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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생사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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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곁의 부처 - 장휘옥 1996년 07월 173호
(장휘옥님은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화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및 동대학원 석사 과정을 졸업하고 동경대학에서 인도철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저서 「해동 고승전 연구」와 「불교학개론 강의실」 번역서 「대승기신론 이야기」「중국 불교사」「화엄경이야기」등의 책을 냈다.
사후 세계에 대한 문제는 전 인류 공통의 관심사이다. 고대 인도인들은 인간의 사후 운명
에 대해 육체는 죽음과 함께 없어지지만 영혼은 불멸하여 사후에도 어떠한 형태로든 살아남
는다고 생각하였으며, 이러한 관념은 차츰 윤회설로 발전해 갔다. 윤회輪回의 원어 삼사라 Samsara는 ‘흘러가는 것’, ‘돌아돌아 만나는 것’을 의미하는데, 중생이 태어나고 죽고 다시 태어나고 하는 것이 수레바퀴 굴러가는 것과 같다고 해서 ‘윤회’라 번역하였다.
고대 인도 사상에서 윤회의 주체와 인과응보의 사상이 명확하게 나타난 것은 우파니샤드
시대(기원전 800∼500)에 확립된 ‘오화설五火說’과 ‘이도설二道說’이다. 오화설이란 화장한 연기와 비가 내리는 현상을 결합해서 인간이 이 세상에 되돌아오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인간이 죽어 화장하면 그 영혼은 연기를 따라 올라가 달(月)로 들어가고, 비가 되어 지상에 내려와 쌀이나 보리 같은 식물에 홉수되며, 남자가 이 곡물을 먹으면 정자가 되고, 마지막으로 모태에 들어가 다시 태어난다고하는 원리이다.
오화설에서 발전한 이도설에는 신도神道와 조도祖道의 두 가지 길이 있다. 깊은 고행을 한 이는 이후에 화장의 불꽃을 타고 천계天界에 이르고, 신계神界를 포함한 여러 세계를 돌다가 브라흐만의 세계로 가서 재차 되돌아오는 일이 없다고 한다. 이것을 신도라 한다. 이에 견주어, 제사를 지내고 많은 선행을 닦은 이는 사후에 화장의 연기와 함께 천계에 이르고, 조상의 영혼이 모여 있는 세계 둥 여러 곳을 거쳐 달에 이르는데, 이 곳에서 선행을 한 과보만큼 머물다가 그것이 다하면 다시 비가 되어 지상에 내리고, 쌀이나 보리와 같은 곡물에 섭취되며, 남성이 이 곡물을 먹으면 그 영혼은 정자가 되어 모태에 들어가 재생한다고 한다. 이것이 조도이다. 그러나 악업을 지은 이는 그 어느쪽에도 들지 못하고 제 삼의 장소에 태어난다고 했다.
오화설과 이도설에는 윤회와 업보사상과 윤회가 끝나면 불사不死를 얻을 수 있다는 관념도 나타나 있다. 이러한 업과 윤회사상은 숙명론적인 이해를 강요하지만, 한편으로는 현재의 선행이 내세의 행복으로 이어진다는 희망을 주었다. 그러므로 우파니샤드시대 이후로 이 사상은 급속히 발달하였으며, 인도의 여러 철학파에서는 개인 존재의 본질은 아트만(我)행이나 또는 이것과 유사한 실체로서, 이 실체가 업을 짊어지고 윤회한다고 설하였다.
업과 윤회사상은 불교에도 채용되어 불교도의 생활 속에 정착되어 갔다. 석가모니는 인간의 사후 운명에 대해 말하는 것을 거부(無記)했기 때문에 특별히 윤회에 대해 설하지는 않았지만, 스스로를 업론자業論者라 하고, 인간의 가치는 행위(業) 여하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 것은 불교에 윤회와 업사상을 정착시키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불교에서는 윤회의 세계로서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육도를 설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가운데 지옥, 아귀, 축생 이 셋은 악업에 의해 태어나기 때문에 삼악도三惡道라 하고, 그 곳에 태어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을 기회나 능력이 없다고 한다. 이에 대해아수라, 인간, 천상의 셋은 선업에 의해 태어나기 때문에 삼선도三善道라 한다. 불교에서는 천상도 윤회의 세계로서, 천상에 태어나 그 업이 다하면 다사 다른세계로 옮겨가야 한다. 따
라서 천상에 태어나는 것은 불교가 목표로 하는 열반과는 다른 것이며, 열반 곧 해탈의 경계는 이것을 벗어나서 위쪽에 있다고 한다.
