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정유도更正儒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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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유종교 산책 - 황선명
1996년 06월 172호
유교는 불교와 더불어 어느모로 보나 징구한 세월에 걸쳐 우리민족의 정신세계를 다스려 온 양대 지주이다. 이 두 종교는 지나간 역사시대에 있어 역할이나 기능면에서 두드러진 차이를 드러내가면서 때로는 협조하고 때로는 비타협과 반목을 일삼아 왔다. 그러는 기운데 주로 불교가 박해를 \'당하는’쪽이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과거시대에 불교와 유교가 도대체 무엇이 다른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다만 조선시대에 성리학을 신봉하는 사림士林들이 불교를 가리켜 무군무부無君無父, 다시 말해서 임금도 무시하고‘애비에미’도 모르는 사도邪道라고 해서 호되게 비판한 사실만 알려져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말기에 와서는 그렇지만도 않았다.
말기에 와서 근세 우리나라 선종의 우뚝 선 거목이라고 알려진 백파 긍선스님이나 초의 선사와 같은 용상대덕이 정약용이나 김정희와 같은 유학자와 교류한 흔적이 있다. 그러다가 갑신정변 앞뒤로는 백의정승이라는 별호를 얻을 만큼 젊은 지식인에게 큰 영향을 미친 유대치가 \'유학(교)에는 도道가 없으나 불법에는 도道가 있다’ 고 주장해서 선풍을 진작하는 길만이 기울어 가는 이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 당시 신분이 중인 계급인 유대치를 따르던 사대부 명문 출신의 젊은 지식인 홍영식, 김옥균들이 모두 불법佛法을 바탕으로 나라를 구하겠다는 신념을 지닌 사실은 일반에 그리 널리 알려지지는 않고 있다.
사실 l9세기말기에서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러 낡아빠진 통치이념으로서의 유교가 그처럼 맹렬하게 다가오는 서세동점의 서구열강의 제국주의 세력에 맞서기에는 너무 힘이 없다고 자탄하는 식자가 많았다. 그 가운데에도 중국의 변법자강운동은 주목할 만하다. 이 운동의 대표격인 강유의는 양계초 등과 함께 원래는 양무운동에 적극 가담했다가 \'이래서는 안되겠다\' 는 생각이 들어 공자교孔子敎운동으로 전환한 사람이다. 공자교란 우리나라에서도 보듯이 종래에는 시골의 향교에서 공자님의 화상을 모셔 놓고 제사를 지내고 글공부도 하던 소극적 방식을 벗어나자는 취지이다. 불교나 기독교처럼 사찰과 교회당을 차려 놓고 본격적으로 예배도 보면서 가족의례에 국한시키지 않고 공중의 의례로 전화시켜 \'실천유교\'를 지향 한다는 취지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경상남도 함양출신의 이병헌李炳憲(1870∼1940)이 강유의와 자주 만나서 그의 사상에 감복한 나머지 공자교운동을 널리 펼치려다 일제치하의 서슬이 퍼런 상황에서 아쉽게도 그만 좌절당하고 말았다.
전라도 순창 사람 강대성은 이병헌보다 이십 년 뒤에 태어났으며 강유위는 물론이고 같은 동족인 이병헌조차 만나 보았다는 기록이 없다. 토착 농민의 후예로서 아마도 그의 식견은 재래의 유교적 교양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다만 순창 고을은 우리나라의 근세 말 민중종교의 성지라고 일컫는 전라도의 고부땅이나 강증산의 본거지였던 금구의 금산사와 멀지 않은 거리여서 갱정유도를 창교하는 데에는 그 나름대로의 영향이 컸다. 갱정유도의 본디 명칭은 \'시운기화유불선동서학합일대도대명다경대길유도갱정교화일심(時運氣和儒佛仙東西學合一大道大命多慶大吉儒道更正敎化一心)\'이다.
이는 종교교단의 이름이라기보다는 교리를 압축해 놓은 설명문과 다름이 없어 보인다. 풀이하면 \'때는 마침 새로운 기운이 조화를 이루어 유불선은 물론 동서양의 모든 사상을 합일해서 대도를 크게 밝히면 경사스러움과 함께 축복을 많이 받게 되는바 그것이 바로 일심으로 유교를 새롭게 올바로 세우는 일이니라\' 고하면 어떨까.
