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새기의 종교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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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도정일
1996년 09월 175호
이 시대를 두고서 저마다 세계화 시대라고도 하고, 정보화 시대라고도, 또 시장경제가 세계를 장악한 시대라고도 한다. 붙여지는 이름이 이렇듯 다채로운 것을 보면, 지금 이 세계가
상당한 변화를 겪고 있음을 실감한다. 게다가 4년만 있으면 세기가 바뀌어 21세기가 된다. 그 21세기가 갑자기 2001년부터 새로운 모습으로 올 것인가? 그렇진 않다. 이미 와 있는 형태의 연장일 것이다. 우리가 20세기말이라고 부르는 이 시점에 굴러가고 있는 이 세계가, 조금씩 어떤 변화를 보이기는 하겠지만, 거의 그대로 21세기 중반까지, 21세기 전체를 향하여 흘러가게 될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시대에 즈음해서 우리가 종교문학, 불교문화, 깨우침의 문학이라고 하는 것들도 다가오는 새로운 세기 또는 새로운 시대와 연결지어서 생각해 보아야 할 터이다.
지난 80년대를 거치면서 우리의 문학은 사회 의식 및 역사인식에서 상당히 성숙한 면모를 보여 왔다. 그러던 것이 최근 몇 년 동안 한국 문학, 특히 젊은 작가들을 보면 왜 문학을 해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인식이 허약해져 있음을 느낀다. 대체 왜 시를, 소설을 써야 하는지도 잘 모른 채 글을 쓰거나, 삶의 한 방책으로서 호구지책으로써 또는 명성을 얻기 위한 한 방편으로써 베스트셀러나 써 보자 하는 충동이 작용하고 있고, 그에 따라 작품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경박해져 있다. 가히 한국문학의 타락이라고 할 지경인 것이다.
우리 문학의 이러한 경박화 현상은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경박함과 천박함과도 깊은 관계가 있음을 말할 것도 없다. 지금 우리나라는 일찍이 이렇게 경박했던 적이 있었을까 싶을 만큼 가벼워졌다. 이 나라의 통치권자부터가 그렇다. 정권의 최고 담당자가 방송에서 또 공적인 석상에서 한다는 말이, “지면 안 된다. 무조건 이기고 봐야 돼”, “이등은 아무 소용없어 일등해야 돼”, “경쟁력 있는 사람만이 살아남는다”따위의 이야기를 누차에 걸쳐서 강조하지를 않나, 어느 날 문득 자본주의 재벌기업의 기업정책이던 ‘세계화’를 국책으로 내세워 세계화 바람을 붕 띄우니 사회 전체가 마치 풍선처럼 가볍게 날아오르고 있다.
이제 우리 사회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깊이 반성해야 한다. 아울러, 그것이 천민자본주의의 결과물이든 무엇이든, 이렇듯이 이상하게 타락하고 부패한 문화를 극복하기 위한 어떤 시도가, 어떤 노력이 어느 부분에서 누구에 의해서 시작되어야하고 또 실천되어야 할 것인지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앞으로 어떤 새로운 시대를 만나느냐에 앞서서, 우리 사회 전체에 걸친 경박성과 천박성이라는 문제에 대한 반성과 철저한 인식을 갖는 것이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인 바, 특히 문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 부분에 대한 깊은 성찰과 인식이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기라는 이름으로 부를 만한 변화가 오고 있다. 컴퓨터가 산업과 생활의 거의 모든 영역을 장악하고 있고 유전공학의 발달이 놀라운 경지에 이르렀다. 어쩌면 인간에 대한 생각을 전면적으로 바꾸어야 할 시대가 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제까지 인간에게 자율적인 의지가 있고 놀라운 정신력이 있고 주체 또는 자아라고 부르는 것이 존재한다고 믿어 왔으며, 그러한 믿음에 따라 인간은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다 하면서 그림을 그려왔다. 그러나 최근에 발견되고 있는 생물학적 주장이나 발견들은 전통적인 인문학적 인간관을 송두리째 뒤집어 엎을 준비를 하고 있고 또 그러한 발견들을 속속 내놓고 있다. 우리의 행동과 생각을 결정하는 것이 우리의 자율성이 아니라 이미 결정된 유전인자의 작동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에 의해, 도대체 내가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자율성이나 자율적인 존재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까지 제기되고 있다. 또 외계 생물체의 존재 가능성에 대한 발견도 인간에 대한 그림을 송두리째 바꿀 어떤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만일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 밖의 다른 별에 생물체가 존재한다면 인간은 지난 삼천 년, 사천 년 동안 그 삶을 지배해온 많은 이야기들과 패러다임을 전면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현대 사회의 문제와 현상은 본디 서양의 특성이다. 서양의 자본주의는 이백 년의 진행 끝에 마침내 몰가치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 서양이 우리보다, 우리의 천민자본주의 문화보다 더 낫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동양 정신의 깊이와 동양적인 가치를 입으로는 끊임없이 외치면서 어째서 오늘날 이토록 타락했는가. 이것이 바로 새로운 세기에 즈음한 종교문학, 불교문학의 화두이며 핵심이다.
