로 현대 종교가 나아갈 방향이다.
불기 2540년 해인사 개산 1,200년이 다 되어 간다. 이제 불교가 가져야 할 책임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막중하다. 세계의 시선이 불교에 모아지고 있다. 종교가 종교로서의 참 구실과 역할을 다할 때 해인사 개산 1,200년은 더욱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이다.
종교학의 대가 키시모토는 오랜 연구 끝에 종교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종교라는 것은 인간생활의 궁극적인 의미를 밝히는 것이며 인간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에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서, 사람들에 의해서 믿어지고 있는 신앙을 중심으로 한 문화현상이다.”
해인사 개산 1,200년을 앞두고 한번 음미해 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