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람 싫어 들어간 오대산 동관암, 도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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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박원자
1996년 09월 175호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해인사 극락전 뜨락에는 더덕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더덕의 넝쿨은 위로 자꾸 올라가는 성질이 있어 큰 대를 이파리에 매어 주었더니 하늘 높은줄 모르고 잎이 올라간다. 이른 아침, 운동 삼아 극락전 뜰을 호미질하면서 더덕 잎 올라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때로 저 수십 년 전의 행자시절이 떠오르곤 한다.
행자시절 초엽이었을 게다. 더덕을 한 가마니 지고 처사 한 분아 동관암에 올라왔다. 일제 치하,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너나할 것 없이 초근목피로 살아가던, 참으로 먹고 살기 어렵던 시절이었다. 인적 드문 산중에서 한곳에 뭉쳐 자라고 있던 더덕을 운좋게 발견해 캔 모양이었는데, 우리 암자로 와서는 쌀로 바꾸어 달라고 사정했다. 자비롭기 그지 없던 내 은사 스님은 “얼마나 살기 어려웠으면 이 깊은 산속까지 찾아왔겠느냐며”두말없이 있는 쌀을 다 내어 주었다. 소두 한 말쯤되었으리라.
덕분에 은사 스님과 나는 삼동 내내 더덕을 달여 그 물을 마시고, 노골노골 해진 더덕을 씹어 먹으며 겨울을 났다.
나이가 많든 적든 남자는 징병대로 여자는 정신대로 잡아가 제 나라 천황을 위해 목숨 바칠 것을 요구하던 일본 사람이 밉고 싫어서, 소년시절 나는 늘 절로 떠날 궁리를 했다. 불교가 무엇인지 알아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 보기 싫은 일본사람들을 피해 어딘가 깊숙이 숨고 싶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불교와 숙겁의 인연 탓이었다.
살만한 집 다른 부모들은 자식에게 돈을 얼마든지 줄테니 어디든 피해 있다 살아만 돌아오라고 했으나, 내 부모님은 내 내면에 깊숙이 흐르고 있는 불연을 감지했음인지 내가 집만 떠나면 찾으러 다녔다. 일본인들도 일본인들이지만 그런 부모님 때문에 나는 고향인 강화를 떠나 강원도 인제의 아주 깊숙한 골짜기로 들어갔다. 열아홉살때였다.
해어진 옷을 깁기도 하고 별 말없이 지내는 나를 지켜 보던 주인집 아주머니가 하루는 혼잣말처럼 그랬다. “저 학생은 행동이 꼭 절 스님 같네. 뭐든 혼자하는 것하며 마음씨도 세속의 우악스러운 사람과 다른 것이 스님 되면 좋겠어.”
주인집이 다니던 절이 오대산 동관암이었고, 내가 주인집 아주머니를 따라 오대산 비로봉을 넘어 동관암에 가니 댓돌을 내려서는 한 스님이 있었다. 위 아래 가사는 물론 양말까지 누덕누덕 깁고 또 기워 입은 외양이었으나, 스님의 얼굴은 참으로 맑고 따뜻해 보였다. 때는 봄이었는데, 푸르름으로 둘러싸인 조촐한 암자며 누더기 차림의 스님이 첫눈에 마음에 긴 여운으로 남았다. 내 은사 스님이 된 지월스님과의 첫 만남이었고, 수행자로의 첫 발걸음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같이 있던 한 스님이 어디론가 떠나고 은사 스님과 단둘이 살며 행자생활을 했다. 「초발심자경문」을 전부 외우던 내 은사 스님은 글자로가 아니라 얘기로 그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런 가운데 천수경을 외우고 불교의식을 눈으로 보며 익혔다.
자비 보살과 다름없던 은사 스님은 내게 이래라 저래라 시키는 법이 없었다. 보름마다 물을 데워 목욕을 했는데, 목욕을 하러 들어갔다 나와 보면 스님은 내가 벗어 놓고 들어간 옷을 전부 빨아 놓았다. 또 어느날 아침에 일어나보면 내가 신던 헌 짚세기를 버리고 슬며시 새 짚세기를 가져다놓기도 했다. 밥도 찬도 전부 당신이 끓여 내 앞에 내 놓곤 했는데, 은사스님을 시봉하는 것에 대해 보고들은 게 없으니 중들 사는 것이 그런 것일 줄만 알았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날이었다. 객스님 한분이 오셨다. 서로 반가워하는 것으로 보아 잘 아는 분이었던 것 같았는데, 그 객스님이 며칠 우리 사는 모양을 보더니, 하루는 나를 불러 앉혔다.