더러 불교문학의 범주에 드는 소설이며 시, 또 몇몇 논자들어 전개한 불교문학론 등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문학이 따로 있고 종교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면에선 양자가 분명히 구별되며 또 구별되어야 하겠지만, 그러나 종교와 문학 사이를 이어주는 어떤 공통성이라고 하는 것을 과연 어디에서 찾을까 하는 문제를 한번쯤 짚어 보아야 할 것이다. 생각컨대. 모든 종교의 바탕은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이를테면 기독교에는 기독교 이야기,
곧 기독교 경전과 기독교 전통이 전하는 설화들이 있다. 그 기독교의 설화란 바로 이야기의 들이며 모델이다. 다 아다시피 기독교 이야기의 틀은 낙원의 상실과 그것의 회복 또는 은총과 타락과 구원이라고하는 세 개의 마디를 갖고 있는 일종의 플롯으로서, ‘구원의 서사’ 또는 ‘회복의 서시’라고 요약할 수 있다. (비단 종교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의지해서 살고 있는 자본주의의 거대한 이데올로기나 정치 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조차도 그 기본은 이야기이다.) 종교와 문학은 기본적인 서사성 곧 이야기성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종교와 문학은 물론 엄연히 다르다. 종교는 이야기에 입각해서 이야기의 틀에 의해서 성립하면서도 그 이야기들 속에서 강한 계율과 명령과 가치를 일종의 자기명령으로 지키지 않으면 안될 계율로, 양심으로, 구도의 법으로 올려세운다. 그리고 누구나 그것을 지켜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는 상당히 차원 높은 명령체계이다.
그런데 문학은 어떤가. 문학도 물론 이런 명령 또는 가치를 갖고 있지만, 문학은 본능적으로 그리고 본성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명령체계를 뒤흔들려는 충동을 가지고 있다. 존재하는 모든 규율과 법과 명령들을 뒤흔들고 위반하고 깨부수려는, 또 할 수만 있다면 그것에 대한 의심을 끊임없이 퍼뜨리려고 하는 그런 충동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문학의 위반충동이라고 한다. 바로 종교와 문학 사이에 존재하는 아주 근본적인 차이의 하나이다. 한쪽은 명령을 바라고 그것을 지키려고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 명령을 어기려는 행위를 넘어서서 저항하려고 하고 부수려고 한다. 그 까닭은 문학은 어떤 명령이든 그것이 굳어져서 화석화하면 그 자체가 인간의 삶을 질곡에 빠뜨리며, 명령이 강화되면 그것이 인간의 삶을 생명을 살아 있음을 생동성을 앗아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학은 끊임없이 흔든다.
불교문학과 기독교문학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서사구조의 차이점이다. 기독교문학은 시간의 틀을 가진 시간성의 서사이다. 기독교 세계는 우주가 창조된 시작의 한 지점과 그리고 그것이 끝나는 지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한 지점에서 시작되어 끝으로 간다는, 일직선으로 앞으로만 나아가는 시간의 진행을 속성으로 갖는다. 이 시간성의 특정은 되돌아갈 수 없다는 불가역성의 특징을 또한 갖는다. 기독교 문학은 이러한 시간성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시간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직선성이어야 하며, 시작과 끝을 가져야 하며, 불가역적인 진행을 지녀야 한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를 위시해서 서양의 서사 이론들도 기독교의 서사 구조처럼 시작 지점에서 끝 지점으로 옮겨간다는 직선성을 띠고 있으며, 이것이 또한 서양 문학의 큰 특정을 이루고 있다.
