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화합과 관용으로 21세기를 준비하자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해인리포트 - 편집실
1999년 04월 206호
새봄이 왔다. 남도 산사의 동백은 이미 시들었고. 매화는 막바지 안간힘으로 새콤한 향내를 진동시키고 있다. 얼마 있지 않아서 짧은 빛을 간직하고 있는 산천의 신록은 차츰 그 짙푸름을 과시 할 것이다.
자연은 이렇듯 엄격하다. 긴 겨울 뒤엔 반드시 봄이 오는 게 자연의 위대한 섭리이다. 다시는 살아 있음의 조짐을 보이지 못할 것만 같던 고목의 껍질 틈새를 밀고 나오는 저 여린 새싹의 신비로움이란! 그러나 자연의 위대한 섭리도 이를 짐짓, 아니 감히 외면하는 곳은 비켜 가는 것인가. 엄연히 봄은 왔으나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모호함이 우리 절집 안에서는 여전히 기세를 꺾지 않고 있으나 말이다. 지난해, 우리 불교계는 길고 긴, 그리고 지긋지긋하기 짝이 없는 분규의 터널을 빠져나왔다. 새 총무원장도 선출했고, 종단을 이끄는 주역들도 많이 바뀌었다. 그리고 무엇인가 새로운 기운에 깃들 것이라는 기대를 많이 했다. 그러나 정화나 개혁, 화합과 관용이란 말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진정한 의미가 퇴색되어 가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부지불식간에 청정이라거나 화합승가라는 용어들도 그 온전한 뜻을 조금씩 잃어 가는 것 같다. 자비문중이라든지,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든지, 앙굴라마도 참회하면 받아들이는 것이 불교의 포용력이라든지 하는 따위의 이야기들은 먼 나라의 딴 세상 일만큼이나 희미해져 버린 듯하다. 화합승가요, 자비문중이라는 정겨운 절집의 용어들이 언제 그 참뜻을 회복할 수 있을까. 오늘을 사는 불교인들의 업보는 날로 무게를 더해 가고 있으니 답답함이 가슴을 짓누른다.
최근 조계종은 올 한 해 동안 ‘초발심으로!’라는 모토 아래 범종단 초발심 회복운동을 벌이겠다고 발표했다. 지난 해 종단 사태가 불자들은 물론이요 국민과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국제적으로 한국불교의 위신을 땅에 떨어뜨렸으니, 이를 회복시키는 차원에서 초발심 회복 운동을 벌이기로 했다는 것이다.
조계종은 우선 출가절과 열반절 사이의 8일간을 참회와 정진 기간으로 선포하고, 열반절 전 일주일을 용맹정진 주간으로 정해 여러 행사를 펼쳤다. 열반절부터 10월까지를 ‘참회와 자정을 위한 순회법회 기간’으로 정해 불교가 나락을 벗어나 재도약하는 계기를 삼고자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천주교에서 추진해 세간의 호응과 관심을 모았던 ‘내 탓이오’운동처럼 ‘초발심으로!’운동을 통해 종단분위기를 일신하고 대사회적으로도 불교의 위상을 쇄신하는 효과를 거두겠다는 의도에서였다. 조계종은 앞으로도 사찰이나 출가 단체, 재가 단체들이 자발적으로 청규 제정 운동이나 오계 지키기 운동을 벌이도록 유도해 초발심 운동을 말 그대로 범종단적으로 확산시키겠다는 의욕을 보이고 있다.
조계종이 추진중인 범종단 초발심 회복 운동 계획안은 매우 시의 적절한 시도로 보인다. 스스로 참회하고 다시 태어나겠다는 투철한 정진 없이 불교계가 우리사회의 정신적 귀의처로 거듭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가지 아쉬움이 남는 것은 이를 추진하는 주체들이 아직도 지난 분규의 전반적인 과정을 ‘내 논에 물 끌어대기 식’으로 해석하고 있는 점이다. 지난 분규는 경위야 어떻든, 이긴 편이나 진 편이나 모두 정당하지 못했음을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벌이는 운동은. 다시 말해, 진정한 참회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운동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는 우려가 앞선다. 이는 서로 용서하고, 상대의 허물을 들추기에 앞서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는, 더 나아가 진정한 화합과 미래를 위한 타협을 이루는 자세와는 동떨어진 상황 인식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절집안에 암울한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희망적이고 고무적인 일들이 다양하게 준비되고 있고, 또 피부에 와 닿고있다.
