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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암 대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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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김영옥 1996년 07월 173호
지난4월 29일, 수원의 봉녕사에서는 애틋한 아쉬움 가운데, 번다하지는 않으나 살뜰한 정성이 밴 두 분 강사의 퇴임식이 있었다. 십 년을 넘게 학인들을 가르쳐 온 대우스님과 또한 분을 떠나 보내는 자리였다.
기름진 꽃잎을 달고 있는 목단이 절정인가 했더니, 어느새 불두화도 탐스런 꽃송이로 벙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곧 지는 모습 보여도 내년 봄이면 어김없이 피어 다시 만나게될 것처럼, 보내는 사람은 잠시 다녀오시라는 “이임식”이었다. 그러나 떠나는 태우스님은 ‘퇴임식”임을 마음으로 다지고 있었으니, 이 고집쟁이 스님의 새삼스럽기조차 한 선방행을 막을 수는 없어 보였다.
예식 내내 사회자가 ‘퇴임식”이 아닌 ‘비임식”으로 표현했던 이런 자리는 한 강원에서 십 년 넘게 강사 노릇을 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으나, 정식으로 예를 갖춘 행사로서 회향을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산중이라고는 하나 사람 사는 데이고 보면, 이런저런 까닭으로 안팎의 아쉬움을 남긴 채 끝을 내는 경우가 많아 그의 회향은 더욱 보배롭다.
학장인 묘엄스님은 네 해만 더 함께 살자고 그의 옷소매를 붙들었으나 그의 마음까지 붙들지는 못했다. 오히려 늦어졌다고 그는 생각한다. 강사 노릇을 시작하면서 막연하나마 ‘십 년만’싶었었고, 구체적으로 떠날 마음을 먹은 것도 몇 해 전일이었다. 그러한 심사는 꿈으로 가끔 나타났다.
생과 사가 있다 하나 나날의 삶에서야 사死가 있기 힘들다. 중생은 또 그런 줄로만 알고 미혹되어 하루하루를 헛되이 꾸려 나간다. 생과 사가 둘이 아닌 이치를 진정으로 깨치게 되었을 때 도인이라 일컬어질 것이다. 그런데 대우스님의 꿈 속에 생과 사가 하나로 압축되어 나타났다. 소스라쳐 일어나 앉았다가 아침예불을 걱정하며 다시 잠을 청했다. 그러나 눈 뜬 아침에는 그 끔찍한 느낌이 다시 재현되지 않았다. 애를 써도 안 되었다. 그 일이 몇 번 되풀이 되자 그는 그것을 재발침의 계기로 챙기게 된다. 지난해는 바랑까지 정리했으나 둘도 없는 도반인 일연스님이 동학사로 먼저 떠나는 바람에 발길이 늦춰졌다.
열두 해 전, 내심으로는 묘엄 강주 스님에게 율장을 배울 욕심으로 이 곳과 인연을 맺은 뒤로 치문과 사집 , 사교를 가르쳤다. 대중으로부터 재미없고 딱딱하다고 내침받기 일쑤이나 그에게는 가장 즐거이 읽히는 경전인 능엄경, 그리고 기신론과 금강경을 가르쳤다.
지금과는 달리 대우스님이 동학사 강원에 다닐 때만 해도 비구니 강원의 수학 연원이 칠 년이었다. 동학사 강주인 호경스님이 “강사자리를 보장받게 되는 코스”인 재독을 권할 만큼 강원 시절을 성실히 보냈다고는 하나, 가르치는 일은 까마득하기만 하여 강사로 부임된 초가에는 하루 한두 시간의 잠밖에 자지 않는 등 혹독한 준비 과정을 거쳐야 했다. 선방 입승을 살려면 초견성은 해야하고, 강원의 강사 노릇을 하려면 물미가 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의 제접 방식 중에 그의 은사 스님인 호관스님에게서 배운 것은 필요할 때는 가차없이 호되게 몰아친다는 것이었다. 법주사 말사인 가섭사에서 세 해 동안 혹독한 행자살이를 할 때에는 스승에 대한 야속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냉정하기 짝이 없고, 암만 애 써도 칭찬커녕 일 못한다고 욕만 거마리로 얻어먹고, 혼자하는 행자살이라 누구한테 하소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울음을 삭여야 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이 지금껏 대우스님을 버텨 오게 한 가장 큰 버팀목이 되고 있음을 그가 잘 아는 까닭에서이다. 강을 바칠 때 더듬거리는 학인에게는 백오십 단구에서 나오는 소리로는 믿을 수 없도록 큰 목소리로 학인들을 내몰고는 했다.
그러나 엄하고 호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의 방문은 늘 열려 있었다. 탐해 본 것도, 길게 지녀 본 것도 없이 살아온 그가 유일하게 집착해 모으는 갖가지 다기를 전 벌여 놓고 앉아 찾아오는 학인들에게 손수 차를 우려 주고, 양음악도 들려 주고, 어쩌면 체통 없어 보이도록 담아 두는 법 없이 속마음을 털어놓아 보임으로써 사제지간이 아닌 사형사제간이 아닌가 싶게도 했다.