이에 비추어 볼 때, 불교문학은 불교의 원융한 사상에 기초한 고유의 서사구조를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행복하다. 우리가 불교문학을 이야기할 때 주제의 면에서 혹은 사상의 면에서 득도소설을 쓰고, 어떤 깨우침을 갖는다 는 소설을 쓰고, 선사들의 이야기를 쓰고, 어떤 법열의 경험을 작품화하는 것도 좋지만, 주제의 측면과 아울러 형식의 측면과 구조의 측면에서도 불교식의 플롯이나 그 불교식의 형식이 소설형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예를 들면 처음을 가지고 있고 끝을 향한다고 하는 이 시간성의 서사구조가 아닌 다른 어떤 구조도 끝이 있어야 하는데, 그 끝을 직선적인 종결보다는 뱅뱅 도는 어떤 구조, 이것을 우리는 흔히 역사관과 관련시켜서 와전형 역사관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시간의 모델을 보더라도 직선시간이 있는가 하면, 뱅뱅 도는 나선형의 시간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대단히 가까운 어떤 플롯의 조작방법일 것이다. 결국 형식의 차원에서 혹은 구조의 차원에서 뱅뱅 도는 어떤 플롯을 시도해 보는 것도 본격적인 문학의 한 특성이 될 수 있을 것이며, 더 나아가 시간성의 딜레마에 대한 새로운 양상의 도전이 될수 있다.
또 기독교문학은, 불교문학과 달리,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하는 중요한 개념을 가지고 있고, 선악의 뚜렷한 이분구도를 나타낸다. 그래서 기독교 서사 속에 들어가면 절대자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고아가 아니다. 굶주림에서 뿐 아니라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우리의 고통을 의미있게 하는 거대한 아버지, 다시 말하면 의미를 배급해준다는 뜻에서의 전능한 공급자인 아버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문학의 경우에 그러한 기독교적인 공급자로서의 의미부여자가 있는가? 구원자가 있는가? 나를 떠난 초월자가 존재하는가? 그 대답은 없음이다. 나는 우리의 불교가 매우 위험스러운 한 가지 경향을 밟아 왔다는 의혹을 갖고 있다. 그 위험스러운 경향이란 무엇인가. 나는 불교가 말하는 어떤 진리, 어떤 전체 법이라고 하는 것이 마치 서양의 세계관에서처럼 어딘가 다른 세계에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그 무엇이 있어서 그것을 획득해서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또는 그것을 찾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대중에게 불교를 또 진리를 이해시켜 온 분들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혹을 갖고 있다.
금강경의 한 대목을 인용하겠다. 한번은 석존께서 제자들을 모아놓고 물었다. 특히 수제자 수보리한테 묻기를 ‘수보리야 내가 이 세상에 나와서 만든 법이 있느냐?’하니, 수보리가대답 하기를 ‘세존이시여 당신께서는 이 세상에 와서 세운 법이 없나이다’하였다. 세운 법이 없다니.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석존께서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황하의 모래 같은 큰 은총이 그대에게 있으리라고 축복했다. 나는 이 대목이 적어도 불교적 의미의 진리와 깨달음의 내용을 잘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석존의 법이라고 하는 것은 석존이 만들고 부처님이 유지하고 또 부처님이 만들고 석존이 유지하는 그런 의미에서의 객관적이고 실재하는 절대법이 아니라 그러한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진리, 그것이 설파이고 그 설파를 위해서 석존께서는 수없이 많은 말을 했던 것이 아닌가.