강대성이 이처럼 오묘한 이치를 대오각성한 것은 1929년 어느 날 하늘에서 우뢰 같은 소리를 듣고 부터라고 한다. 그는 세상의 혼란을 개탄한 나머지 세상을 말세로 저물어 가는 세상을 구원할 원대한 뜻을 품고 그의 아내와 더불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었다. 이리하여 쉬지 않고 흐르는 눈물을 수건에 적셨다가 그것을 짜 다시 바가지에 담으니 아내의 것과 합쳐서 각각 두 바가지가 되었다. 두 바가지의 눈물을 아내 것은 남편이 마시고, 남편의 것은 아내가 마시니 이로서 인류는 물론 한국사람의 모든 죄악을 탕감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루건수교리漏巾水敎理이다. 희극적인 요소와 함께 매우 소박하다. 설득력이 미약해서인지 오늘날에는 갱정유도에서 루건수교리는 지워 버렸다. 모든 종교의 지도자는 누구나 이적을 행하기 마련이다. 예수가 가릴리 바다를 걷고 죽은 사람을 살렸다는 등, 그 밖의 종교지도자에게도 이루다 말할 수 없는 이적의 사례가 너무나 많다. 그런데 강대성의 경우는 앞서도 소박하다고 말했지만 이적이라고 표현하기보다는 \'동키호테적\'인 요소가 많다. 여느 종교 창시 자들 하고는 다른 유별난 데가 있는 성싶다. 그 가운데에 대표적인 보기를 들라면‘원미용소違美慂蘇사건’이다. 자유당때의 이야기로, 필자도 그때 중학교에 다닐 때여서 기억에 생생하다.
강대성이 \'遠美慂蘇\' 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전주에서 시위를 하다가 보안법에 걸려서 옥고를 치른 사건이다. 이 ‘원미용소違美慂蘇\' 를 풀이하면 \'미국을 멀리하고 소련을 종용하라 \'는 내용이다. 그 시절이 어느 때라고... 그저 독자들의 상상에 맡길 뿐이다. 실제로 바로 몇 년 전에 증산도의 어떤 청년이 대순전경에 나오는 \'활계남조선活計南朝蘇\' 이라고 적은 플래카드를 들고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했을 때 관계 당국에서 난리법석 했다는 얘기가 있다. 지금부터 사십여 년 전에 \'소련과 잘해 보자.\' 고 시위를 했다고 한다면 그 결과가 어떤 했을까, 불을 보듯 뻔한 게 아닌가. 강대성은 전주경찰서에서 고문을 당한 끝에 그 후유증으로 세상을 뜨고 만다.
그러다가 이 갱정유도가 70년대 이후에 세인의 이목을 끌게 된 것은 머리를 땋아 늘인 떠꺼머리 총각을 심심치않게 보여주었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마치 남양군도의 미개족속을 대하듯이 일심교도-당시에는 그렇게 불렀다- 들의 행상을 몽매하게 여기던 터였다. 그러다가 70년대를 넘기고8 0년대 들어오면서부터는 남원 도통리의 갱정유도 본부나 지리산 청학동이 텔레비전에 등장하고 떠꺼머리 한문선생님이 매스컴의 총아로 등장할 만큼 세상 인심이 많이 바뀌었다.
어떻게 보면 교조 강대성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동기에서 오늘날에는 갱정유도가 각광을 받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강대성은 분명 유교가 지난날의 낡은 체제 교학의 틀을 벗어나지 않고서는 변화하는 시대, 더구나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 있을 때 면목을 일신하지 않고서는 지도이념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명칭 자체가 갱정유도이다. 이런 생각은 지금의 갱정유도 지도자들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강대성은 물론 토착농민의 후예로서 식견이 뒤떨어지고 어느 면에서는 강유위나 이병헌에 비겨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많이 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유교를 개혁해서 현대적 삶의 양식과 적극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한다는 취지에서는 그들과 다를 바가 없다. 앞서 \'동키호테적’이라고 한 표현 속에서 필자는 긍정적인 뜻을 함축하고 있음을 고백하고자 한다. 어릿광대의 바보스런 몸짓으로만 정작 자기의 의지를 관철할 수가 있겠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강대성은 선구자이다.
그런데 오늘날 갱정유도가 그리 대단치 않은 교세에도 대중의 박수를 받는 것은 지나치게 현대화된 나아가 산업문명과 서구의 사상과 종교에 찌들어버린 우리네의 심혼이 깃 든 정당한 거부 반응을 바탕에 깔고 있지 않을까.
거기에는 \'유교를 좀더 근대적인 것 - 결과는 서구적인 것이라 보면 어떨까 - 에 접근시키려 한 강대성의 의도와는 상반되는 복고적인 향수가 깔려 있는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