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지 않는 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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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로 가는 길 - 박원순
1996년 09월 175호
1912년 추수감사절을 기념하면서 미국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지사 콜만은 월리엄 밀스라고 하는 살언범을 사면했다. 그 주지사는 단지 자신의 선거 기간중에 유권자에게 한 약속을 이행한 것뿐이었다. 콜만은 한 무리의 불량배 지지자들 앞에서 “만일 당선되면 원하는 누구든 사면해 주겠다고 언약하였다. 지지자들은 ‘밀스’를 외쳤고 그는 당선을 주문하였다. 콜만은 주지사로 당선되었고 밀스는 자유를 얻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지난 13일 8.15특사를 발표하면서 ‘대형비리’사건의 관련자들을 대폭 사면, 복권시켰다. 이 특별사면 대상자 가운데는 율곡비리 사건의 김종휘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동화은행비리사건의 이용만 전 재무장관과 안영모 전 동회은행장, 슬롯머신 사건의 정덕진·덕일 씨 형제, 산업은행대출사건의 이형구 전 노동부장관 등이 들어있었다. 한편 안병화 전한전사장, 군인사비리사건의 김종호 전 해군참모총장, 상무대사건의 조기현 청우종합건설대표 등도 특별복권 되었다.
이만하면 김대통령은 댐기 동안 자신의 손으로 옥에 넣었던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사면과 복권의 혜택을 안겨 주었다. 김대통령은 콜만처럼 누구를 사면하겠다는 공약을 한 적도 없었다. 오히려 뇌물과 부패로 얼룩진 ‘한국병’을 고치겠다는 공약과 함께 취임 직후의 강력한 사정 드라이브로 국민들의 박수를 받았다. 그 박수소리는 바로 부패사범을 강력히 응징하라는 유권자들의 또 한번의 요구였다. 그 요구를 물리친 이번 사면복권을 정부 스스로 내세웠던 개혁과 사정 정책의 자기 부정에 다름 아니다.
사면권이 대통령에게 유보되어 있다고 하여 아무나 사면할 수는 없다. 이미 판사들이 심사숙고하여 내린 판결을 뒤엎고 죄인을 사할 때는 마땅히 그만한 정의의 요구가 있어야 한다. 흔히 형법학자들은 아무런 소득이 없던 범죄, 미수의 범죄, 강제된 범죄, 양심에 기초한 범죄 등이 사면대상이 된다고 얘기한다. 특히 정치 권력의 의견과 달리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처벌된 양심수는 그 정치적 상황이 변하면 사면의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밖에 없다. 「미란다왕문경」에는 미란다왕과 학승 나이가세나 사이의 다음과 같은 대화가 나온다.
“대왕이여, 암사자와 암표범과 암캐들은 단단한 뼈나 고기를 먹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은 그런 것을 먹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것이 배 속에 들어가서 녹아버립니까?”
“그렇습니다. 녹아버립니다.”
“그들의 배 속에 든 태아도 녹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왜 녹지 않습니까?”
“존자여, 숙업宿業의 제약에 의해 녹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수억 원의 돈을 꿀쩍 한 사람들의 범죄는 녹아 버리지 않는 숙업에 가까운 것이다. 이미 부처님은 남의 물건을 훔치는 투도偸盜의 죄는 죽어 지옥에 떨어지는 중죄라고 가르쳤다. 대통령에 의해 사면 복권된 비리의 주범들이 아직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에는 이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