불교에서 업과 윤회를 논할 때 늘 문제가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아’ 를 부정하는 무아설과의 관계이다. 그 때문에 인도 불교 사상사에서는 무아설과 업을 짊어지고 윤회하는 주체와의 모습을 밝히는 것이 하나의 큰 테마였다. 윤회의 주체에 대해 부파불교에서는 무아설을 존중하면서도 행위나 윤회의 주체가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독자부에서는 푸드갈나(補特伽羅)를 상정해서 그 본체는 오온과 같지도 다르지도 않다고 하는 비즉비리온非郞非籬蘊의 아我를 주장하였, 화지부는 해탈에 도달하기까지 지속하는 특별한 원리인 ‘궁생사온窮生死蘊’, 경량부는 무한한 과거로부터 계속적으로 존속, 화합하고 있는 미세한 의식意識인 ‘일미온一味蘊蘊(種子)’을 상정하여 이것을 업과 윤회의 주체로 삼아무아설과의 모순을 해결하려 하였다. 설일체유부의 「구사론」에서 설하는 중유中有(冥界) 도 이러한 경향을 띤 교리이다. 중유란 죽는 순간의 존재(死有)에서 다음에 다시 태어나는 순간인 생유生有의 중간에 있는 존재로서, 미세한 오온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이것은 다시 태어나는 주체이고 영혼에 지나지 않는다. 중유는 중음中陰라고도 하며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토착신앙과 습합하여 중음법요, 칠치재(사십구재), 일주기, 삼주기 등으로 발전하였다. 이들은 어느 것이나 궁극적으로는 의식을 지속시키는 주체를 실체로서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불교의 무아설에 위배된다.
무아설에 위배되지 않으면서 실체로서가 아닌, 더구나 업을 짊어지고 윤회하는 주체를 구해 온 인도불교는 드디어 유가행파의 유식설이 제시한 아라야식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은 경량부의 ‘종자 설이 발달한 것으로서, 의식보다 더 깊은곳에서 생사윤회를 계속하는 한 언제나 활동을 전개하는 근본적인 마음에 있다고 간주하고, 이것을 제8식, 곧 아려야식이라 하였다. 아라야식은 몸속에 잠재하여 몸을 생리적으로 유지해 가는 근원적인 마음이다. 다시 말하면 몸의 구석구석까지 퍼져 있으며, 깨어 있든 잠자든 언제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 활동을 계속하여 몸을 부패시키는 일이 없이 유지해 가는 마음인 것이다. 그러나 아려야식은 개인 존재의 주체이기는 하지만 본래 찰나에 생하고 찰나에 멸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상주불변하는 실체로서의 자아(아트만, 我)와는 본질을 달리한다.
아라야식은 일명 일체종자식이라 하는데, 그것은 신, 구, 의 삼업이 종자가 되어 머무르는 장소이기 때문에다. 과거 업의 결과가 종자가 되어 아라야식 속에 저장되고, 이 종자는 아라야식 속에서 성장, 발달하며, 새로운 연緣을 만나면 다시 새로운 업이 되어 싹을 내고, 그 업은 다시 새로운 종자를 심는다. 이같이 과거의 습관력을 내면에 품은 잠재의식, 곧 아라야식에서 자이적으로 주객이 대립하는 현상세계가 만들어지는데, 이를 소위 고통으로 가득찬 윤회의 세계라 한다. 따라서 이 아라야식이 불지佛智로 바뀌어 주객의 대립이 일어나지 않을 때 깨달음이 성취되는 것이며, 윤회의 세계를 벗어나 영원한 해탈을 얻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