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시월 초파일을 며칠 앞둔 어느 날에 열다섯 살 난 작고 얼굴이 해맑은 사내아이의 손을 붙들고 처사한 사람이 수덕사로 불공을 드리러 왔다. 만공스님에게서 처사계를 받은 바도 있거나와, 스님들과의 교류도 잦았던지라, 그 날 밤을 절에서 묵고 가련다는 아이의 말을 처사는 무심히 들었다. 다음날쯤 내려오려나 여기고, 처사는 아이에게 일렀다.
“스님들께 폐 되지 않도록 해라.”
그것은 아이가 출가 전 아버지한테서 들은 마지막 말이 되었다. 열흘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식구들이 아이를 찾아 절로 올라왔다. 그러나 아이는 법당 뒤로 몸을 숨겼다. 다섯 살 전에 이미 천자문을 떼고, 여덟 살 무렵에는 통감을 하루 세 장씩 외어 보였던 아이여서 한학 속이 깊은 아버지의 기대를 샀다. 그러나 병악하여 자주 몸져 누웠다. 출가하여 삼 년 동안 하루도 걸름 없이 공양주와 채공 노릇을 했지만 앓아 눕는 일도, 힘들어 집으로 다시 돌아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전생에 중이었으니 절로 들어와 그 인연을 이어 가야만 무병장수하리란 스님들의 말이 옳았던 게라고 아이는 머리를 끄덕였다.
아이가 출가한 수덕사는 어떤 곳인가. 아마도 앞날을 예견했을 만공스님은 서른네 살 때 경허로부터 전법게를 받은 뒤로, 일흔다섯 살로 입적할 때까지 덕숭산에 머물면서, 본절을 중창하고 정혜사와 최초의 비구니 선원인 견성암을 개설하여 수많은 청풍 납자를 길러 낸 뒤로 근세 한국 선종 불교의 원류를 이룬 곳이다.
설정스님의 행자 시절도 그러했지만, 너나없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자급자족하는 절 살림의 원칙을 꼿꼿이 지켰으니, 대중들이 모를 내고 김을 매고 추수하는 일은 지금까지 전해지는 수덕사의 가풍이다. 강원행 또한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아이가 그 전통을 처음으로 깨기에 이른다. 아이는 삼 년의 여법한 행자생활을 마친 뒤로 관응스님이 계시는 지사 강원을 거쳐 고봉스님이 계시는 해인사 강원을 졸업했다.
그는 사람들이 아직도 그를 수덕사 스님이 아니라, 혜인사 스님으로 알 만큼 그 곳에 오래 머물렀다. 그 곳에서 참선과 간경과 기도를 하다가, 범어사, 수덕사 등의 선방을 전전하다가 나이 서른에 다시 고검과 대검에 도전, 일 년 반만에 두 과정을 끝냈다. 그리고 서울대학교 원예학과에 입학한다. 폐에 구멍이 뺑 뚫릴 만큼 건강을 잃고 난 뒤에 이뤄 낸 일이었다.
그러나 그 공부를 끝내고 나니 그렇게 허망하였다. 입대 전 동화사 비로전에 가서 “어쨌든지 다시금 부처님 슬하에 와서 살게 해 달라”고 빌었던 기도의 영험이 그때까지 지속되었던 것일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중노릇하는 데 지식이란 결국 알음알이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이런 과정을 끝내고 난 뒤에 다시금 확인했다. 자신이 궁구해야 할 바는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덕성스러운 마음,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밝고 영롱한 그 마음을 밝히는 것임을 안 것이다.
멀리 돌아온 길 끝내고 일대사에 온전히 부닥쳐 보리라 마음 먹었다. 그러나 그의 선방행은 여의치 않았다. 77년도 즈음에 엄청난 법정 시비에 휘말린 수덕사의 형편 때문이었다. 그 동안 소염이라고는 원주도 맡아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공부도 공부지만, 어릴 적에 서봉을 하기도 했던 벽초 노스님의 당부 말씀이 아니더라도, 당연히 맡아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찰의 재산 관리에 대한 인식이 소홀했음은 그 곳만의 사정이 아니었지만, 막상 부닥쳐 보니 대중들이 앉는 법당마저 등기가 안되어 있었을 정도로 형편은 고약했다.
