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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 설정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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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김영옥 1996년 09월 175호
새삼 절기가 무섭다. 그런 무더위가 없더니. 처서를 넘기면서 그 위세가 칼로 지른 듯이 꺾이어 아침저녁 바람이 삽상하다. 늦더위가 없지는 않으리로되 금풍金風의 기미는 역력하다. 그 기미가 사람들에게 옷깃을 여미라 이른다. 여름 동안 무성히 웃자란 실없고 무용한 사변의 잎사귀를 떨구라 이른다.
격을 갖춘 화려한 게송보다는, 자신의 선필처럼, 고갱이뿐이로되 그 맑고 담담함으로 사람의 마음을 더 세게 후려치는 경허스님의 글 한 편 읽고 싶어질 때이다. “턱어리 밑에 세 마듸
기운 끊어지면 문듯 송장이요 죽은후에 헛이름뿐”이라는 말씀 한마디 간절히 깨닫기만 하더라도 견성하게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것이 어렵고, “맺을이나 살 것이관대 쓸대없는 일하느라고 내 마음을 깝깝하게 하여 공부하기를 잊어버리”는 것이 중생이다.
덕숭산 수덕사의 “큰절”에서 남동쪽으로 호젓이 비켜앉은 다섯 간 요사체는 설정스님이 머무는 곳이다. 지난해 회향된 이 당우는 아직 새물 냄새가 가시지 않았거니와, 동편과 남편의 문창을 열어젖혀 수덕사를 품고 있는 덕숭산과 맞은편의 홍동산을 비롯한 세 연봉을 들여앉히니, 방을 따로이 치장할 일이 없었다. 뜰은 가섶의 잡초말고는 나무 한 그루 없이 텅 비어 있다. 삭막하니 서둘러 뜰을 꾸미라고 보채는 이도 없지 않으나, 설정스님은 토질이 마사라서 빛깔이 맑고 환한 그 뜰을 아직은 그저 알뜰히 즐긴다. 석 자만 파 들어가도 암반이 시작되는 덕승산이지만 금생수金生水라, 이 곳에는 떡갈나무와 솔이 무성히 자란다. 산은 나지막하고 골이 깊지도 않지만, 근세 한국 선의 중흥초로서 이 곳에 주석하셨던 경허와 만공 두 스님만으로도 높고 깊다. 겨우 풍경만 달아 놓은 채 현판도 못 올렸으나 설정스님이 마음에 두고 있는 당호는 “경월당”이다. 경허스님과 법명이 월면이었던 만공스님의 이름자를 각각 하나씩 딴 것이다. 그러나 바람에 흔들려 맑고도 쓸쓸한 소리를 내는 풍경 밑에 서서, 이름 없는 당우도 아름답지 않겠는가, 설정스님은 또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 곳은 설정스님의 구체적인 삶터가 아니라, 아직은 상징적인 처소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 94년에 제11대 중앙종회의장으로 뽑힌 뒤로, 그를 필요로 하고 또 그렇다고 판단되는 곳이면 전국 어디나 몸을 아끼지 않고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스님은 모처럼 ‘오늘만
한가한 몸이었다.
94년 개혁 불사 당시 법제위원으로 참여했던 설정스님은 단식 투쟁에도 참여 하는 등 열정적이었다. 그러나 법제위원으로서의 소임만으로 할 일은 다 한 셈이라고 생각했으나, 일찍이
속가의 아버지가 간파한 대로, 무슨 일이 벌어지면 자신도 모르게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 끝장을 보아야 할 만큼 적극적이고 결정적인 그의 성정대로, 종회의장 선거일을 이틀 앞두고 입후보하여 주위의 예상을 깨고 의장으로 당선되었다. 개혁 불사에 대해 느낀 모순점과 문제점을 나름대로 해결해 보리라는 생각 때문에 결정한 일이었으나 결과는 자신에게도 뜻밖의 일이었던 듯하다.
94년 4월 10일 조계사의 전국승려대회 이후 구성된 개혁회의가 입법, 사법, 행정의 전권을 행사하면서 마흔여가지쯤의 종헌종법을 제정하고 개정한 이후 중앙종회의 기능은 크게 강화되었다.
제11대 중앙종회는 출생부터 그 이전의 종회와 차별되는 바 있었지만, 그러한 사정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의회 문화를 상당한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은 그의 공으로 돌려도 될 듯하다. 그 동안 중앙종회는 15일 회기의 정기회의와 네댓 번의 임시 회의만 있었지만 그나마 회기를 채운 일이 드물었다. 그러나 11대 종회에서는 크게 늘어난 회의 횟수로 회기를 채우고도 시일은 연장되기 일쑤였다. 의회 문화의 질적 향상은 무엇보다 진지한 토론문화의 안착에서
비롯될 터였다. 그 자리를 주도해야 할 그로서는 문중 의식이나 파벌 의식, 편견 따위를 갖지 않는, 중립의 태도를 견지하고. 충분한 토론을 거친 뒤에 신중한 결론을 이끌어 내게 하는 데 애썼다고 스스로 자평한다.
