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빛 머금은 하얀 꽃망울을 조롱조롱 매어 달고 바람 부는 대로 쓸리는 자태가 함초롱 하다. 두런거리며 모여 앉은 둥글레 꽃무리를 바라보며 둥글레차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접어 둔다. 언제쯤 채취하여 어떤 방법으로 건조하는지 모르지만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무심히 피었다지는 말은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족하기 때문이다. 나무 한 그루에서 풀 한 포기에 이르기까지 처해진 현실 속에서 가장 어울리게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으며 꽃 피우고 열매 맺는 것을 보면 경이롭다. 채에 바치지 않아도 고르게 무 적시는 가랑비처럼 간격을 맞추고 나란이를 세우고 전지를 하지 않아도 어느 사이 다가설 줄 알고 물러날 줄 알며 저희들끼리 소리 하나 없이 이루어내는 조화를 보면 작위성이 없는 천진이 편안하기 이를 데가 없다. 육십이면 귀가 순하여 거슬리는 소리가 없고 칠십이면 하고 싶은 대로하여도 법도에 어그러짐이 없다하더니만 자연이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것은 칠십이 넘은 노인과 같고 공부가 익을수록 순해진 도인과 같다. 가만히 바라보면 그들은 모두 어딘 지를 향하고 있음을 알게된다. 자신들이 태어난 우주의 중심부와 해 뜨는 곳을 향한 열애 그들은 단순히 아름답고자 하는 소망에 의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만들고 씨앗을 싹 틔우는 것일까. 그들에게도 절대절명의 사명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삽날을 들어대어도 도망가거나 반항할 줄 모르는 온전히 수동적인 삶이지만 어느 곳에 옮겨 심어도 살아남음으로써 보여주는 무언의 항쟁. 척박한 땅에서도 온몸으로 자기 의지를 천명하는 풀꽃! 그들은 결코 약한 자가 아니다.
침묵 속에 피는 풀꽃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저녁 종소리가 골짜기를 휘돌아 승천한다. 많은 사람들이 가슴에 손을 모으고 그 소리를 듣고 있다. 아리게 휘감겨 드는 여운이 전생의 기억들을 뒤흔드는지 엄숙하고도 깊은 표정들이 무언가 더듬어 찾고 있다. 언제 어딘가에서 들어본 소리, 기억 저 켠의 그 곳이 어디쯤인지 알 수 없지만 그 때의 비감과 허무가 만져지는 듯 움직일 줄 모르고 귀를 모은다. 어린 날 밀레의 만종을 보며 뾰족한 종탑에서 들려오는 저녁 종소리에 마주 선 농부의 희로애락과 선善을 향한 지고한 향수를 느낀 적이 있다. 오늘 저들도 심연 깊은 곳에 내재한 성스러운 불심을 찾아내리라. 어떤 육성보다 자애로
운 저녁 종소리를 통해서... “제대로 된 글쟁이가 되는 것도 좋지. 세상은 환幻이지. 환幻 속의 환幻, 거울 속의 거울 삼라만상의 모든 것을 포용하고 있다가 빨간걸 원하는 놈에게는 빨간걸 집어주고, 초록을 원하는 놈에게는 초록을 접어주고, 파란걸 원하는 놈에게는 파란걸 집어주며 깊이 덕을 베풀되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하고, 미사여구의 글은 생명이 없으니 진실한 글 진실한 마음, 진실한 언행, 그것을 잊지 말지라. 심사숙고하여 입지를 세우고 한번 마음이 서면 끈기, 인내, 노력을 통해서 성취하는 사람의 기품을 갖어라. 서릿날 같은 비수를 가슴에 차고 살되. 사람을 살리는 비수여야 하고, 자선에게는 법답고 불은을 이루기 위한 비수여야 하며 불은을 갚는데 씌여지는 비수여야 하니라. 고요하면서도 맑고, 깊고 그윽한 모습으로 서기 위해 말을 줄이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지 사랑과 자비, 지덕체미에 겸양의 미덕을 갖추면 금상첨화이겠지. 그래서 삼라만상에서 나羅자를 따고 중생이 어우러져 사는 곳 성城짜를 따서. 나정羅城으로 지었다.” 구십 삼 년 오월 삼십일 오후 세시였다. 계사戒師 스님인 송원松原 설정設靖스님으로부터 경책 말씀과 필명을 받은 것이다.
한 마리 학이 날개를 펼쳐 춤추니/
모든 새가 환희하며 따르고/
온갖 꽃이 구름같이 성안에 피어 향기 가득하니/
모든중생이 즐거이 미소하며 놀더라.
購舞翼羅 百鳥隨歡喜 萬化香雲城 購類遊戰 笑
\'먹 갈아라’ 하시더니 일필휘지로 적어 준 글이다. 어쩌면 나는 소나무 숲 속 아득히 눈 내리는 고요 같은 절애의 고독에 있는 이름을 갖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천서天時는 지리地利만 같지 못하고 지리 또한 인화만 같지 못함을 깊이 체달한 스님은 나에게 인화를 강조하였다. 중생과 더불어 어우러질 때 타고 난 고를 극복하고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며 끌고 당기는 화합 속에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할 때 진정한 보람을 찾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나보다. 얼음깨는 도끼 같은 글, 피로써 쓴글로 사람을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이쯤에서 서성이지만 스님이 주신 말씀을 늘 간직하고 산다. 부처님의 은혜를 갚을수 있을 때 스님 은혜도 갚을 수 있으리라.
설익은 채, 나서선 안 된다는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조선시대 실학자 이덕무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라 하여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느낀 바를 쓰는 것이 수필이라 하였다.
상허 이태준은 ‘문장강화 에서 누구에게 있어서나 수필은 자기의 심적 나체이다. 그러니까 수필을 쓰려면 먼저 \'자기 풍부’가 있어야하고 \'자기의 미’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평론가 권성우 교수는 \'에세이 정신이야말로 생의 직접성을 보여주는 특유한 형식의 글 쓰기이며 삶의 절대적 근거랄까 심연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그리움을 품은 자만이 선택하는 글 쓰기의 방식이라고 하였다. 한사람의 자연인으로 사유와 성찰어 선線을넘지 못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무엇을 쓸 수 있겠는가 하물며 수행자임에랴. 한동안 다시 침묵할 것이다. 아니 영원히 침묵할지라도 모르겠다. 그동안 채경당 바람결을 아껴준 모든 분들과 특히 해인지에 고마움을 전한다.
기승차게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는 묘한 데가 있다. 소리를 의식하면 \'아이구 저 놈의 개구리
소리\' 하다가도 문득 하는 일에 전혀 방해롭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나도 개구리 소리를 잊고, 개구리 소리도 나를 잊고, 그렇지만 소쩍새 소리는 다르다 서두르지도 채근하지도 않으면서 넘기는 책장마다 따라온다. 저만큼 밀쳐 놓고 나면 어느새, 또 그 자리에 돌아와 서며 밤새도록 귓전을 떠나지 않는다. \'그렇게 울어 싸서 어쩌겠단 말이냐’
한마디 야단이라도 칠 기세이더니 슬그머니 책을 덮고 좌복을 챙긴다. 이런 밤에는 소쩍새 울음과 더불어 꽃 지는 소리를 듣는 게 훨씬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