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지에서 생각한다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유마의 방 - 김석철
1996년 07월 173호
“2002년 월드컵 때 무엇을 세계에 보여줄 수 있겠는가.
천삼백 년 전 동양 최대이던 황룡사를 복원할 수 있다면 한국인의 문명적 저력을 세계에 보일 수 있는 최고의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복원이 불가능하다고들 한다.
왜 원래의 도면을 다시 그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창조적 복원이 이루어져 한다.
건축은 골동품이 아니다. 석조건축의 복원과 목조건축의 복원은 다르다. 목조건축은 원형의 도면만 있으면 다시 짓는 것이 상식이다. 해인사도 창건 당시 그대로가 아니다.
동양의 건축은 창조적 중창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대원군이 북원한 경복궁은 이태조의 경복궁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원형의 북원이 뜻이 있는 것이지 원래의 복원만이 외길이 아니다. 도시의 복원은 유기체적 실체의 발견이면 되는 것이다.
경주는 형이상학적 도시였다. 역사상 어느 도시도 천 년 전 경주만큼 전도시가 종교적인 곳은 없었다. 극락정토를 그들은 도시 스케일로 이승에 이루었다. 교황시대의 로마도 그러하지 못하였다. 유일신을 위하여 제신의 신전인 고대 로마의 유적을 파괴하고 위에 거대한 성전을 수없이 지었어도 도시의 기본틀은 제신의 도시였던 고대 로마의 모습 그대로였다. 경주와 비슷한 시기의 종교 도시인 중세의 도시 역시 교회가 도시의 상징적 원점이기는 하나 정치와 상업 공간이 도시의 더 큰 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다. 아직 천 년 전의 모습을 간직한 순례의 도시 아씨씨도 종교구역이 도시의 중심일 뿐이다.
경주는 전 도시가 절과 탑으로 이루어져 있고 도시의 일상이 바로 종교 생활과 하나가 되어 있었다. 마호멧의 메카와 삼천 년 종교의 도시 예루살렘만이 경주와 유사한 도시다. 불교의 본거인 인도에도 사원이 모인 승가는 많았고 중국에도 돈황 같은 종교 공동체의 마을이 있었으나 십칠만 호의 대도시가 거대한 종교 공동체를 이룬 경우는 예가 없었다. 철이 별같이 가득하고 탑이 기러기 떼같이 이어지던 천년도시 ‘경주’는 지상에 남아 있지 않다.
신라가 멸망할 때 상당수의 지배계층이 개성으로 이주하고 몽고병란 때는 황룡사를 비롯한 대부분의 도시와 건축이 불타버렸다. 폐허의 도시로 지하에 묻힌 옛 경주 위에 지금의 경주인 읍성이 들어선 것이다. 옛 경주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불교국가였던 고려에서도 경주의 원상을 복원하려 한 노력이 없었고 조선조 때는 많은 읍성의 하나에 불과했다. 옛 도시가 불타 사라진 칠백년 만에 옛 도시 구역이 하나씩 발굴되어 지상으로 나오고 있다. 그러나 아직 도시 구조의 기본을 알려줄 만한 발굴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기왕의 고고학적 성과를 토대로 새로운 발굴을 시작할 수 있는 도시의 원형을 발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고고학적 발견과 문헌자료의 기록과 도시의 유기체적 논리에 의해 선사시대로부터 원삼국시대와 통일신라에 이르는 여러 단계의 옛 경주의 도시 형식을 되찾는 도시 계획도 제작을 서둘러야한다. 도시라는 유기체가 갖는 질서 형식과 옛 경주가 갖는 역사 지리적 사실에 대한 연구가 병행되어야 한다.
고조선 때부터 이어온 한국적 도시형식과, 당시 교류가 많았던 중국 장안의 도시 형식과 신라의 국교였던 불교의 도시 원리를 집합하여 원경주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어야 한다. 지리학적 접근과 역사학적 접근이 하나로 합할 때 더 확실한 지도를 그릴 수 있고 그 지도를 근거로 주요 부분의 발굴이 이루어져야 한다.
