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인 지리산 자락에 있는 쌍계사에는 덕민스님이 산다. 그의 가까이에서 사는 스님들은 억세지도, 그러나 허전하지도 않은 덕민스님의 뒷모습을 두고 ‘정전강의 서쪽 노을\' 같다고
했다. 그 뜻을 푸는 말로는 \"평화”도 온전히 않고, “슬픔\" 도 옳지 않다 했다. 승속을 막론하고, 웬만한 세월을 흘러 보낸 사람이라 할지라도 단아한 뒷모습 갖추기란 수월치 않은 일일 것이고 보면, 그가 받고 있는, 유.불.도 삼교에 통달한 \"저마다 모시고 싶은 뛰어난 강주”라는 여러 스님들의 찬사보다는, 감상끼가 살짝 밴 시봉하는 스님의 표현이 듣는 사람의 가슴에 더 와 닿는다.
여닮 해 전, 이 곳 쌍계사로 오면서 꼭 귀양 살러 가는 것만 같아 울고 왔다고 했다. 그가 출가한 뒤로 줄곧 모신 분들이 노인 분들 이어서 그랬던지, 이즈막에도 “지나치게\" 건강하고 습을 버리지 못하는 젊은 사람보다는, 세월만큼 쌓인 경륜에다가, 이런저런 붙여 대는 소리 할 줄 모르는 노인분들과 어울리기가 편하다.
그래서 그는 방에 달린 전화선도 아예 뽑아 놓고, 쌍계사에 그 정상頂相-머리뼈-이 묻혔다는 육조 혜능스님과 대웅전, 아래 서 있는 진감 선사 비문 속의 최고운 선생 같은, 백 년도
천 년도 더 전 사람들인 그이들과 이끼 낀 이야기를 나누면서 또 그렇게 잘 지낸다. 그리고 그렇게 번다하지 않은 수효의 학인들을 대상으로, 또 그러기에 가능한 짬진 제접 방식으로 교학에 임하고, 중물을 들여 나간다.
\"강원에 오면 다시 태어난 기분으로, 장삼 입고, 큰스님 시봉하고, 예불 올리고, 도량 청소하는 가운데 치문이나 서장 따위 배운달 것 같으면 기초 교육이라고 따로 필요할 게 있나.
부처님 경전을 몸이 축축 젖은 만큼 잘만 보면 되지.\"
고려 때부터 조선조 말까지의 수많은 선시들 가운데서 빼어난 것들을
\"낙엽 속에서” 가려 뽑아, 쌍계사 수좌스님들이나 청암사스님들을 대상으로 하면, 글이 좋기는 하되 \"야물기가 쇳덩이 같아서” 읽어 내리기가 쉽지 않은 사산비명 강의도 알기 쉽게 풀어 보인다. 이즈음 와서 강원에서 사산비명에 대한 원전 강의가 이루어지기는 덕민스님이 처음으로 시도한 일이기도 하다.
‘사산비명은 옛날에는 절 집안에서 필수로 읽힌 것들이지만 요즘에 와서는
소홀해졌어요. 유불도 삼교가 뒤섞여 있어 내용이 워낙 어렵고 고사도 많아서 읽기가 쉽지는 않지요. 그러나 그 비명을 모시고 사는 스님네들이 그를 소홀히 해서 스님 아닌 일반 한학자들한테 그 뜻을 묻고 있는 요즘 형편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사산비명뿐 아닌 다른 금석학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요. 그걸 번역본이 아닌 원전으로 읽어야 해요. 그 속에 선사들의 손때, 기침 소리와 숨쉬는 소리가 들어 있어요.”
그의 강의는 깊이와 넓이를 두루 갖추면서도 수다스럽지 않고, 어법이 바르면서도 윤택하다. 그런 강의를 펼치는 한편으로 최근 들어 기초 선원 교재 강의로 쓰려고 조계종단에서 위촉한 「선요」의 번역 작엽을 끝냈는가 하면, 강원의 교재로 통용될 「서장」의 교정 작업도 진행 중이다. 그러나 글을 가다듬는 그의 손길은 끊임없이 머뭇거려진다. 먼저 번역한 스님들의 뜻을 그르쳐 놓는 것 아닌 가도 싶어 면구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번역이란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그의 원칙론적인 생각 때문에 그러하다. 「서장」만 해도 열일곱 살 때 청암사 수도암에서 혼자 겨울을 나면서 잣 알로 산散을 놓아가며 몇 백 번을 읽은 뒤로도, 스무 해 도 더 넘게 보아 온 것이건만, 달아 놓은 주가 공양하러 가면서 달라지고, 됫세 놓고 보면 또 이상스럽다.
