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목적 반대도 문제지만 맹목적 추종도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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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장기표
1996년 08월 174호
세상에 참으로 혼란스럽다. \"도덕불감증과 “불법불감증이 팽배해 있고, 어느 한쪽에 서기만 하면 그쪽이 옳든 그르든 무조건 지지하란 맹목성이 우리 사회를 혼란스럽게 한다. 지식이 고도로 발달한 사회인데도 이성적 사고와 합리적 판단은 더욱더 찾아보기 어려우니 이것이 오늘 우리 사회를 시대 착오적인 대립과 갈등으로 몰아넣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종교적 차원이 아니더라도 정견正見과 정사正思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라 하겠다.
북한 문제에서도 맹목적인 반대와 추종이 이성적 사고와 합리적 판단을 차단함으로써 민족통원을 위한 현실적 대안마련을 어렵게 하는 경우가 많다. 북한에 대해 무조건 반대하고 비방하는 반공일변도가 있는가 하면, 근년에 접어들어 북한측을 무조건 두둔하고 추종하는 경향 또한 강하다. 북한의 식량 부족 사태와 관련하여 그 동안 민족 통일을 강조하면서 북한의 입장을 두둔하는 경향을 보여온 사람들의 태도는 합리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생각되어 이 점을 몇 가지 지적함으로써 북한 동포들을 실질적으로 돕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고자한다. 먼저 북한의 식량 부족사태 원인을 지난해의 홍수 때문이라고 생각하고서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전혀 따져보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태도이다. 홍수가 없었더라도 북한이 식량 부족사태에 직면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북한 정부의 주장에 따르면 10만 헥타르 정도의 경작지가 유실되고 5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해서 4천만달러 정도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때문에 북한의 전 인민이 굶주림에 허덕인다면 그것은 일시적인 홍수 때문이기보다 북한의 경제 전반이 낙후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인 낙후성이 일시적이거나 농업생산에 국한한 것이 아니고 구조적이고 전면적이라는 데서 북한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주체사상 및 사회주의 체제의 비효율성과 북한 정권의 무능을 직시하지 않을수 없다. 옛 부터 치산치수治山治水로 홍수를 방지하는 것은 정치의 요체이거니와, 설사 천재지변인 홍수를 만나 식량 생산 감소가 불가피했더라도 그것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전 세계에 구걸할 정도라면 이는 북한 정권의 무능을 드러내는것이 아닐수 없다.
우리가 이처럼 북한의 식량부족 사태의 근본 원인을 지적하는 것은 북한의 동포들이 근본적으로 식량부족사태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북한 정권이 체제의 비효율성과 정권의 무능을 은폐하기 위해 식량부족의 원인을 홍수 때문이라고 과장해서 선전하는 것에 골이나 식량부족의 근본원인을 알아보지 않거나 알면서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는 것은 북한동포들을 굶주리도록 하고 있는 북한 정권을 지원하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북한에 식량을 보내지 말자는 것은 전혀 아니다. 식량을 보내야 한다. 그러나 일반시민들이 이것저것 따짐이 없이 북한에 식량을 보내는 것은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아가페적 사랑이 될 수도 있겠으나, 사회과학에 기초해서 통일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식량부족의 원인을 따지지 않고 식량을 보내자는 주장만을 한다면 그것은 북한정권의 주장을 맹종하는 것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다음으로 북한 정권과 북한의 인민을 구분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것도 문제이다. 정권과 국민을 동일시하는 것은 그 정권이 국민의 지지를 받을 뿐만 아니라 국민의 권익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으로 인정받을 때이다. 그렇지 못할 때에는 그 정권과 국민은 동일시 될 수 없다. 북한의 경우, 북한인민들이 체제의 비효율성과 정권의 무능으로 말미암아 절대빈곤의 상태에서 허덕이고 있는 상황을 보면서도 그 정권이 인민들로부터 지지를 받는다고 보고 정권과 인민을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이다. 북한의 정권과 인민을 동일시해서 북한을 도운 것이 결과적으로 북한의 반인민적인 정권을 도운 것이 되어 인민의 고통을 연장시킬 수도 있음을 유념해야겠다.
언젠가 통일이 되거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할 수 있게 되어 북한인민들이 남한의 “통일운동가들\"에 대해 김일성, 김정일 정권이 권력 유지를 위해 자기들을 기만하고 억압하는 데 들러리를 선 것으로 비난하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그동안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정권은 무조건 통일을 바라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과연 그러한지, 그리고 특히 북한의 현 집권 세력이 통일을 버리는 세력인지도 고려해 볼 일이다. 그런 고려 없이 북한의 집권 세력이 무조건 통일을 바랄 것이라는 전제 아래 통일 문제를 논하는 것은 민족 통일에 도움이 안 될 뿐더러 북한의 인민들에 게 어려움을 안겨 주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을 한다고 해서 북한 정권과는 대화도 교류도 하지 말아야한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정권이기 때문에 더 많은 대화와 교류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어떠한 입장을 가지고 대화와 교류에 임하느냐하는 것은 그 차이가 대단히 클 것이다.
그리고 북한에 식량을 지원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 가운데는 지난날 북한을 살기 좋은 나라임은 물론 천국쯤으로 생각했던 사림들이 많다. 북한을 천국이라고 생각했을 때에야 천국을 건설한 북한의 정권과 그 지도 이념인 주체 사상과 사회주의 체제를 크게 칭송하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북한이 천국이기는커녕 식량문제마저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낙후되어 있는 사회임을 알았다면 이제 그러한 지경에 이르게 한 그 체제와 정권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거부감을 갖기는커녕 또 다른 이유를 내세워 북한 정권에 추종하는 태도를 나타내 보이는데 그것은 북한 정권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자세로 통일운동을 추진해서는 대중의 지지를 받을 수 없음은 물론 오히려 통일을 방해하는 것이 될 것이다.
민족의 통일을 이루고 북한동포들을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균형 잡힌 사고와 합리적인 판단에 따라 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소박한 동포애만으로는 통일을 이룰 수 없다. 오십 년이 넘게 너무도 다른 사회에서, 심지어 강한 적대감을 가지고 살아온 민족이 하나로 어울어지기 위해서는 정교한 통합의 과정이 필요하다. 물론 민족의 통일이 계획된 통일방안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대폭발(Big Bang)처럼 갑자기 이루어질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폭발’에만 맡겨 놓을 수는 없다.
과학적인 자세로 \'준비하는 통일운동’을 해야만 그나마 대혼란으로 인한 민족의 소모적 갈등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