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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과 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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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비의 소리 - 원철 1996년 08월 174호
혜가스님이 달마대사를 찾아가서 한마디 여쭈었다. “저의 마음이 편하지 못하니 스님께서는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소서.\" \"너의 마음을 가지고 오너라. 내가 편안케 해 주리라.\" “저의 편안하지 못한 마음을 찾으려 하니 찾을 수 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이미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마음에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본인이 알게 함으로서 번뇌를 스스로 제거하도록 한 것은 선사들이 즐겨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이는 부처님께 배워 온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 갑자기 아들이 죽어 버린 여인이 부처님을 찾아왔다. \"부처님 제 아들을 살려 주십시오\" “아들을 살려 줄 테이니 시키는 대로하겠느냐.” “아들만 살려 주신다면 무슨 일이든지 다하겠습니다.\" “그러면 좋다. 아랫마을에 가서 쌀을 좀 얻어 오너라. 단 죽은 사람이 없는 집에 가서 얻어 와야한다.\"
아들을 살리 수 있는 방법치곤 너무 쉽다고 생각한 여인은 동네를 돌기 시작했다. 대문을 두드려서 인기척이 나면 “이 집에 죽은 사람은 없느냐?\"고 물었다. 온 동네를 다 돌았으나 죽은 사람이 없는 집은 어느 곳에도 없었다. 그 여인도 참으로 슬기로운 사람이었다. 부처님이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내 아들만 죽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아들의 죽음을 객관적인 위치에서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되찾었던 것이다. 동시에 슬픔도 사라졌다.
아들의 죽음에 대하여 문제를 푸는 법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첫째, 여인의 소원대로 당신의 신통력을 이용하여 아들을 살려내는 것이다. 둘째, 여인으로 하여금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
전자는 해결법이요, 후자는 해소법이다. 부처님은 해결법을 사용하지 않고 해소법을 선택했다. 왜냐하면 전제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아들을 살려 달라는 것은 죽음이 내 아들에게만 없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마치 혜가스님이 번뇌의 실체가 있다고 생각한 것처럼, 전제가 잘못된 것은 그 전제 자체가 잘못임을 알게 해 주는 것이 문제의 근원적 해결법이다. 곧 해소적 해결인 셈이다.
종교는 중생의 잘못된 욕망의 확장 재생산에 기여해서는 안 된다. 중생 욕구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게 함으로써 스스로의 욕망이 부질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어야 한다. 대중의 욕망에 영합하여 종교까지 물질적 이익의 충족을 위한 도구가 되게 한다면 이는 스스로 종교의 고유 영역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빚게 된다. 부처님이 신통력으로 아들을 살려줄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를 깊이 헤아려야 한다. 현상계의 실상을 제대로 보게 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바른 안목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