그런 까닭으로 역경원이나 정신문화원연구원 둥 그의 능력을 사서 청하는 손길을 끝내 만다고 만다. 그는 자신의 몫이란 그저 강의를 받는 사람에게 사색의 거리를 제공해 주고, 사심의 맥을 짚어 주는 일일뿐이라고 한정지어 놓는다. 스스로 병적인 사람 기피증이 있다 하였고, 일견 갑갑해 보이는 그의 그러한 생각은 그러나 듣는 이를 안심시킨다. 번역을 한다는 것. 특히나 시를 번역하는 일에 대한 그의 엄정한 태도를 엿보게 하기 때문이다. 선방에 가고 싶다는 그의 느닷없는 말도, 도에 이르지 못한 사람으로서 입 강의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것이 부처님 말씀에 얼만큼 가까운가 하는 자의식적인 “태도\"의 표현으로 볼 수 있음직하다.
「금강경오가해」 같은 것은 전부 시인데, 시란 뜻도 중요하지만 고저 청탁이라든가 운을 모르면 내용을 제대로 꿸 수가 없어요. 그리고 시는 직접 지어 봐야 제대로 읽을 수가 있어요. 함허 득통 선사가 시를 잘했어요. 선의 세계를 시로 그렇게 절묘하게 푼 스님이 한국에는 또 없어요.\"
다른 무엇보다도 그의 한사에 대한 천착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나이 열 셋에 출가를 했다고는 하나,서른도 안 된 나이에 법주사 강사로서 학인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였다.
보통학교에 들기 전부터 입문한 한 학인데다가, 성정이 유정하여 그랬던지 경전을 보는 사이에 점점 이백과 두보 등의 한시에 이끌리어, 학인들에게 본 강의가 끝나면 말미에 한시 한 수씩을 맛보이고는 했다.
어느 날, 열린 방문 밖으로 머리가 허연 속인 한사람이 보리수나무 아래서 그의 강의를 청강하고 있다가 말했다.
\"스님 강의는 꽤 짬지오마는 전거典據가 좀 소홀한 것 같소이다.”
열 서너 살 적부터 제가 좋아 읽은 당시唐詩였고, 뜻도 웬만큼은 꿴다고 여기면서 그 기쁨을 학인들과 나눠 누릴 요량으로 들려주고는 있었으나,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고, 어디 물을 데도 마땅찮던 터였다. 그러다가 무안을 당한 김에 덕민 스님은 서울로 올라갔다. 그리고 월운 스님과 함께 개운사에서 방 한 칸을 차지하고 저녁이면 태동고전연구원에서
임창순 씨의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학채가 없어 덕민 스님이 강의를 듣고 와서 월운 스님에게 전달 교수 노릇을 해 주는 식이었다. 밤 깊어 출출해지면 백 오십 원짜리 우동을 한 그릇씩 사 먹곤 했던 곤궁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시전」 강의를 들으면서, 무조건 글귀를 외던 때와는 달리, 아이 참, 글만 같고 문장만 같았다. 그리고 수행하는 과정, 마음의 깨달음의 세계만 전문으로 이야기하는 불전과는 달리, 주위에 펼쳐져 있는 청황적백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시전의 화려한 문체에 점점 흠뻑 빠져 들어갔다.
태동고전연구원에서 「이조실록」,「장자」, 「고문진보」 같은 것들을 읽으며 동양의 고전을 좀 봐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더 다급해졌다. 그 가운데에서도 상하권으로 된 두보의 율시 시집인「두율」올 제대로 좀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수소문해 찾아간 곳이 합천군 초계면의 권추연선생 댁이었다.
그러나 산중도 아닌 여염집에서 숙식을 하며 공부할 염을 내기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학채 문제도 큰일이었다. 그러자 그때 조계사 주지로 있던, 지금 쌍계사 조실로 있는 고산스님이 그를 불렀다. 그의 은사 스님인 우룡 스님과 함께, 해인사의 대강백 이었던 고봉스님의 전강 제자인 고산스님은 집안의 증손인 그가 \"갓쟁이”를 쫓아다니는 꼴이 마뜩치가 않아 대학이나 대학원을 들어가라고 했다. 그러나 “글에 미쳐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그의 고집을 꺾지는 못하고 쌀 다섯 가마 값을 학채로 보태 주었다.
한 해쯤 「두율」딴 해결하고 나오리란 생각을 먹었던 것이 열세 해 동안을 그 곳에 머무르게 되니, 스님은 그것도 버릴 수 없는 인연으로 친다.
무엇보다, 그 곳에 당도하니 풀 \'초\' 자, 시내‘계\' 자를 쓰는 초계 라는 곳.
유하리라는 그 곳이 도무지 낯설지가 않았다. 나이 일흔 두 살이었던 추연 선생은 눈이 크고 글을 읽는 목소리가 마루를 찌렁찌렁 울렸으나 두렵지 않았다.
