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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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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최하림 1996년 08월 174호
병과 여행은 우리에게 지혜를 길러준다고 누가 말했는지 기억이 희미하
다. 앙드레 지드였던 것 같지만 릴케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두 작가는 문학 청년시절 동류항同類項같은 것으로 붙어다니면서 내게 많은 문학적 영향을 미쳤다. 그러니 기억을 혼미시킬 만도 한 일이다.
하긴 “여행은 지혜’란 말을 한 것이 지드여도 릴케여도 이제는 별 상관 없다. 중요한 것은 “여행은 지혜를 가져다 준다\"는 사실이고, 그 여행은 길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전국 각지에 길이 나 있지 않는 곳이 없다. 산간 벽지에도 아스팔트 길이 나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여행객들은 \'1일 여행’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지 이 “여행\"에 “관광”이라는 말이 잠식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예컨대 중국으로 소동파 유적을 보러간다고 할 때도 중국 여행이라 하지 않고 중국 관광이라 한다. 사전에 찾아보면 \"관광”은 “보러
감\"으로 풀이 되어 있고 여행은 \"볼 일이나 유람의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이라고 되어 있다. 뜻이 별로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도 역사적 인간인 우리는 여행이라고 할 때 향수와 낭만과 자유가 감도는 사색의 시간들을 떠올리지만 관광에는 그런 분위기가 없다. 관광은 관광 회사의 모집과 스케줄에 따라 나이가아라로 떼로 몰려가는 부녀자들과 정력에 좋다는 코부라와 곰을 찾아 동남아로 향하는 기름기가 번질번질한 중년 사내들의
모습이 연상된다. 그러고 보면 비슷한 말이라도 시대와 공간에 따라 내용이 바뀌는 모양이다.
최근 광주 전남에서도 관광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지방 당국자들은 남도 문화와 남도 지역을 묶어 관광객을 적극 유치해야 한다고도 하고, 비엔날레와 올림픽을 연계시켜야 한다고도 하고, 담양의 가사 문화권을 적극 개발, 홍보해야 한다고도 한다. 그런 정책적 프로그램들이 일 년에도 수십 차례 발표되지만 프로그램들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실행되고 있다는 말은 들리지 않는다. 탁상공론만이 난무할 뿐이다.
그 바람에 땅값이 뛰어오르고 인심이 각박해져 간다. 어느 봄에는 산수유 꽃을 보려고 구례군 산동면으로 간 적이 있었다. 며칠 전에 비가 내렸던지 마을 앞 내에는 맑고 찬 물이 바위 틈 새를 뚫고 철철철 흘러내리고, 숨을 크게 쉬면 떨어져 버릴 것 같은 산수유 꽃이 골짜기를 물들이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산수유를 따라 천천히 발을 옮겼다. 볼거리가 있으면 자연 걸음은 늦어지는 법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산수유가 우리 눈으로 들어오고, 그러면 감각과 뇌수는 산수유의 아름다움을 맛보고 해석하는 미적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걸음이 늦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런 흥 속으로 한 아주머니가 불쑥 끼어 들어왔다. \"빈 집 사지 않으려우, 물소리가 듣기 좋은 집이 마침 났어라우\" 아주머니는 우리를 집 보러온
사람들로 인식한 모양이었다. 흥이 깨질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이런 땅값이 뛰고 인심을 헤치는 관광 정책이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관광 정책은 멀리 내다보면서 차근차근 추진되어 나가야 한다. 화원 관광단지라고 하면, 화원의 경관 속에 위락단지를 세우고 길을 닦아 사람들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다도해와 어울리는 작은 집들, 동백꽃들, 밭사래들이 주민의 순박한 삶과 어울리는 화원반도의 전체상을 존중하면서 산기슭 틈틈이 빌라가 들어서고 또는 호텔이 들어서는 것이 되어야한다. 또 광주나 목포에서 화원으로 가는 길도 사람들이 찾아올 수 있는 특성이 있는 길로 만들어야 한다. 지금 화원으로 가는 서정 - 옥천간이 4차선 도로로 확장중인데 길만 확장된다고 해서 사람들이 오는 것 이 아니다. 그 길을 아름답게 만들어야 한다. 전주-군산간 벚꽃나무 길처럼 광주-화원간 목포-화원간 길을 벚꽃나무길이라든지 메타스퀘어길로 만들어 볼거리를 이루게 되면 돈 들여 홍보하지 않더라도 전국의 관광객들은 차를 타고 절로 몰려들 것이고, 관광객이 몰려들면 화원관광단지는 지면 성황을 이루게 될 것이다.
주명덕의 한 사진을 보면 어둑어둑 한길로 삿갓을 쓴 스님이 바쁘게 걸어가는 모습이 잡혀져 있다. 스님의 건너편으로는 키 큰 느티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고 그 안쪽으로 추수를 끝낸 논에 볏집단들이 쌓여 있고 구불구불한 길이 있다. 그 사진 안에는 느티나무를 당산나무로 모시던 마을문화와 볏집단이 말해 주는 농경생활, 그리고 스님의 종교적 세계가 길을 통하여 서로 연결되고 펼쳐져 있다. 스님의 걸음걸이는 빠른 것 같지만 이 문화적 풍경 속에서는 천년문화가 당겨지고 끌려가고 있다. 이렇듯 문화가 길에 있을 때 그 길 풍경은 생각하는 공간이 되고 창조적 세계로 이어질 수 있다. 무작정 관광단지를 조성한다고 해서 관광객이 오고 돈을 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볼거리는 문화가 가담해야 되고, 문화가 있는 풍경은 사람들을 소박하게 만든다.
길은 문화에 있어서 핏줄이라 할 수 있다. 길이 이끌어 주지 못하면 문화는 퇴락 한다. 사원의 아름다움은 길로부터 비롯된다고 해도 된다. 송광사나 백양사에 가려면, 예전에는 터널을 이룬 나무숲과 이끼 낀 바위와 이름 모를 벌레 울음소리로 이루어진 마음 깊은 길이 있었다. 그 길은 사원과 스님들의 삶에 위의를 얹어 주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관광객들을 위하여 -그들이 타고 오는 차를 위하여 - 숲은 베어지고 이끼는 제거되고 벌레 울음소리는 자취를 감추었다. 생각하는 길들은 사라졌다. 자동차의 소음과 관광객의 천박한 노랫소리, 잡담소리들이 산을 울리며 종교적 분위기를 파괴해 버렸다. 사원도 그에 맞서기보다 그에 응하는 편이라고 해야 한다. 대웅전의 규모가 거대해지고 오색찬란한 단청이 입혀지고 탑이 올라가고 연못이 파진다. 작은 것을 귀하게 여겼던 고행승들의 정신이 사라지고 있다. 이러고서 어떻게 사원이 구원의 지팡이를 들어 보일 수 있겠는가
크고 화려한 사원들은 역사에 남을 수는 있겠지만 지혜의 산실이 되기는 어렵다. 길의 문화를 육성해야 한다. 길에는 섭리가 있다는 말이 있다. 길에는 신이 있다는 뭇이다. 우리가 길에서 방향을 잃었을 때도 그것은 고초가 아니라 놀랍고도 기억할 만한 체험이 변용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