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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은 상호 의존관계로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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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곁의 부처 - 장휘옥 1996년 08월 174호
복잡하게 얽힌 인간 관계가 싫어서 로빈슨크로우소우처럼 무인도에 가서 아무에게도 의
지하지 않고 혼자 살아 봤으면 하는 생각을 한번쯤 해 본 사람이 적지 않올 것이다. 그러나
“인간사회를 떠난다고 해서 남의 도움없이 살 수 있는 줄 아니? 세상에 독불장군은 없어. 무인도에서는 먹지도 입지도 않는다던? 먹는다는 것 자체가 벌써 남의 목숨에 의지하는 것인데, 너는 혼자서 저절로 큰 줄 아니? \" 라는 말올 듣는다면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그렇다. 이 세상만물은 저절로 혼자서 이루어지는 것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할 수 없듯이,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내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나를 낳아준 부모가 있고, 내 부모에게는 내 부모의 부모가 있었고, 이렇게 무한한 과거로 이어지는 내 조상이 있기에 현재의 내가 존재할 수 있다. 또한 내가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나를 돌보아준 부모를 비롯해서 더 넓게는 나의 생명을 유지시켜 준 동식물의 도움에 의해서이다. 이와같이 서로 의지해서 한편이 원인이 되면 다른 한편이 결과가 되어 생존을 거듭하는 만물의 상호 의존관계를 불교용어로 연기緣起라 한다.
‘연기\' 란 사물이 서로 의지(緣)해서 생生한다는 뜻으로서, 또는 인연因緣이라고도 한다.
\'인’ 이란 결과를 가져오는 직접적인 원인이고, ‘연\' 이란 ‘인\' 올 도와주는 간접적인 조건올 말하는데, 모든 존재는 인과 연의 결합에 의해 이루어지며, 역으로 이것을 성립시키고 있는 원인이나 조건이 없어지면 소멸되어 버린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세상에는 그자신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으로 내 것이라고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 연기를 설한 목적이다. 불교의 연기설은, 석가모니가 해탈을 실현하는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무명無明 곧 무지임올 깨닫고, 이 무명을 어떻게 하면 멸할수 있을지를 설한 것에서 연유한다.
원시불교의 연기설 가운데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발달된 형태는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이다. 그 순서는 ①무명無明-②행行-③식識-④명색名色-⑤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 愛- 취取-⑩ 유 有-⑪ 생 生-⑫노사 老死이다.
이것은 우리의 삶은 서로 의존(緣起) 관계에 있다는 것을 밝힌 것으로서, 인간은 근원적인
무명(무지)으로 인해 현실의 고통스러운 삶이 있으므로, 이 무명을 멸하면 고통도 멸하게 된
다는 논리이다. 곧 사물의 진실한 도리를 깨닫지 못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무명’ 이 있기
때문에, 인식 작용을 형성하는 힘인 \'행\' 이 있고, 행이 있기 때문에 인식 기능을 가진
\'식\' 이 있으며, 식이 있기 때문에 인식의 대상이 되는 정신(名)과 육체(色)로 구성된 명
색 이 있고, 명색이 있기 때문에 안, 이, 비, 설, 신, 의라는 여섯 개의 감각기관인 ‘육입\' 이 있으며, 육입이 있기 때문에 외계와 접촉하는 ‘촉’ 이 있고, 촉이 있기 때문에 대상을 감수함으로써 일어나는 감각이나 감정인 \'수\' 가 있으며 수가 있기 때문에 본능적인 \'애\' 가있고, ⑨애가 있기 때문에 집착인 \'취\'가 있으며, ⑩취가 있기 때문에 기초적 생존인 \'유\' 가있고, ⑪유가 있기 때문에 생존의 시작인 \'생\' 이 있으며, ⑫생이 있기 때문에 늙고 죽는 \'노사\' 가 있다는 것을 순서대로 관하는 것인데, 이것을 순관願觀이라한다.
또한 역으로 노사의 고통을 없애는 원인을 규명하면 생을 멸하는 방법을 발견하게 되고,
같은 방법으로 계속 규명해 가면 드디어 무명의 멸에 이르게 된다. 이리하여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면 식이 멸하고, 생이 멸하면 노사가 멸한다고 역으로 관하는 것 을 역관逆觀이라 한다. 순관은 현실의 삶을 설명하는 원리가 되고, 역관은 노사의 고통은 무명을 끊음으로써 달성된다고 하는 해탈의 근거를 제시해 주고 있다.‘따라서 석가모니가 말하는 고뇌로부터 해탈의 길은, 고뇌의 원인을 무명에서 발견하고 이 무명을 멸해서 명明에 도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십이연기설은 뒤에 각 항을 생략해서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면 저것이 생환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이 멸한다’(「장아함경」 권15)는 간략한 표현도 만들어졌다. 이것은 모든 존재는 상의상관 관계에 있다고 하는, 연기의 정의를 잘 나타내고 있다. 연기의 도리를 깨달음으로써 고뇌로부터 해탈을 꾀하려고 하는 방법은 인도 철학사상에는 보이지 않는 불교의 독자적인 입장이다. 불교교리는 이 연기의 도리를 중심으로 발전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파불교 시대에는 무아설의 입장에서 윤회를연기緣起로 이해하고, 특히 설일체유부에서는 십이연기설을 업사상과 결합해서 과거, 현재, 미래 삼세에 걸친 업보의 인과로 피악하여 업감연기설業感緣起說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설일체유부는 부정해야할 미망에 싸인 생존의 매커니즘을 설득력 있게 표현하려 한 나머지, 미망의 생존을 실체로 파악해서 인과론적으로 설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뒤에 대숭불교가 설일체유부를 비판한 것 도 실은 이 점에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용수는
모든 사물을 연기라고 하는 관계성에서 파악하여 인과를 고정적으로 본 설일체유부의 실재
론의 입장을 철저히 부정하였다.
‘인\'이란 ‘과\'와의 관계성에 있어서 ‘인’이며, \'과\' 란 \'인\' 과의 관계성에 있어서의 \'과\' 이기 때문에, 인과란 상관성의 관계에서만 성립한다. 만일 \'인\' 과‘과’가 상관 관계를 떠나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며, 인과는 성립하지 않는다. 여기서 인과는 설일체우부가 주장하는 것처럼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인’과 \'과\' 의 동일성 여부를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
만일 \'인’과‘과\'가 동일한 것이라 한다면, 예를 들어 종자는 싹과 동일하기 때문에 싹에서 싹이 나온다고 하는 것이 되므로 어느 쪽이 ‘인\' 이고 어느 쪽이 \'과\' 인지를 알 수 없게 된다. 또 만일 다른 것이라 한다면 예를 들어, 돌에서 싹이 나온다고 하는 불합리가 생기므로 양자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성립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인과를 동일성과 별이성別異性에 의해 부정한 용수는 인과를 연기라고 하는 관계성에서 파才하였다. 이것을 모르고 ‘인\' 과‘과를 각각 그 실체로서 성립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우리들 사유의 잘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