설정스님은 의회의 기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입법과 견제 기능이라고 본다. 그 가운데 견제 기능만 제대로 발휘되어도 종단의 부패는 척결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견제(감사) 기술과 방법 강구에 대한 모색과 함께 인력도 많이 보강시켰다. 그러나 올 11월의 2년 임기 만료를 앞두고 아쉬운 점도 많다. 종헌종법에서 미비한 점을 제대로 마무리짓지 못한 일과, 상임분과위원회나 각종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종단 문제 해결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펼쳤음에도, 거기서 도출된 문제점을 집행부의 이행으로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하게 한 점 따위가 그렇다. “지나치게 잦은 회의”, 또는 “집행부 고유 영역의 침범”이라는일각의 부정적인 견해에 대해, 설정스님은 자신의 입지를 “본의 아닌 악역”으로 맞받아 넘긴다. 살아온 나날이 그러했지만, 그에게 종회의장의 소임을 맡긴 대중들의 뜻을 소중히 여겨 한번도 잊은 적이 없다.
그가 생각하는 승려의 생명은 어떤 것인가. 불지佛志애 대한 뜨거운 신심과 공부에서나 일에서나 그것이 자신만이 아닌, 전체의 이익을 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원력과, 공심公心이라고 했다. 소임을 보건 안 보건, 부처님의 제자로서 삶에 사사로운 마음이 끼지 않는 반듯한 미음가짐이라고 했다.

1955년, 시월 초파일을 며칠 앞둔 어느 날에 열다섯 살 난 작고 얼굴이 해맑은 사내아이의 손을 붙들고 처사한 사람이 수덕사로 불공을 드리러 왔다. 만공스님에게서 처사계를 받은 바도 있거나와, 스님들과의 교류도 잦았던지라, 그 날 밤을 절에서 묵고 가련다는 아이의 말을 처사는 무심히 들었다. 다음날쯤 내려오려나 여기고, 처사는 아이에게 일렀다.
“스님들께 폐 되지 않도록 해라.”
그것은 아이가 출가 전 아버지한테서 들은 마지막 말이 되었다. 열흘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식구들이 아이를 찾아 절로 올라왔다. 그러나 아이는 법당 뒤로 몸을 숨겼다. 다섯 살 전에 이미 천자문을 떼고, 여덟 살 무렵에는 통감을 하루 세 장씩 외어 보였던 아이여서 한학 속이 깊은 아버지의 기대를 샀다. 그러나 병악하여 자주 몸져 누웠다. 출가하여 삼 년 동안 하루도 걸름 없이 공양주와 채공 노릇을 했지만 앓아 눕는 일도, 힘들어 집으로 다시 돌아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전생에 중이었으니 절로 들어와 그 인연을 이어 가야만 무병장수하리란 스님들의 말이 옳았던 게라고 아이는 머리를 끄덕였다.
아이가 출가한 수덕사는 어떤 곳인가. 아마도 앞날을 예견했을 만공스님은 서른네 살 때 경허로부터 전법게를 받은 뒤로, 일흔다섯 살로 입적할 때까지 덕숭산에 머물면서, 본절을 중창하고 정혜사와 최초의 비구니 선원인 견성암을 개설하여 수많은 청풍 납자를 길러 낸 뒤로 근세 한국 선종 불교의 원류를 이룬 곳이다.
설정스님의 행자 시절도 그러했지만, 너나없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자급자족하는 절 살림의 원칙을 꼿꼿이 지켰으니, 대중들이 모를 내고 김을 매고 추수하는 일은 지금까지 전해지는 수덕사의 가풍이다. 강원행 또한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아이가 그 전통을 처음으로 깨기에 이른다. 아이는 삼 년의 여법한 행자생활을 마친 뒤로 관응스님이 계시는 지사 강원을 거쳐 고봉스님이 계시는 해인사 강원을 졸업했다.
그는 사람들이 아직도 그를 수덕사 스님이 아니라, 혜인사 스님으로 알 만큼 그 곳에 오래 머물렀다. 그 곳에서 참선과 간경과 기도를 하다가, 범어사, 수덕사 등의 선방을 전전하다가 나이 서른에 다시 고검과 대검에 도전, 일 년 반만에 두 과정을 끝냈다. 그리고 서울대학교 원예학과에 입학한다. 폐에 구멍이 뺑 뚫릴 만큼 건강을 잃고 난 뒤에 이뤄 낸 일이었다.
그러나 그 공부를 끝내고 나니 그렇게 허망하였다. 입대 전 동화사 비로전에 가서 “어쨌든지 다시금 부처님 슬하에 와서 살게 해 달라”고 빌었던 기도의 영험이 그때까지 지속되었던 것일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중노릇하는 데 지식이란 결국 알음알이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이런 과정을 끝내고 난 뒤에 다시금 확인했다. 자신이 궁구해야 할 바는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덕성스러운 마음,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밝고 영롱한 그 마음을 밝히는 것임을 안 것이다.
