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꿈꾸는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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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윤구병
1996년 07월 173호
참 미안한 이야기 하나.
만행 기간을 틈타 송광사에서 스님이 오셨는데, 연락 없이 불쑥 나타나셨겠다. 풀짐 한 지게 지고 땀 흘리며 산너머 왔더니 눈 맑은 납자 한 분 마당가에 서성이고 있어서 먼저 내 누추한 방에 들어가 기다리라 해 놓고 손발 씻으며 무슨 말을 할꼬.
방 안에 들어섰더니 결가부좌하고 삼매에 들어선 모습이 참 보기 좋아. 그래서 옛 스님들 흉내내서 대갈일성 했지.
“지금 시골에서는 강아지 손이라도 빌려야 할만큼 바쁜 터에 헐렁한 소매 자락 털럭이며 한가하게 놀러다녀? 네 이놈. 송광사도 예전에 큰 지주여서 본사 말사 합하면 부치는 땅이 수천 수만 평은 될 터인데 면벽 참선한답시고 그 논밭 모두 소작인들에게 맡겨 공짜로 도조 받아 먹고 살면서 이 바쁜 철에 할랑거리고 나타났으니 너 같은 놈은 대매에 패 죽이는 게 마땅하다. 언감생심 내 곡식 축내고 내 잠자리 어지럽히려고 뻔뻔스럽게 온단 말이냐. 당장 썩 꺼지지 못하겠느냐?”
법력이 없으니 말에 무게가 실리지 못해 당장 달아나게는 못했지만 이튿날 새벽에 몸 돌이켜 보니 사라지고 없어. 거참, 먼길 오셨는데.
‘공동체’? 그런거 없어 ‘실험학교’? 그것도 거짓말이야. 나 속이고 세상 속이는 짓 밥먹듯 해 온 습이 남아해 본 사탕발림이지.
공동체는 나 어렸을 적에 자라던 마을 모습이고 실험학교는 그 안에서 놀던 내 모습일 따름. 처음에는 ‘실험학교’가 중심에 있는 ‘새로운 공동체’가 어쩌고 하면서 입에 거품을 물었지. 그런데 ‘실험학교’라? 이 말 틀려먹었어.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꿈꾸는게 실험학교가 아니라 지난 이백 년 사이에 온 세상에 암처럼 퍼진 제도교육 기관이 죄다 실험학교야. 실험실에서 이루어진 그 동안의 교육이 잘못되어 지금 사람들은 자기도 죽고 다른 생명
체들도 파묻을 커다란 무덤을 파고 있는 셈이지. 이 실험 이제 빨리 걷어치워야 해. 그리고 공동체가 뭐야. 살림터는 어떤 살리터든 공동체라고 봐야해. 사대가 모여 이룬 우리 육신도 따지고보면 공동체야. 지금세계 인구의 열 배도 넘는 세포들이 모여 내 몸뚱아리라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어. 그 대단한 공동체도 제대로 못 살리는 터에 소꼽장난 하듯이 조그마한 생산 공동체를 이루는 게 뭐가 대단해?
그래도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있어 보아 하니 온 세상이 불타고 있어. 우리 식구 가운데 누군가 그래. 딴말 집어치우고 ‘앗 뜨거, 앗 뜨거’하면서 펄쩍펄쩍 뛰는 모습을 보이는 게 진실에 가깝지 않겠느냐고. 왜 아니야 그래서 ‘내가 졌다’하고 꼬리를 사렸지. 지난 이백 년 동안 교육을 그 꼴로 만들고 마올 공동체의 기둥뿌리를 뽑아 사람을 내 몸 뒤에 도시라는 콩나물 시루에서 웃자라게 한 놈 정체가 뭘꼬. 흔히들 자본주의입네, 상품 경제 사회입네 하지만 옷차림이 그렇다 뿐이지 그게 알몸은 아닌 것 같아. 사회주의 사회라해서 뭐 다를 게 있어? 그래 곰곰 생각해보니 이놈이 바로 ‘만드는 문화’라는 놈이야. 옛날이라고 해서 ‘만드는 문화’가 없었나하면 그건 아냐. 있긴 있었지. 그리고 살림에 큰 몫도 했지. 그러나 옛날에는 오늘날처럼 ‘만드는 문화’가 사람살림을 쥐고 흔들지는 못했어. ‘기르는문화’의 울 밑에 핀 봉숭아 같은 것이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지난 이백 년 사이에 이 관계가 뒤집혀 버렸어. 그게 뭐가 문제냐고?