불교정보화의 한 획을 긋는 조계종 인터넷 사이트 달마넷이 발족을 했고. 4월 말부터는 본격적인 정보서비스에 들어가게 됐다. 사찰 홈페이지와 각 기관 및 단체의 홈페이지는 달마넷을 통해 대단하게 활성화할 전망이다. 달마넷을 통해 불교 관련 정보의 모든 것을 제공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진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에 한국 불교를 홍보할 수 있게 되었고, 사이버 법당이라든지, 가상공간을 통해 가고 싶은 사찰을 참배하고 순례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몇 해 전만해도 상상 할 수 없던 일들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요원할 것만 같던 북한의 불교 성지 금강산 순례가 가능해진 데 이어 이른바 금강산 4대 사찰인 유점사, 신계사, 장안사, 정양사 들을 우리 손으로 복원하는 일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답답하다. 영 마음에 개운치 않다. 좋은 일을 당해서도 밝은 얼굴을 하기가 내키지 않는다. 가슴에 응어리진 한이랄까, 아니면 실망감이 랄까, 답답함 속에서 무언가 치밀어 오름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터널은 벗어났으되 마음은 여전히 어둠의 상혼을 떨쳐내지 못 하는 형국이라고나 할까. 가슴 속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응어리와 한, 이로 인한 답답함을 하루 빨리 풀어내지 않는다면 불교의 고질병으로 굳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것을 말끔히 해소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불안감이나 의기소침한 기운이 팽배해 질 수밖에 없고, 그러다 누적되면 무기력증으로 악화되기 마련이다. 현재 우리 불교계는 총체적인 무기력증의 초기 단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다’는 속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조짐이 뚜렷해지고 있다. 불과 얼마 전만해도 훼불사건이 발생하거나 공영방송등에서 불교에 불리하거나 특정 종교를 선전하는 듯한 용어가 나오기만 해도 피해의식에 지나치게 젖어 있다는 지적을 받을 만큼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던 모습도 어느새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악마, 천사라는 특성 종교의 용어가 공공 매체에서 난무하고, 드라마를 비롯해 방송프로에 특정 종교의 의식장면이 습관처럼 계속되고 있는데도 이를 지적할 기력마저 잃은 듯하다. 조계종 사태 이후 사찰을 찾는 불자가 줄어들고, 어린이 법회와 불교유치원의 상당수가 존립에 위협을 느낄 만큼 어려운 상황을 맞고 있다지만 적절한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불교계 일각에서는 총체적인 무력감의 표출이 고착화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위기의식마저 나타나고 있다.
설사 교계 일각의 위기의식이 아니더라도, 21세기를 눈앞에 둔 불교계가 언제까지 징계와 반발, 응징과 맞대응이라는 지극히 지엽적인 문제에 매몰돼 있을 수는 없다. 서둘러 화합과 관용의 일대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 미래를 위해 맺고 끊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더 이상 작은 굴레에 머물 것이 아니라 좀 더 큰 틀에서 미래를 조망하는 눈을 갖는 것이 더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이다.
21세기는 지난 20세기가 그랬던 것처럼 변화의 속도 전환이 그리 완만한시대가 아니다. 무서울 만큼 철저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래서 막연하게 대책 없이 맞닥뜨린다면 여지없이 패배할 수밖에 없는 시대이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날 우리 절집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살펴보면 걱정이 크다. 작은 일에 집착하고, 거기에 매몰되는 행동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상황들. 원한은 원한으로 갚을 수 없다는 경전의 가르침은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런 모습들은 결코 새로운 문명의 세기를 코앞에 둔 한국불교가 가야 할 길은 아니다.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는 제목을 가진 책이 요즈음 베스트 셀러이다. 과거에 대한 정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외면한 채 작은 일에 집착하는 한국인의 빗나간 양태를 꼬집은 이 제목은 오늘의 불교계가 곰삭여 받아들여야 할 교훈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