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치악산 구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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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풍광과 진경 - 이호신
1996년 09월 175호
불과 열흘 전 경기 , 강원 일부 지역의 수해로 말미암아 범국민적 온정과 복구의 손길로 불볕 더위와 싸우고 있는 터에 치악산 계곡은 원색의 행락객으로 넘쳐 났다. 사람이 사는 일에 망각만큼 빠른 치유가 없는 것일까.
사람 팔자가 물팔자 되어 누구는 수마의 상흔과 싸우고, 누구는 물놀이에 여름 휴가를 즐기는 세상인지를 되뇌이며 국립공원 매표소를 지나치자 먼저 ‘황장금표黃腸禁標’의 안내문이 눈에 띄었다. 좌측 언덕 바위에 새겨진 금표는 조선시대에 질 좋은 이 곳 치악산 황장목을 보호하기 위해 도벌을 방지하는 표석이니 옛 사람들의 자연보호, 산림정책의 실증을 보는 셈이다.
울어 예는 매미 소리를 들으며 구룡사龜龍寺를 향해 구룡교, 일주문, 국사당을 경유하는 숲길과 계곡은 풍치림의 서늘함과 맑은 물빛으로 하여 나그네는 그만 걸음을 멈추고 흐르는 물살을 건져 얼굴을 씻었다.
청신한 기운 속에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 은행나무, 굴참나무, 단풍나무, 층층나무 등이 즐비한 길목에서 마주친 구룡사는 이층 팔작지붕의 사천왕문에서 마침내 가람의 모습을 드러냈다. 가람의 지형은 특이하게도 치악산 비로봉 등반로에서 개울을 앞에 끼고 산자락에 내려앉았으니 산길을 오르는 이들은 어김없이 풍경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는 형국이다.
때마침 기와불사중이어서 어수선한 분위기를 차마 떨치지 못하는데 의상대사의 창건설화(668년)는 천 년 고찰로서 이 곳을 점지했던 선인의 안목을 헤아립게 한다. 옛 가람의 흔적으로 대웅전과 심검당, 그리고 이층 누각 보광루의 주춧돌에서 세월의 자취와 자연미를 찾게 하는데, 무엇보다 대웅전 뜨락의 당간석에서 비바람에 씻긴 세월의 침묵을 읽게 했다.
그 밖의 건물은 근자의 것으로 새로운 용도와 요사로 쓰기 위해 지어진 것이다. 소담한 도량으로서 앞 개울 너머에 산이 드리운 것은 장쾌하거나 징중함보다는 포근함으로 다가오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 자그마한 도량에 얼마전에 세운 삼층 석탑은 너무도 커서 시각적인 혼선과 가람배치에 반감을 주고 있음이 아쉽기 그지없다.
대웅전을 빼고는 특별한 문화재 지정이 없지만 대웅전 삼존불 위의 닫집은 못 하나쓰지 않은 채 이루어진 목공예의 진수를 보여주고, 보광루에 깔린 멍석은 인부 셋이서 삼 개월에 걸쳐 완성한 국내 최대의 멍석으로 이를테면 절집 카페트인 셈인데 그 성심의 공력을 헤아릴 만했다.
이튿날 바위산의 매운 맛을 보고 비로봉을 내려 온 뒤 가람의 풍광에 붓을 들자 아름드리 수목이 곳곳에서 살펴졌다. 사천왕문과 보광루 사이의 전나무 도열이 이채롭고 대웅전 뒤란의 삼성각, 웅진전에 둘린 전나무, 잣나무 그리고 다섯 그루의 아름드리 보리수가 고찰의 이미지를 더해 주고 있었다.
행자방에서 사흘이 지난 뒤 ‘깨달음과 문학’이라는 문학동호인들과의 만남이 펼쳐진 이 곳 구룡사는 새로운 기운으로 충만했다. 나 또한 이 인연에 동참하고픈 일정으로 미리 달려 와야만 했었으니.
바람 없는 산등성이의 솔밭에서 나는 ‘깨달음의 그림’을 떠올리며 그들과 함께 했다. 하지만 솔바람 소리를 그리지 못하는 미혹한 나의 영혼은 마침내 빗속을 울어 예는 산새가 되어 탄식하고 있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