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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고 더딘 시간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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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속의 염화미소 - 성전 1996년 09월 175호
만행길에 만나는 마을 입구에 서 있는 큰 나무는 언제나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 나무 아래 노인네 서덧이 앉아 노을처럼 따뜻한 이야기를 주고 받는 모습을 보면 삶은 저토록 어질게 저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너무도 빠른 삶의 속도 아래서 모든 것을 잃고만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나무 아래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지는 풍경은 어쩌면 언제나 돌아가 기대고픈 영원한 고향으로 남는 것은 아닌지.
삶의 속도가 너무 빨라 모든 것을 잃으며 살아가고 있는 오늘의 우리들. 그래서 사소한 것까지도 그리움이 되어 버리고 결코 어떤 것에도 머물 수 없음이 우리 모두에게 슬픔으로 남는다. 고향도 가족도 그 무엇도 우리가 기대어 따뜻함을 나누기에는 우리를 끌어가고 있는 삶의 속도가 너무도 빠르다. 그 시간의 질주 속에서 우리의 표정은 삶의 기쁨을 잃고 시들어 가고만 있다. 무엇이 우려의 눈빛에서 푸른 생명의 기운을 앗아갔는지, 세상을 향해 물어보지만 세상은 어떠한 대답도 들려주지 않는다. 다만 살아있음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존재의 슬픈 등식만이 우리들 존재에게 주어져 있을뿐이다. 아무도 또 다른 답을 구할 수 없고, 그 누구도 삶의 광폭한 속도의 폭력을 거부할 수 없기에 우리들 삶의 행진은 그만큼 슬프다.
가끔씩 돌아본다. 삶의 속도가 아주 느렸던 그 때를. 누구도 앞서거나 뒤쳐지지 않았던 느리지만 사람 사는 정이 있던 내 살던 농촌마을을. 새벽이면 일어나 구시렁 구시렁 논에 나가 일을 하고 달빛 가득 고인 개울가에 호미 씻고 돌아오던 햇빛에 깊게 패인 그 어질던 얼굴들을. 고되고 힘든 생활속에서도 조금의 여유만 있으면 달빛 여리게 비친 길을 더듬어 이웃을 찾아가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며 돌아오던 그 가난했던 사람들의 발걸음은 얼마나 따뜻했던가.
논에 벼를 기르고 밭에 작물을 키우던 노동의 습성으로 그들은 이웃을 만났고 자식을 키웠고 길 입구에 큰 나무를 길었다. 길 입구의 나무에 내 눈길 전부가 매료되는 것은 그 무엇도 파괴하거나 버리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소중하게 길렀던 농촌 마을사람들의 아름다운 마음들이 나뭇잎으로 푸르게 그 빛을 내보이기 때문이리라.
노동의 여가에 또는 심심파적으로 나무 아래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간을 꾸려 나가던 그들이 지금에 와서야 시간의 참다운 주관자였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다만 그 때에 대한 향수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그 때의 그들과 농촌마을이 능력과 경쟁이라는 자본의 파괴적 속성과는 무관하게 화합과 나눔이라는 인간 사회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무정처의 만행 발걸음을 옮긴다. 걷다 보면 어디 느리고 더딘 시간을 꾸리며 사람들이 따뜻하게 모여 사는 마을이 있으리라는 꿈을꾸며. 하지만 그런 마을은 이제 없을는지도 모른다.
자본이라는 거친 악산을 넘기까지 느리고 더딘 그래서 따뜻한 시간의 마을은 부재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 본다. 느리고 더딘 시간이 아니면 사람 사는 따뜻한 마을이 복원되지 않는다는 사실마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만행의 걸음걸음을 옮기며 조지훈의 ‘산중문답’을 무슨 경처럼 독송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