그러나 그 스스럼 없는 관계를 통해서 그가 몸으로 일러 준 것은 계율에 대한 엄정한 마음가짐이었다. 삼학 가운데서도 계를 가장 근본된 것으로 삼으니, 계가 부실하면 모래위의 집처럼 정도 아니 되고, 혜는 불가능하다고 그는 믿는다. 그의 계에 대한 마음가짐은 아주 소박한 것이라 일쑤 무셔되는 것에서부터 비롯된다. 고불 조주가 남긴 화두 가운데 “대도통장안大道通長安”은 가장 단순하지만 이 시대에 가장 절실한 것일 터였다.
그가 불법을 물은 제자에게 손으로 울타리 밖을 가리키며, 큰 길이든 작은 길이든 모두 서울 장안으로 통하듯이, 부처에의 길은 울타리 너머에 있는 작은 길에서부터 첫발을 내디녀야 한다는 것이었으니, 중국의 선사 건봉이 눈앞이 곧 길이니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하라(眼前問郞是道路)는 말씀과 한뜻이 된다. 도가 암만 높다 하더라도 드러나 보이는 것은 행으로 나타나는 모습일 터임을 그는 굳게 믿고 느슨해지는 법이 없다. 계율에 대한 큰 전수자는 못 되더라도, “열심히 지키는 한사람’은 되려고 애쓴다.
율에 대한 그의 관심은 동학사 강원을 갓 졸업한 뒤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원을 졸업하고 선방을 전전하면서도 비구니 계살림하는 데는 빠짐없이 참석했다. 내원사에서 삼년결사를 하고 나와서도 서울의 진관사에서 열렸던 비구니 대상의 첫 계율 특강도 놓치지 않았고, 뒤이어 운문사와 봉녕사의 계율 특강에도 대중으로 참석했다. 쉰 권 남짓 되는 분량의 율장집을 한 질 사놓고 네댓 명의 도반과 함께 해인사의 일타스님에게 수학 허락을 받아두기도 했다.
비구 사찰과는 달라 비구니 사찰에는 아직까지도 율원이 없으니, 그런 식의 길 외는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타스님와 건강이 좋지 않아 그 계획도 무산되었다. 그럴 즈음에 봉녕사 계율 특강을 회향한 뒤에 묘엄 강주 스님과 인연이 닿게 된 것이다.
현재 운문사, 동학사, 봉녕사, 청암사의 네 개 비구니 승가대학 가운데서 전통으로는 개원 역사가 가장 오래된 동학사를 꼽고, 규모가 가장 크기로는 학인의 수효가 이백오십쯤 되는 운문사를 꼽는다. 학인이 백오십 명이 넘는 봉녕사는 규모로는 두 번째이나, 계율을 특히 중시하여 가풍이 엄격하기로는 첫손 꼽는 곳이다.
그 가풍 세우기를 주도해 온 학장 묘엄스님은 어쩌면 그에게서 “글자 가르치기”보다는 여법한 나날의 삶을 통해 몸으로 학인들을 가르쳐 주기를 더 기대했을 법했다. 묘엄스님의 기대는 어긋나지 않아 보였다. 계에 대한 엄정한 마음가짐에도 불구하고 천성이 맑고 고운 데다가 책말고는 지니는 것 없이 제것을 주위에 두루 넉넉히 베풀어 봉녕사의 천진불이 되었다. 수행의 길로 들었다고는 하나 아직도 습과 방자한 혈기로 가득한 미망을 깨쳐 주어야 하는 학감 노릇도 녹록찮을 터였음에도, 그 대중살이를 통해 늘 스스로를 경책하는 자세를 흐뜨리지 않아 학인들의 귀감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회향을 원만히 이루었다고는 하나 십여 년 동안의 교학 생활은 그에게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강사 생활을 청산하고 좌복 위에서 남은 “제 문제”를 해결하려는 그의 결행이 그런 것을 짐작하게 한다.
쉰을 바라보는 그의 법명처럼 그 일은 쉽게 보기에 “크게 어리석은”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사람이 깨달음에 대한 분상分相의 글을 놓고 깨달음에 이르려는 학인들에게 입으로만 가르치기” 란 그에게 “면구한”일이었던 듯하다.
앞에서 짧게 말한 대로, 그의 선방행은 초행이 아니다. 봉녕사 시절 이전에 동학사 강원을 졸업하고 난 뒤로 삼년결사를 포함해 십 년 세월 동안 오롯이 선방을 지킨 수좌였다.