멀리 돌아온 길 끝내고 일대사에 온전히 부닥쳐 보리라 마음 먹었다. 그러나 그의 선방행은 여의치 않았다. 77년도 즈음에 엄청난 법정 시비에 휘말린 수덕사의 형편 때문이었다. 그 동안 소염이라고는 원주도 맡아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공부도 공부지만, 어릴 적에 서봉을 하기도 했던 벽초 노스님의 당부 말씀이 아니더라도, 당연히 맡아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찰의 재산 관리에 대한 인식이 소홀했음은 그 곳만의 사정이 아니었지만, 막상 부닥쳐 보니 대중들이 앉는 법당마저 등기가 안되어 있었을 정도로 형편은 고약했다.
식빵을 찬물에 찍어 우겨 넣으며 학원에 다니다가 건강을 해쳤을 때도 들여다 보지 않았던 속가를 찾아가 어머니에게서 한 됫박 가까이 되는 패물을 얻어와 송사 비용을 마련했다. 그리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일에 뛰어드니, 자신이 등기를 한 것만 해도 일백팔십 건이고, 대법원까지 가서 승소한 것만도 여덟 건이었다.
송사란 법률만 가지고 될 일은 아니며, 정성과 열정이 겸비되어야 하는 일임을 몸으로 깨달았다. 80년부터 89년까지 수덕사의 주지를 맡은 동안 유실될 뻔했던 재산은 모두 되찾고, 산도 십여 마지기쯤 더 샀고, 논도 백여 마지기를 더 사 보탰다.
바쁜 나날이었다. 주지 부임 당시 대중은 스물다섯쯤이었지만, 일여덟군데쯤 되는 산내 암자 대중까지 보태면 이백이 훨씬 넘었다. 그는 바깥일은 바깥일대로 추어내는 한편으로, 산중 대중의 수효로는 나라안에서 몇째 가는 수덕사에 걸맞는 수행도량을 갖추기에도 애썼다. 선방을 활성화시키는 한편으로 초심자 교육에도 몸소 나섰다. 그 무렵 초심자 시절을 보낸 스님들은 신심이 절로 났을 듯하다. 도량석을 돌기도, 법고도 쳐 보이던 스님, 본사 주지 몸으로 직접 강의를 했던 드문 스님, 은사인 원담 방장스님한테 직접 배운, 간결하면서도 꿋꿋하여 신명 나는 전통 있는 “수덕사식 염불”을 듣고 반해서 그것을 녹음해서 다시 듣곤 하면서 그들은 행복했을 법했다.
해인사 시절에도 사하촌 사람들로부터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곧이들을 만큼 신임을 얻었던 설정스님이었다. 그러나 속인들한테서보다는 산내 대중으로부터 선심 얻기가 더 힘든 법이다. 새벽 예불 빠트리는 법이 없고, 산내 어른은 한 분으로 족하니, ‘큰스님’호칭은 한 분에게만 쓰게 하는 한편, 다른 스님들은 ‘노스님’으로 부르게 하고, 절은 삼배 아닌 한배만
하게 하고, 외출 나가기 전이나 돌아와서나 법당에 예 올린 뒤 방장 스님한테 인사 올리고, 속랍이 높으나 법랍은 낮은 노스님들한테도 깍듯이 인사를 올리고, 공양간 보살피기도 소홀히 하지 않고, 잠 들기 전 도량 둘러보기를 걸른 적이 없이 살았다. 그리고 산중 공양을 서로 나누는 등 “자유로운 왕래”로 산내 비구나들과 “함께 어울어져 사는 도량”의 기풍을
마련한 것도 설정스님 이후의 일이었다.
설정스님은 산내의 수승한 포행처로서 홍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정혜사와 만공스님이 깎은 듯한 벼랑에 나무 선을 그래도 살려 손수 지어 말년을 보낸 소림초당을 손꼽는다. 그러나 자신이 이 곳에 머물 때에 즐겨 찾는 곳은 가까이에 있는 다비장 두 곳이다. 처소 바로 옆의 옛 다비장은 만공스님을 다비한 곳으로서, 쇄골을 하는 구멍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널찍한 돌판이 있다.
만공스님은 열반 전에 산내 대중에 일렀다. “나 가고 나더라도 다비를 끝낸 뒤 사리를 취하는 짓 따위는 일체 없이 해라.” 수덕사는 그래서 다비를 끝낸 뒤 사리를 취하지 않는다.
덕숭산 자락에는 “승僧바위”라 불리는 절묘한 형상의 바위들이 많으나, 다비식 때는 주위로 웅기중기 흩어져 서 있는 그것들이 타오르는 불길을 함께 지킨다. 진도개 곰순이를 옆세우고, 설정스님 뒷짐지고 서서 그 불길 떠올린다. 그리고 마음에 새기고 또 새긴다.
“일체가 무상 아닌 것 없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