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그늘에 드리운 총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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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만우(시인)
1996년 07월 173호
숲을 바라보면 늘 떠 오르는 싯구가 하나 있다.
임간난주효낙엽 林間暖酒燒落葉
“숲 속에서 단풍잎을 태워 술을 데운다”는 뜻이다.
낙엽 가득한 숲에 앉아, 단풍잎으로 데운 술을 마시고 단풍빛 얼굴로 숲과 하나되는 멋부림. 그 숲에 푸른빛이 가득한 계절이다.
요즈음 숲에서 기장 먼저 연상되는 단어는 그늘이다. 그늘은 어두운 일면 때문에 부정적인 의미로도 쓰이지만 숲을 찾고 이해하는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이다.
하늘과 땅으로 대비되는 제현상의 양극이 절묘하게 조화되는 곳에 그늘이 있기 때문이다.조화의 상실을 뜻하는 황량함, 고독, 사막 등은 그늘의 상실을 의미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숲이 없어지면 하늘이 황폐해진다고 하였다.
나무를 한 그루 자르면 그 부피만큼의 하늘이 황폐해지고 그늘이 사라진다. 따라서 그늘은 존재의 현재성. 곧, 균형과 조화를 위해 끊임없이 흔들리는 운동에 다름아니다. 밝고 어두움에 의해 형상화되는 일체 존재는자기 부피의 그늘을 가지고 있다. 그늘을 가진 뭇생명들이 그늘을 통해 전재 가치를 가늠해 보고 자신의 가난한 그늘에 대한 연민들이 모여 커다란 그늘을 이루어 놓은 곳이 숲이라 하겠다. 가시적 존재이든 불가시적 존재이든 그들만의 그늘이 있다면 그 그늘들이 모여 있는 곳은 모두 다 숲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의 집단을 상정하는 언어를 우리는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유교적 집단을 상징하는 유림儒林이나 사림士林, 불교적 집단을 상징하는 치림緇林이나 총림叢林 따위가 그것이다. 제 각각의 그늘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숲으로 자리한 곳, 그 곳에 너와 나는 서 있는 것이다.
존재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를 일체 존재에 침투시켜 각기 다른 형태의 그늘을 하나로 통합해서 아름다운 만남의 장인 화엄의 세계를 열어보인 분이 부처라면 부처의 의미는 “숲을 본 사람”이 아닐까. 적정처로서만 숲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뭇생명들이 정말 꽃처럼 어울려 있는 숲을 보고 연기의 법칙을 깨달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숲의 의미를 표상으로 삼고 있는 집단은 숲을 바르게 보는 바른 견해(正見)가 근본이 되어야한다.
총림이라는 아름다운 언어를 지켜낸 사람은 누굴까. 얼마만한 부피의 그늘을 가진 사람이 있기에 우리는 아직도 그 그늘 속에 있는 것일까. 이런 상상과 추론은 역시 그늘에 앉아서 하는게 제격이다. 그것도 낙엽을 태워 술을 데우는 그 숲 그늘에서...
모듬의 총체적 의미가 숲이라면 숲의 생명은 하나됨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뉘면 나뉠수록 숲의 생명력은 약화된다. 그늘을 없애면 숲은 나누어진다. 다시 말해 그늘의 부피가 작아질수록 경계가 많아진다는 뜻이다.