기독교문학은, 그것이 기독교문학이라고 불리려면, 구원의 문제와 선악의 갈등, 타락과 타락한 상태로부터의 원상복귀 따위를 다루고 지향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에서 무척 중요하게 다루는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해답은 곧 구원이다. 기독교에서의 죽음의 의미는 동양사상이나 불교가 갖고 있는 그런 윤회적인 궤도와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죽음은 일회적인 존재인 개인 스스로에게는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서양 문학에서 큰 주제가 되어 왔다. 주제면에서 불교가 우리에게 던질 수 있는 통찰 혹은 주제적인 가치를 가진 진리들은 절대진리가 아닌, 통찰이라는 의미에서 불교적인 진리는 대단히 많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동안 대체로 한정된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의 어떤 주제들을 집중적으로 개발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 까닭에 그 주제를 확대하고 확산하고 계발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기독교와 기독교의 문학은 나와 초월자 사이를 연결시키는 작업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연결되었을 때 비로소 의미를 회복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그 연결고리가 필요하지도 않을뿐더러 존재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형태의 초월적인 존재, 초월적인 진리, 초월적인 어떤 중심존재를 끊어 없애기, 그런 것이 초월자와 자기를 연결한다는 생각은 곧 망상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어떤 절대의 법과 자기를 연결한다라고 하는 것도 망상이다. 바로 그러한 망상을 벗어났을 때에만, 그 절대의 법에 대한 믿음을 버리는 것도 버림의 일종이고, 포기의 일종이고, 대방기의 한 모습이다. 해탈은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오는 것이다. 한편 윤회와의 관계에서 이 해탈이란 무엇인가. 해탈하지 못한 존재는 끊임없이 중생의 모습으로 되살아나야 하는 것이 불교의 원리이다. 해탈이란 바로 그런 윤회의 고리를 끊고, 그 고리 밖으로 튀어나가 그 어디에도 갇히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불교가 갖고 있는 이런 내용, 이런 사상적 특정들을 이 글에서 특별히 강조하고 싶다. 다른 많은 것들이 있지만, 지난 삼십 년 동안 특히 철학과 문학이론 분야에서 집중적으로 개발되어 나온 서양의 사상 이론들이 이즈음에서야 불교적 통찰과 접근하고 있음에도 주목해야 할 터이다. 서양의 사상이론가들은 불교의 통찰을 빌리거나 서양의 전통에 대한 치열한 반성을 전개한 끝에, 석존이 이미 2,500년 전에 깨우친 진리에 팩 가깝게 접근하고 있다. 이를테면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의 해체이론을 보면 그 주장의 상당부분이 불교사상, 특히 용수보살의 주장과 유사하다. 더욱이 환경윤리의 측면에서 공생의 도덕적인 규칙을 비롯하여, 심지어 물리학의 영역에서까지도 불교의 세계관이 깊이 침투해 있다.
그런데 우리의 불교·문학이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될 또 다른 영역은 무엇인가. 세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욕망을 끊으라고 하는 주문처럼 실천하기 힘든 것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승에서의 세속적인 삶이라고 하는 것이 완전히 욕망에 의해서 추동되는 삶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이런저런 형태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면 그 욕망을 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물론 죽음을 통해 끊는 순간은 자연적으로 오기 마련이며, 죽으면 다 없어진다. 그러나 우리의 문학이 살아 있는 자들이 살아 있는 동안 자기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 좀더 인간답고 공동체적인 삶으로 유지하고 계발할 것인가에 도움이 될 그런
문학을 생산해내야 한다. 이 부분에서도 불교문학 작가들의 깊은 사색과 모색이 있어야할 것이다.
또 어떤 것과 어떤 것 사이의 연결, 즉 절대자와 아닌 것 사이의 연결이라고 하는 것을 설정하지 않는 것이 불교라고 한다면 종교체계로서의 불교에서는 무엇으로부터, 어떤 에너지로부터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자비라고 하는 것이 나오는가. 만일에 우리가 불교적 사색을 좀더 치열하게 확장하게 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 아무런 의미 없을 것이다. 아다시피 불교에는 창조가 , 창조와 관련한 설화가 없다. 그렇다면 우주를 주재하고 우주를 만들고 마침내 그 우주의 어떤 종결지점을 가져올 대섭리의 주재자가 없다고 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모든 중생에 대한 자비의 에너지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석존께서는 끊임없이 대자대비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잊지 말이야 할 것은, 우리가 어떤 무슨 방법으로 그런 사람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며, 자비를 베풀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불교문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 화두를 던지는 까닭은 왜 우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 모든 중생을 사랑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하기 위해서이다. 그저 대자대비만 외쳐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니, 그것에 대한 자기 나름의 모색과 사색이 없이는 아무리 대자대비를 주제로 이루어도 그것은 공수한 주제로 끝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