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주변의 문화 기행과 지리산 자락의 시찰 기행은 그 어느 곳보다 시간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십여 년 전부터 아름다운 섬진강의 물굽이를 따라 화개를 거쳐 하동 땅을 경유해 온 여정은 언제나 새로운 감흥과 설레임을 만끽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이 추억이 넘치는 길목을 그것도 춘삼월 하순에 백화가 난무할 때 찾아보는 까닭은 여러모로 각별하다. 이채로운 강의 여정으로 며칠째 섬진강변을 떠돌아 내려오며 하동에 닿았을 땐 이미 노오란 산수유와 매화가 멍울을 터뜨려 한층 감흥을 더해 주었다.
섬진강을 중심으로 달려가는 길목은 지리산끝자락의 산청과 하동, 함양땅이 자리잡고, 강 건 너 백운산에는 전남 광양이 맞닿아 있다.
마침내 저물녁에야 쌍계사에 다다랗다. 몇 번을 보아도 흥미로운 나무 뿌리가 하늘로 향해 솟은 장승과 최치원이 지팡이 끝으로 썼다는 ‘쌍계蠻樓\' 의 표석이 반갑기 그지없다.
겨울철이면 무리춤(群舞)을 추는 수십만 마리의 되새들도 온통 저녁하늘에 검은 수를 놓는 쌍계사의 대숲은, 이미 날아가 버린 되새들의 추억만이 살강거리고 있을 뿐이다.
길손은 담묵처럼 번지는 어둠 속을 휘적휘적 걸어올라 요사이의 나그네 방을 하나 빌려 고단한 섬진강 여정의 짐을 풀었다.
꽃이 피는 화개동천花開洞天에 천 년 숨결이 잠긴 쌍계사의 밤은 비록 가람의 형상이 드러나지 않되 , 일주문 아래의 번잡한 상가, 숙박지 등 일상사로부터 벗어난 적조함이 오히려
도탑게 느껴졌다.
잠깐이라도 세속의 귀를 씻어내라고 계곡의 물소리 굽이쳐 오는가 어둠을 밀쳐 가르며 흐르는 계곡 물 또한 화개에서 섬진강으로 흘러 들 것이다. 그 물에 몸을 씻고 문지방을 막 넘으려는데 갑자기 정전이 되고 말았다. 산간의 불어 모두 꺼져서 처음에는 얼마쯤 갑갑하였으나 차츰 산 능선에 눈길이 가고 용마루와 처마를 살피니 그 동선의 아름다움이 밀물처럼 다가왔다. 또한 석등과 탑신의 형상이 적멸의 어둠 속에서 새롭게 피어오르고, 고목과 대숲의 설렁임이 천 년 전의 고찰로 나그네를 인도하는 듯 싶었다.
역시 일은 순리대로 따라가 보는 법. 내 손에는 벌써 스케치북이 들려있어 미로의 어둠 속에서 가람의 위치와 형상을 손전등에 의지하며 달빛을 밟아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는 고운 최치원이 짓고 썼다는 진감선사비眞鑑禪師碑 앞에 우뚝 서자 천 년 전의 밤이 오늘 같기로, 그 날의 달빛 속에서 이 곳을 노래한 선시輝詩를 떠올렸다.
동쪽나라 회개통은 병 속의 별천지라
옥베개를 밀치니 순식간에 천 년이 되었네
일만 골짜기에는 우뢰소리 울리고
천 봉우리에는 비 맞은 초목 새로운데
스님은 세월을 잊고 나뭇잎으로 봄을 기억하네
이튿날은 어젯밤의 사생을 토대로 폭설이 내려도 쌓이지 않는다는 설리갈화처雪裡葛花處의 명당이자 호랑이가 내려서는 형국인 맹호하산형猛虎下山形이라는 산세를 살펴보며 가람 배치의 동선을 따라가 보았다. 절터를 감싸안고 흐르는 화개천과 내원골을 활용한 두 갈래의 물줄기 속에 자리한 가람은 크게 금당의 기슭과 대웅전의 터전으로 나뉘어 독특한 형세를 보여준다. 이 터전의 풍광에 대해 고운은 진감 선사 비문에서 그 날의 아름다움을 오늘에 이르도록 눈뜨고 귀 열고 있기를 길손에게 일깨워 주고 있는 듯싶다.
눈앞을 맑게 하는 것은 강 건너 먼 산이고 윗 속을 시원하게 하는 것은 돌을 때리는 물소리이다. 봄 시내의 꽃과 여름 길의 소나무, 가을 골짜기의 달빛과 겨울 잔의 눈이 같은데
이르러서 임에랴! 사시가 모습을 바꾸고 만상이 빛깔을 달리하며 백뢰白賴가 화답해 읊조리고 천암千嚴이 빼어남을 다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