“윗어른 시봉하는 것이 어찌 그러한가.”
어떻게나 호되게 야단을 치던지 눈물이 쑥 빠질 지경이었다. 객스님은 보름 동안 머물면서 내게 스님 시봉하는 법을 가르쳤다. 그 뒤부터 밥하고 찬하고 빨래하는 것은 물론, 내것과 은사 스님의 위 아래 누더기 옷을 깁는 것까지 모두 내가 했다.
호롱불 아래 앉아 깁고 또 기워다 닳아빠진 가사며 양말을 깁고 있노라면 어찌 그리 시간은 빨리 가는지. 눈 한숨 붙이고 일어나 새벽 예불 도량석에 서면 쏟아져 내리던 달빛이며 별빛, 바쁜 나날이었으나 고단한 줄 몰랐고, 어느 것 하나 걸릴 것 없이 마음은 넉넉했다.
겨울 오대산에는 참 눈이 많이 내리곤 했다. 한번 눈이 내리면 이듬해 봄이 될 때까지 녹지 않아 두 다리가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걸어다니곤 했다. 그 순백의 눈길에는 때로 짐승들의 핏자국이 보이기도 했는데, 먹고 살기 어려운 마을 사람들이 바윗돌에 숨어 있던 토끼며 노루들을 잡아간 흔적이었다.
그 당시 상원사에는 한암스님이 주석하고 계셔 전국 방방곡곡에서 공부하러 오는 스님들과 신도들이 많았다. 지금은 스님들과 따로 안거를 나며 공부를 하고 있지만 그 시절 상원사에서는 한방에 둘러앉아 공부를 했다. 방사가 좁았기 때문이다. 어쩌다 은사 스님의 심부름으로 상원사에 들러보면 스님들과 신도들이 한방에 앉아 참선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좁은 방사에서 스님들과 신도들이 함께 수행하는 것에 대해 “한암스님 법이 아무리 장대하지만 젊은 여자들과 함께 공부를 하는 것은 좋지 않은 것 같다”는 말들도 있었으나, 불사 때마다 적지 않은 시주를 하던 상궁들이며 신도들이 “한철만 공부하게 해달라”는 청을 산중 어른으로서 물리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중에 한암스님께 계를 받고 그분 밑에서 공부를 했다. 경내 여기저기를 다니며 일하는 우리에게 이것저것 자상하게 일러주던 모습어 선연하다. 하찮아 보이던 것도, 돌아보면 모두가 수행을 익히는 기초였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것은 다 인연법이다. 오대산으로 오기 전 열일곱에 지리산으로 갔다. 처음 영원사로 갔는데 마침 그 절에 불이 났던 터라 잘 데도 없고 먹을 것 또한 곤궁하기 짝어 없어 “중되러 왔다”는 말을 꺼내 보지도 못했다. 다시 그 너머 화엄사로 갔더니, 그 곳 또한 한 입 먹거리가 아쉽던 때라 소리 없이 사람을 밀어냈다. 그래서 다시 찾아간 것이 칠불, 체구가 장대하고 위엄 있어 보이던 설석우 스님이 조실로 계시던 큰 선방이었는데 그 곳 역시 내게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다. 그렇듯 지리산은 나와 인연이 없었다.
불교가 무엇인지, 수행이 무엇이며 중노릇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절로 가야겠다는 생각 하나뿐으로 들어간 오대산은 따뜻하게 나를 품어 주었다. 불교에 대한 은사 스님의 말씀은 내 뜻과 무엇 하나 걸림없이 척척 계합이 되었고, 오랜 동안 떠나 있다 돌아온 고향처럼 느껴졌으니, 오대산은 내게 ‘인연 ’이상의 무엇이었다.
은사 스님께 험한 말 들어보지 못했던, 일체 바깥 세상을 잊어버리고 순진하기만 했던 그 일 년의 행자시절, 그로부터 참으로 숱한 세월이 흘렀다. 이제 칠십이 넘어 뒷방 늙은이로 나 앉아 있는 지금, 요즘은 행자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다만 계율을 잘 지키는 수행자가 좋게 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