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는 신세계” 에서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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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신경림
1996년 07월 173호
“여기에는 참으로 많은 멋진 인간들이 있구나! 인간은 정말 아름답구나! 이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아아 멋진 신세계여!”
이것은 셰익스피어 말년의 몽환적인 희곡 ‘템폐스트’에서 주인공 미란다가 혼자서 하는 말로, 올더스 헉슬리의 반유토피아 소설‘멋진 신세계’의 표제가 되어 더욱 유명해졌다. 나는 오늘 우리가 사는 모습을 보면서 종종 이 말을 떠올리곤 한다. 물론 역설적인 뜻에서다. 사실 겉만 보면 우리 사회는 멋진 인간들로 너무 넘치고 있고 인간들로 너무 넘치고 있고 이런 멋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우려 사회는 그야말로 “멋진 세계”다. 어느새 국민소득은 만불을 넘어섰고 경제 규모나 무역규모는 세계에서 열손가락 안에 들어간다. 승용차는 다섯 집에 한 대 팔, 전화는 없는 집이 없으며 산골은 말할 것도 없고 절해고도까지 전기가 들어간다. 텔레비전이나 냉장고 등 가전제품의 보급도 구미와 일본 등 선진국을 제하면 으뜸이며 컴퓨터 보급은 오히려 구미를 앞지르고 있다. 먹을 것은 집집마다 넘쳐서 음식 쓰레기가 골목을 메우고, 입을 것 신을 것이 지천이어서 어느 한 구석 터져도 꿰맬 생각 않고 내다버린다. 돈들이 너무 남아 돌아 많은 사람들이 홍콩이나 대만 또는 북경까지 쇼핑 나들이를 하고, 국내에서 만드는 침대는 몸이 배겨 아예 질좋은 대리석 침대를 유럽에서 들여다 잔다. 더구나 2002년 월드컵을 일본과 공동으로 유치하여 그 경제적 순익이 줄잡아 2조에 이르며, 월드컵을 치르고 나면 국민소득은 2만불에 달하게 된다. 어쩌 “멋진신세계”가 아니랴.
실제로 외국에 나가보면 우리 국력이 커졌고 과연 우리가 잘사는구나 하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웬만한 나라치고 우리나라 사람 가지 않는 나라가 없으며, 한국요리 먹을 수 없는 나라가 없고, 코리아에서 왔다하면 괄세하는 나라도 없다. 공항이나 큰 역에서 한국 기업 광고를 보는 것도 그다지 신기한 일이 아니며 거리에 굴러가는 차 가운데에서 한국차를 발견하는 것도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돌아다니면서 가장 잘 먹고 돈 잘 쓰는 것도 한국인들이다. 그만큼 돈이 남아돈다는 얘기다. 국민소득의 증가와는 관계없이 빈부의 격차는 더 심해지고, 아직도 산동네에 가면 한 집에 서너 세대가사는 것이 예사요 공중변소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발을 동동구르는 사람들을 흔하게 보는 것은 둘째로 몇 만원의 자식 고둥학교 등록금을 구하지 못해 자살하는 부모 얘기가 심심치 않게 신문에 실리는 현실과는 별도로 말이다. 미국이나 일본의 만만잡이로 빚은 세계에서 몇째가고, 국회의원들은 대통령병이 든 사람의 앞잡이로 나라 살림을 할 생각은 뒷전으로 툭하면 두발부리나 하고, 목이 아프고 눈이 쓰려 견딜 수 없을 만큼 물과 공기는 더렵혀지고, 방송과 신문은 날마다 살인, 강간, 강도의 끔찍한 소식을 전하지만, 우리가 옛날에 비해, 20년, 30년 전에 비해 말할 수 없을 만큼 잘 살게 된 것만은 확실하다. 이를 인정않는 것은, 88올림픽 전에 올림픽은 성공해도 멍하고 실패해도 망한다고 했던 운동권 일부의 공언처럼, 벽창호의 속알머리 없는 심술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이 전체적인 풍요, 일부는 여기서도 소외되어 있지만, 이 “멋진 신세계”가 지금 이 곳에 사는 우리들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느냐 하면 아니다. 감히 말하건대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다고 나는 생각한다.
조급하게 만들어진 이 풍요는 빠르고 넓은, 이른바 산업화를 넘어선 정보화에 의해서 뒷받침되며, 급속한 정보화는 우리 모두를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말하고, 똑같이 행동하는 똑같은 형태의 삶으로 내몰고 있다. 사람들은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몸짓으로 걸으며 규격화된 집에서 먹고 자고 심지어 성생활조차 매스컴에 의해서 규격화된다. 서로 비슷비슷한 음식을 먹고 남들이 읽었다는 비슷한 책을 찾아 읽으며 남들이 좋다는 비슷한 영화를 본
다. 방송국도 남이 본다면 같이 보아야 하고 남이 들여놓은 에어컨은 기를 쓰고 들여놓아야 직성이 풀린다. 그러잖아도 남이 하는 일이면 덮어놓고 따라하기를 좋아하는 민족이다. 오죽하면 단재 신채호丹齋 申宋浩가 “한사람이 떡장수로 득리得利하였다 하면 온동네에 떡방아소리가나고, 동편집에 술 팔다가 실리失利하였다 하면 서편집의 노구도 용수를 떼어들이며, 나아갈 때에 같이 와하다가 물러날 때에 같이 우르르하는 사회가 어느 사회냐”(問題없는 論文) 하고 통탄했겠는가. 위컴이 미 8군 사령관 당시 광주사태의 귀결을 말하면서 우리 국민성을 이리 몰리고 저리 쫓기는 들쥐 떼에 비유한 것도 발끈할 일만도 아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좀 심한 부분이 있지만 정보화 시대의 인간의 보편적인 성향일 터이다.
정보화는 마침내 헉슬리가 역설적으로 말한 것과는 조금은 다른 “멋진 신세계”를 이룩했지만, 이 속에서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것은 우리는 먹고 자는 것 외에 말하고 사고하는 것을 조건으로 가진, 바로 사람이기 때문이다. “멋진 신세계”는 먹고 자는 것은 충족시키지만 그 밖의 것은 충족시키지 못하므로 반의 행복밖에 가져다 주지 못한다. 말하고 사고하는 것은 혼자서 하는 것이다. 남을 빼서 남과 함께, 나아가서 남의 조작에 의해서 말하고 사
고한다면 그것은 진짜 말이나 사고는 아니다. 따라서 말하고 사고한다는 것은 개인의 발견이요 나의 발견이다. 오늘 이 풍요속에서 우리가 진실로 행복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개인을 잃어버린 까닭이요, 나만의 말, 나만의 생각을 잃어버린 까닭이다. 내가 행복하지 못할 때 이 사회가 살맛나는 세상이 되지 못함은 말할 것도 없다. 한편 이 “멋진 신세계”를 전면 부인함으로써 행복을 찾으려는 노력은 너무 큰 것에만 매달려 한꺼번에 모든 것을 바꾸고 한꺼번에 모든 것을 얻으려 한 것이다. 작은 변화, 작은 승리는 눈에도 없었다. 사회주의의 몰락은 이 노력의 헛됨을 일깨워주는데, 나의 말 나의 생각 없이 큰 것이 얻어질 수 없음은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제 ”나’를 발견하는 일이 중요할 때가 되었다. 밖으로 쏠렸던 눈을 안으로 거둘 때다. 내가 누구인가, 나에게는 무슨 역할이 맡겨져 있는가,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이것들을 깊이 탐구한 다음 우리 눈을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로 돌릴 때, 우리는 우리가 함께 사는 행복하고도 신명나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