둘러보면 셀 수 없이 많은 작은 숲들에 우리는 둘러 싸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서로 다른 이념과 행동수칙을 표방하고 있는, 그늘도 없는 깃발의 숲에 우리는 놓여 있다. 현대사회의 특성 가운데 하나가 전문화, 해체화라면 그 동안 우리는 함께 가는 길이 아니고 나만의 길을 닦기에 열중하고 있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각기 다른 이념과 업을 갈고 닦아 차츰 작아지게 한 것이 아니라 차츰 극대화시켜 오고 있었던 것이다. 전문화는 이념과 업의 비대화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전문성만을 강조하는 사회 구조 안에서는 철저하게 부품화되지 않으면 존재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집단의 이념과 업에 기능하지 못하는 사람은 오히려 그늘을 거부하는 자폐증 환자가 될 수밖에 없고 자유로운 생각도 용납하지 않는, 정말 그늘은 없고 땡볕만 있는 사막을 낳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총림의 일차적 의미인 숲들의 모임은 분할된 숲 속에서 고통 받고 뭇 삶들의 경계를 없애고 숨통을 튀워주는 것이다. 그 경계마다에 그늘지게 하고 마침내 하나의 숲으로 자리하게 하는 것, 그것이 숲과 숲이 모여 하나의 숲이 되는 총림의 의미일 것이다.
또 하나는 그늘이 아닌 숲의 살림살이다.
“숲은 잠들지 않는다”라는 소설의 제목처럼 숲은 결코 잠드는 법이 없다. 그러나 늘 잠들어 있다. 이것은 역설적인 논리가 아니라 실제적인 숲의 모습이다. 숲은 무수한 생명체들의 집합지로, 흔히 말하는 생물과 무생물이 혼재된 상태의 풍경을 숲이라 일컫는다. 저마다 다른 길이의 호흡과 순환기를 지닌 뭇 생명들의 서식처 반쯤은 낮에 깨어 있고 반쯤은 밤에 깨어 있는 살림살이들이 어울려 있는 곳, 그래서 잠들어도 잠들지 않는 곳이 숲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의 절반이 야행성이라면 설명이 쉽겠다. 그래서 숲은 인간의 관점만을 용납하지 않는다. 보통 낮에 깨어 있고 밤에 잠드는 인간의 사고로 숲을 대하면 숲은 바로 그 대가를 지불한다. 정복의 대상으로 파괴의 대상으로 숲을 대하면 물을 거두고 맑은 공기를 거두고 그늘이 없는 황폐한 사막을 그 대가로 지불한다. 인간의 호홉만이 절대적이라는 단세포적 사고가 빚어낸 황량한 문명사의 한 점에 지금 우리는 서 있지 않은가 다른 생명이 호흡을 멈추면 나 또한 살아 숨쉴 수 없음을 숲은 늘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화합이 절대 덕목인 승가집단의 표상인 총림에서 독단이나 일방행동은 계율의 첫째 자리에 있는 “살생을 하지 마라”를 깨뜨리는 것이다. 숲은 주재자가 없다. 용납하지도 않는다. 단지 그늘에 다른 존재들이 모여 하나의 그늘을 형성하고 있을 뿐이다. 근현대 정치사에서 독단과 독주가 얼마나 우리를 황폐하게 만들었는지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선거를 치루고 나면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기도 하지만.
요순의 정치가 절대적 모범은 아닐지라도 천하를 순행하면서 지금의 임금이 누구냐 물으니 왜 그것을 알아야 하느냐는 현답에서 숲의 아름다운 살림살이를 엿볼 수 있다.
총림은 서로를 경책하는 작은 죽비가 필요할 뿐이지 칼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목우자가 있어야 할 곳에 도살자가 있으면 남을 죽인 칼이 마침내 자신을 찌를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 황폐한 하늘을 다시 풍요롭게 하려면 많은 시간과 힘이 필요하듯이 총림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걸고 있는 승가는 문중이나 다른 이기심 때문에 숲을 분할해 만날 수 없는, 그늘이 없는 사막을 만들면 안 되겠다. 숲이 숲다울 때, 천하에 큰 그늘로 자리할 때 비로소 도량인 것이다.
사실 땀샘 깊이의 안목으로 총림의 세계를 논한다는 것이 망상이겠지만 아름다운 윤회를 꿈꾸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망상은 또 다른 세계에 대한 밑그림 역할도 한다. 망상이 구체적이든지 추상적이든지 망상 밖의 풍경을 낯설어 하는 사림들은 그늘과 그늘을 합쳐 그 그늘에서 쉬고 싶어하는 것이 그 망상의 본래 모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