식빵을 찬물에 찍어 우겨 넣으며 학원에 다니다가 건강을 해쳤을 때도 들여다 보지 않았던 속가를 찾아가 어머니에게서 한 됫박 가까이 되는 패물을 얻어와 송사 비용을 마련했다. 그리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일에 뛰어드니, 자신이 등기를 한 것만 해도 일백팔십 건이고, 대법원까지 가서 승소한 것만도 여덟 건이었다.
송사란 법률만 가지고 될 일은 아니며, 정성과 열정이 겸비되어야 하는 일임을 몸으로 깨달았다. 80년부터 89년까지 수덕사의 주지를 맡은 동안 유실될 뻔했던 재산은 모두 되찾고, 산도 십여 마지기쯤 더 샀고, 논도 백여 마지기를 더 사 보탰다.
바쁜 나날이었다. 주지 부임 당시 대중은 스물다섯쯤이었지만, 일여덟군데쯤 되는 산내 암자 대중까지 보태면 이백이 훨씬 넘었다. 그는 바깥일은 바깥일대로 추어내는 한편으로, 산중 대중의 수효로는 나라안에서 몇째 가는 수덕사에 걸맞는 수행도량을 갖추기에도 애썼다. 선방을 활성화시키는 한편으로 초심자 교육에도 몸소 나섰다. 그 무렵 초심자 시절을 보낸 스님들은 신심이 절로 났을 듯하다. 도량석을 돌기도, 법고도 쳐 보이던 스님, 본사 주지 몸으로 직접 강의를 했던 드문 스님, 은사인 원담 방장스님한테 직접 배운, 간결하면서도 꿋꿋하여 신명 나는 전통 있는 “수덕사식 염불”을 듣고 반해서 그것을 녹음해서 다시 듣곤 하면서 그들은 행복했을 법했다.
해인사 시절에도 사하촌 사람들로부터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곧이들을 만큼 신임을 얻었던 설정스님이었다. 그러나 속인들한테서보다는 산내 대중으로부터 선심 얻기가 더 힘든 법이다. 새벽 예불 빠트리는 법이 없고, 산내 어른은 한 분으로 족하니, ‘큰스님’호칭은 한 분에게만 쓰게 하는 한편, 다른 스님들은 ‘노스님’으로 부르게 하고, 절은 삼배 아닌 한배만
하게 하고, 외출 나가기 전이나 돌아와서나 법당에 예 올린 뒤 방장 스님한테 인사 올리고, 속랍이 높으나 법랍은 낮은 노스님들한테도 깍듯이 인사를 올리고, 공양간 보살피기도 소홀히 하지 않고, 잠 들기 전 도량 둘러보기를 걸른 적이 없이 살았다. 그리고 산중 공양을 서로 나누는 등 “자유로운 왕래”로 산내 비구나들과 “함께 어울어져 사는 도량”의 기풍을
마련한 것도 설정스님 이후의 일이었다.
설정스님은 산내의 수승한 포행처로서 홍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정혜사와 만공스님이 깎은 듯한 벼랑에 나무 선을 그래도 살려 손수 지어 말년을 보낸 소림초당을 손꼽는다. 그러나 자신이 이 곳에 머물 때에 즐겨 찾는 곳은 가까이에 있는 다비장 두 곳이다. 처소 바로 옆의 옛 다비장은 만공스님을 다비한 곳으로서, 쇄골을 하는 구멍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널찍한 돌판이 있다.
만공스님은 열반 전에 산내 대중에 일렀다. “나 가고 나더라도 다비를 끝낸 뒤 사리를 취하는 짓 따위는 일체 없이 해라.” 수덕사는 그래서 다비를 끝낸 뒤 사리를 취하지 않는다.
덕숭산 자락에는 “승僧바위”라 불리는 절묘한 형상의 바위들이 많으나, 다비식 때는 주위로 웅기중기 흩어져 서 있는 그것들이 타오르는 불길을 함께 지킨다. 진도개 곰순이를 옆세우고, 설정스님 뒷짐지고 서서 그 불길 떠올린다. 그리고 마음에 새기고 또 새긴다.
“일체가 무상 아닌 것 없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