왜 문제가 아냐? ‘만드는 문화’에서는 새 것이 가장 좋은 것으로 통해. 오래된 것은 낡은 것,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 유행에 뒤진 것, 빨리 폐기처분해야 손해를 덜 보는 것으로 보이지. 그래서 오늘 새 것이 나오면 어제 만든 것이라도 쓰레기가 되어버리는 게 ‘만드는 문화’의 특성이야. 자본주의 상품 경제의 유지를 위해서 어쩔 수 없다고, 생산력의 무한한증대를 통한 무한한 욕구의 무한충족이라고도 미화되지만 결국에는 물질뿐만 아니라 생명의 세계, 마침내는 인간까지 쓰레기로 바꿔버리는 게 ‘만드는 문화야.
‘기르는 문화’는 달라. 기르는 문화의 숨은 주체는 자본이나 생산력이 아니라 자연이야. 자연에는 쓰레기가 없어. 버릴 게 없다는 말이지. 잡초? 해충? 그런거 없어 사람의 비뚤어진관념이 그렇게 보도록 하는 거지. 실제로 농사지으면서 보니까 밭에 자라는 풀 가운데 먹을 수 있는 풀과 약초 아닌 것이 없더라고. 생명공동체의 유기적 조화가 깨지니까 어떤 곤충이 해충으로 보이는 것 뿐이야.
자 사정이 이러니, ‘만드는 문화’에 중심을 둔 현대문명이 인간뿐만 아니라 생명 공동체 전체를 ‘동타지옥’ 으로 끌어들이려고 하고 있으니, 여기서 벗어나자. 다시 ‘기르는 문화’의 숨은 주체인 자연을 스승으로, 벗으로 모시고, 햇빛이, 물이, 바람이 ,흙이, 그리고 그 안에 사는 모든 생명체들이 그렇듯이 우리도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것들과 나누고 서로 섬기는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를 이루어보자. 그러려면 ‘만드는 문화’의 중심인 도시에서 벗어나 ‘기르는 문화’의 중심인 기초생산공동체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기초생산공동체도 지금 죄다 허물어져 내려 과거를 상징하는 노인들만 있을 뿐, 현재와 미래를 보장하는 젊은이와 아이들이 없다. 죽어가는 마을공동체에 새 피를 수혈하여 되살려내는 길밖에 달리 인류도 다른 생명체들도 살아날 길이 없지 않느냐―대체로 이런 뜻에서 자연의 품 안으로 들어와 사는데, 막상 들어와 보니 내가 참 우스워. 마치 강보에 싸인 어린애처럼 무력하기 짝이 없는거야.
길가에 돋아 있는 풀 이름 하나 제대로 아는 게 없어. 숲을 이루는 그 많은 나무들의 이름이며 쓰임새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바닷가에 나가도 마찬가지야. 담치와 홍합의 차이도 처음에는 몰랐어. 올콩은 감꽃 필 때 뿌리고, 메주콩은 감꽃 떨어질 때 심는 게 이 마을 어른들이 오래 두고 경험으로 쌓은 지혜의 산물인데 지난해에는 책만 보고 심었다가 너무 일찍 심는 바람에 키만 웃자라고 열매는 맺지 않아 큰 낭패를 보았어. 이러니 ‘실험학교’ 인지 ‘공동체 학교’인지 하려고 해도 자격이 있어야 하지. 과거에 ‘만드는 문화’에서는 꽤 유능한 선생이었을지 모르지만 ‘기르는 문화’에서는 선생으로서 낙제감이야. 이런 딱할 데가 있나. 요즘 내 형편이 이래. 이제 이야기 끝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