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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토함산 불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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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풍광과 진경 - 이호신 1996년 07월 173호
이제 ‘세계문화유산’이 된 불국사는 석굴암과 함께 앞으로 그 생명을 영원히 이어가게 되는 것일까.
몇 해 전에 마련한 ‘경주화첩’을 들고 오르내리면서도 토함산 불국사는 뒷날로 미루자는 다짐이 지난 섣달 그믐께에 와서는 끝내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붓을 들었다.
한 선배와 함께 스님께 양해를 얻어 심우당 선정실에서 밤을 지새는데, 새벽 도량석 목탁 소리에 문을 열자 밖은 온통 천지간이 눈속에 파묻혀 있었다. 몇 해 동안 겨울 가뭄이 계속되어 통 설경을 볼 수 없었노라는 스님의 말을 전해 듣자마자 날이 밝기만을 기다려 아침도 거르고 불국사 청운교 앞에서 눈발을 맞으며 뛰어난 가람의 석축과 돌기둥 전면을 밑그림으로 담았다.
워낙 장대한 구조에 우아함과 섬세함을 두루 갖춘 석축이어서 한나절이 걸려서야 붓을 뗄 수 있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이것을 쌓은 옛사람의 혜안과 조형 감각에 크게 고무되었다.
선배와 함께 그날 밤에 인적이 사라진 틈을 타서 다보탑 계단을 올라가 보았다. 무엇보다 우리의 궁금증은 지금껏 세상에 알려진 감상적 차원의 이해가 아니라 창작자의 입장, 곧 그날로 돌아가 이 대가렴을 설계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는 것이 요체였다.
그래서였을까, 생각을 바꾸어 입장이 다르게 느껴졌을 때 대가람의 이미지는 마침내 상상의 나래를 펴기 시작했다. 대웅전 앞에 마주한 다보탑과 석가탑이 바뀌어서는 안 될 까닭은, 다양한 구조와 섬세성을 보여주는 다보탑은 좌경루 석축을 마감하여 산둥성이에 닿아 있지만 석가탑은 그 담백한 미감이 범영루 넘어 극락전으로 계속 어지게 함으로써 전반적인 균형을 이루려 한 데에 있지 싶었다.
또한 다보탑에서 보여주는 모든 기량은 바로 연화, 칠보교, 청운, 백운교를 둘러싼 석축의 총집결체요, 가람의 변화 속에서 석축 아래 범부의 세계와 불국토의 세계를 나눔에 안팎으로 통일을 기한 조형의 배려로 느껴졌다. 특히 다보탑 계단 위를 막고 선 사자상은 필시 후대의 것이리라 싶은 것이 , 기단부 기둥의 공간에 사람이 올라갈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 시각적으로나 쓰임새에서나 무리가 있어 보였다. 긴 띠를 두른 듯한 석축의 앞면과 극락전으로 이어지는 축대의 이미지는 마치 용에 휘감겨진 느낌인데 인공의 석축 사이로 자연석을 쌓은 둥근 돌이 여전히 용의 비늘이요, 규칙적으로 튀어나온 허리께의 비침돌은 등지느러미의 갈기처럼 보였다. 마침내 그 용의 꼬리는 지형상 비탈을 오르는 극락전으로 이어지는 형세로서 드러나는 감상이 다만 허구에 찬 망상이기만 할까.
실제 토함산 너머 동해구엔 죽어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대왕암과 그 용이 수시로 들락거린다는 감은사지 쌍탑의 기원이 있고 보면 그렇고, 감은사의 탑을 모델로 삼은 석가탑이 불국사에 상존하기로 그 용의 상징은 석연히 살아 오른다.
거대한 용의 몸체로 둘린 석축은 계단 왼쪽에 토함산의 물을 끌어들여 청운, 백운교의 연못으로 떨어지게 한 수구가 남았는데 당시에는 경루와 종루, 누각과 석축이 수면에 비치는가 하면 수구에서 떨어진 물보라에 무지개가 떴다고 한다. 이 수려한 물에 잠겨 승천하려는 용이야말로 불국사다운 최고의 창안이요, 이미지 구현이 아니었을까.
설레이는 가슴은 이튿날 대웅전 마루에서 뜻밖에도 용트름질 하는 이미지가 통나무 바닥의 형상과 목리에서 마저 목도되기로 새삼 놀랍고 경이로웠다. 사실 누대에 걸쳐 마루를 갈아왔으되 물결치는 화룡의 이미지는 오늘에도 충만한 기운으로 살아 숨쉬고 있음을 어쩌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