경주의 주요 도시 구역이었던 황룡사 일대의 발굴이 십수 년째 이어져 오고 있다. 초기의 궁성이었던 월성과 주작대로로 이어진 임해전, 안압지, 황룡사 일대의 모습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전량지의 발굴과 관련 문헌자료가 더 밝혀지면 원경주의 중심구역이었던 황룡사 일대를 추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황룡사는 9층 목탑의 예순네 개 주춧돌이 남아 있다. 문헌과 기록, 당시의 건축 형식과 고고학적 발굴 등을 토대로 황룡사의 복원도를 그려보았으나 이제 시작 단계일 뿐이다. 예순네 개의 주춧돌이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충분한 문헌기록을 더 찾고 주변 일대를 추가 발굴하면 실제의 모습에 더 근접한 도면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자료만으로 원형을 찾으려 하지 말고 건축 구조적 논리를 기본으로 해야 한다. 여기에는 건축가, 고건축 전문가, 고고학자, 구조전문가, 미술사학자들의 공동 작업이 필요하다.
황룡사가 불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후 무신정권이 강화도로 도피하여 전 국토가무정부상태에 빠졌을 때 왜구에 의해 경주는 또 다시 철저히 약탈당했다. 이때 엄청난 양의 문헌자료가 소실되었다. 불교 최대의 도시 경주는 몽고인과 왜인에 의해 지상에서 사라졌으나 지하에 묻힌 도시의 기본 형식은 남아 있다. 컬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할 때 일군의 학자들은 지하에 매몰된 옛 도시를 찾아나섰다. 미지로의 탐험과 사라진 과거로의 탐험이 동시대에 이루어졌다. 우리의 세계화가 한국의 원형 도시를 찾는 일과 함께 이루어질 때 한국문명의 신기원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옛 도시들은 지상에서 사라졌다. 삼국의 수도였던 평양, 부여, 경주는 물론 개성조차 역사의 틀이 다 부서져 있다. 정도 육백 년이 지난 서울도 고궁과 일부성벽만으로 남았다. 21세기는 도시의 시대이며 세계 공동체의 시대이다. 세계에 우리를 보이려면 우리의 옛 도시를 찾아야한다. 오래된 문명국가가 세계에 보일 수 있는 최고의 문명과 문화는 역사도시이다. 석조의 도시인 유럽과 달라 목조의 도시인 동양은 복원의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다. 동양의 옛 도시에서 건축은 끊임없이 새로 짓고 덧지어 왔다. 불태우는 데 만석 달이 걸린 세계 최대의 왕성인 아방궁을 짓는 데 이 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칠백 년을 지속한 자금성도 끊임없이 다시 지은 것이다. 광해군과 대원군의 중창이 없었으면 지금 서울이 어떠하였겠는가 러시아에 삼십억 불을 주는 외교보다 삼십억 불을 들여 옛 도시를 복원하는 노력이 더 세계에 우리를 크게 보이게 하는 일이다.
2002년 월드컵 때 무엇을 세계에 보여줄 수 있겠는가. 천삼백 년 전 동양 최대이던 황룡사를 복원할 수 있다면 한국인의 문명적 저력을 세계에 보일 수 있는 최고의 기회가 될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복원이 불가능하다고들 한다. 왜 원래의 도면을 다시 그릴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묻고 싶다. 창조적 복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건축은 골동품이 아니다. 석조건축의 복원과 목조건축의 복원은 다르다. 목조건축은 원형의 도면만 있으면 다시 짓는 것이 상식이다. 일본이 세계에 그들 정신의 뿌리라고 말하는 이세신궁도 원형의 도면에 의해 복원된 것이다. 해인사도 창건 당시 그대로가 아니다. 동양의 건축은 창조적 중창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대원군이 복원한 경복궁은 이태조의 경복궁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원형의 복원이 뜻이 있는 것이지 원래의 복원만이 외길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시의 복원은 유기체적 실체의 발견이면 되는 것이다.
경주 모두를 복원할 수는 없고 그러자는 것도 아니다. 역사적 실체로서의 경주를 부분적으로 복원하여 전체를 알게 하는 일만으로 충분하다. 새로운 로마를 시도하였던 아드리아누스의 도시 역시 5퍼센트 미만의 발굴로 전체의 틀을 밝혀내고 있다. 황룡사를 복원하는 것은 우리의 원형 공간을 지상에 다시 있게 하려는 일이다. 박물관의 우물만으로는 세계에 우리를 드러낼 수 없다. 우선 원형의 도면을 그리는 작업이라도 시작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