대우스님은 속가의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불교 학자였던 아버지와 무남독녀로 오똑하니 둘이서만 지내다가 초등학교만 마친 열네 살 때에 법주사로 출가를 했다. 행자 시절을 보낸 뒤로 열여넓 살에 동학사 강원에 입학하고도 한참 지난 뒤까지도, 누가 저 아이 길을 들일까 싶게 기가 센 장난꾸러기였다. 그러나 그것은 속가 시절과 행자 시절을 모두 외톨이로 적적하게 보내고 난 뒤라 늘 대중이 그리웠던 참에, 보이는 것마다 새롭고 배울 것 투성이었던 새로운 생활에 대한 환희심의 색다른 표현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사교 과정 때에 유식본의 대가인 호경스님에게 능엄경을 배우면서 경전 공부에 빠져들게 된다. 당시 동학사 강주이던 호경스님은 국내에서 대학 과정까지 마친 뒤에도 일본 유학을 다녀 온 대강백으로서 지금 전국의 비구니 강사 스님들의 거의 모두가 그의 제자이다.
그러나 그의 재주와 애씀을 이쁘게 본 호경스님과의 재독 약속도, 말씀이 곧 법이었전 은사 스님의 만류도 뿌리치고 그는 선방으로 갔다. 그가 강원을 졸업한 뒤로 한 해 반쯤 동안 도봉산 자락의 금강암에서 오랜만에 은사 스님의 불사 일도 거들면서 자신의 의지를 다시금 확인하고 다짐한 뒤에 작정한 일이었다.
그때만 해도 선방에는 강원을 거치고 온 수좌가 드물 때였다. 비구의 선방이 그러했고, 비구니 선방은 더더욱 그러했다. 비슷한 승랍의 다른 대중에 비해 십 년 가까이 “분별만 키운 셈”인 마음을 닦고, 철철이 옷을 해 입히는 은사 스님을 둔 자신에 비해 초라한 남의 한 벌만으로 지내는 그들의 처신을 오히려 본보기 삼아 버리고 또 버리려 애썼다.
자복에 앉은 지 보름 만에 상기가 들었다. 경험과 연륜으로 공부 체계를세워 간 것이 아니라, 겉모습만으로 따라가려 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하더라도 그의 선방 초발심 때의 각오가 그러했던 것이다.
상기는 내생까지 가지고 가게 된다니 낭패였다. 큰방에는 앉아 있을 수도 없이 증세가 심해서 절을 하거나 공양간에서 나물을 다듬으면서도 자신에게 되뇌었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한다.”그렇게 일어서고 난 뒤에는 내원사에서 삼년결사를 시작했다. 근년 들어서야 삼년결사는 흔치 않은 일이 되었지만, 비구니 스님으로서는 최초의 일이었다. 열 명 남짓의 결사 대중들이 서로 격려하며 애를 썼다고는 하나, 삼 년 동안 일주문 밖 걸음을 하지 않고 정진한 일을 두고 “이룬 것이 없으니 꺼내 이야기하기조차 남사스러운 일” 이었다고 스스로 자평했다.
이제 다시 그는 그 무문관 안으로 들어가려 함다. 십 년 동안 선방을 지키던 수좌가 강원으로 왔을 때 학인들로부터 받았던 질문을 선방 수좌들로부터 또 받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우스님은 그 질문에 똑떨어지게 대답할 말이 없다. 부처님이 성불하시고 맨 처음 하신 말씀이 “희유하도다. 온 천하가 마치 진주 구슬을 뿌려 놓은 듯 하도다”란 것이었다. 아직 깨치지는 못했으나 그 자신에게도 부처님을 황홀하게 한 진아眞我라는 게 있다는 확신 한 가지 품었을 뿐이다. 확신도 쉽지 않을 터이지만, 제 몸을 벗어 내는 일도 부단히 애쓰고 또 애써야 한다는 다짐한 가지 지니고 있을 따름이다.
그는 요즘 오랜만에 느긋하다. 은사 스님과 함께 친정에서 정갈한 공양을 나누는 일도 새삼스레 따뜻하다. 그의 두번째 선방행에 또 한 번 펄쩍 뛰시는 은사 스님께도 웃음으로 대답한다. 조급한 마음은 들지 않고 그저 느긋하다. 결제철만큼은 죽기살기로 지키다 좌복 위에서 회향하고 싶은 소망은 소망대로, 산철이면 율장과 화염경도 짯짯이 짚어 보고 싶은 소망은 소망대로 두루 다 끼고 있다. 그러나 깊은 마음까지 한가하고 느긋하겠는가.
그는 봉정사에서 규율 밖으로 비져나가려는 학인들에게 “자기자신의 힘으로 얻은 자유, 정진히는 가운데 얻은 자유라야 그게 참자유”라고 타이르곤 했다. 그는 이제 그 타이름을 고스란히 자신에게로 되돌린다.

묶여 있지 않은 사슴이 숲속에서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 다니듯이 지혜로운 이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