갓이나 망건을 쓰고 두루막 차림을 한 또래의 유생들이 그 곳서 수학을 하려면 그 곳 법도대로 복 색부터 고쳐 입어야 할 것이라고 승복 차림인 그를 겁주었으나 웬일인지 그를 초대면한 선생의 얼굴에서 그런 강압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뿐 아닌, 뜻하잖은 반가움마저 그의 얼굴에서 읽고 한결 마음이 놓이면서 방안이 살펴졌다. 그 동안 노스님들 시봉을 많이 한 탓인지 청소와 빨래 따위에 유난히 까탈스러웠던 그의 눈에 추접한 방 꼴이 보인 것이다. 책상 아래는 헛 \"부처님 똥구녁”이었다. 버선 또한 신은 지가 두어 달은 된 듯한 데다 뚫어진 사이로 때 낀 맨살이 드러나 보였다. 그러나 이미 이심에 전심으로 공부하고 가르칠 것이 결정된 두 사람 사이에 정담 두어 마디가 오갔다.
\"책실이 왜 이렇게 추접스럽습니까.”
초대면에 ! 그것도 배우러 온 처지에 추연 선생은 그 밀에 콧방귀를 탕, 뀌었다.
\"처염상정魔染常浮\" 이라 했거늘, 자네는 어찌 께끗한 것은 못 보고 추한 것만 보는고.”
그 말에 덕민 스님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유학자의 입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온 그 말은 바로 「법화경」을 한마디로 이를 말한 뜻이 아닌가.
그 날로 얻어 받은 방에서 새벽 두시면 일어나 글을 읽었으나, 한자리에서 여섯 시간씩 내리 읽는 억척스런 공부가 바로 시작되었다. 그가 품고 내려갔던 두보는, 당의 쇠망의 고비였을 뿐만이 아니라, 중국이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전기가 되는 안사의 난리를 몸으로 겪으면서,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과 함께, 청나라 말엽까지 중국 고전 시의 가장 중요한 흐름이 되는, 이전과는 판이한 새로운 시 세계를 펼쳐 보인 사람이다. 당시의 양대 시풍을 이루는 낭만시와 사회시 가운데, 전자를 대표하는 이백의 시와는 달리 , 후자를 대표하는 두보의 시는 사시史詩로 불릴 만큼 주 없이는 읽기가 힘들다.
「두율」에 실린 이백 수의 시를 추연선생은 책을 펴 보는 법도 없이 솰솰 외어 보였다. 고려 청자와 이조 백자가 여기에 있었구나, 덕민스님은 감탄하였다. 덕민스님 또한 그 시들을
모조리 외어 바쳐 그에 화답하게 된다. 그리고 덕민스님은 하루 일과의 하나처럼 한시를 지어 추연 선생에게 보였다. 잘 됐다. 못 됐다 말씀도 없이 그저 몇 자 고쳐 주기만 했다. 그리고 대작은 아니라 여겨졌던 제 시가 고친 몇 자로 어떻게 뒤집어지는지 보았다.
사진/홍현숙
「두율」을 다본 뒤에도 추연 선생과의 인연은 끝나지 않았다-「논어」, 「맹자」,「시전」, 「서전」을 읽고, 「주역」과「장자」를 읽고, 사산비명을 함께 보는 동안 서로 피붙이 이상 가는 정을 느끼게 되니, 선생은 그가 배출해 낸 수많은 제자 가운데서도 유독 그에게 깊은 애정을 보인 것으로 전해진다.
‘사마천이나 두보 영감처럼” 평소에 말이 없던 선생은 저수지 둑에 네댓시간씩 움직이지 않고 앉아서 버스오가는 것 구경이나 하고 있다가, 마을로 돌아오는 그를 반기곤 했다.
당신이 세상 떠나면 손톱 발톱 다 깎이고, 소렴 대렴 다 한 뒤에 널에 넣고 가라고 했던 그의 말대로, 그의 마지막 나날들은 그의 피붙이도 그의 선배들도 아닌 그가 함께 했다.
그리고 선비의 법도대로 담장의 밖과 안에 시신을 차례로 모시어 외빈과 내빈의 예를 갖추는 듣, ‘이 시대 마지막 유월장觸月葬’을 한 달에 걸쳐 치른 다음 광을 파서 널을 묻었다.
어려운 고문古文들은 이제 어디 가서묻나. 그의 떠남은 이름다운 보배를 떨쳤을 적에, 손이 닿으면 금방 잡힐 듯 한 그것이 자꾸만 밑으로 흘려내려 아주 잃어버리게 된 듯한 쓰라린 아쉬움 이었다고 그는 표현했다.
추연 선생과의 사별 이후 그는 쌍계사복원 불사를 끝내고 강원을 막 연 고산스님의 영대로, 그리고 초계에는 흐르는 물이 없으니 , 이 다음 절로 돌아가면 물 흐르는 곳에서 살게 해 줍시사는 그의 원력대로, 쌍계사로 와서 행전을 치고 다시 산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쌍계사 강주로서, 추연 선생과 함께 지낸 세월을 아쉬움만으로 끝내지 않을 나날을 보내기
시작했다.
\"지금사, 우리의 염송이라든지 오종가풍의 중국 선시의 세계가 전부 당시의 세계와 연결이 되어 보여요.「금강경오가해」나 선시 같은 것을 봐도 감이 좀 잡히고, 그러면서 푸는 기쁨이 큰 것은 내가 시를 얽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당시를 접하게 된 인연의 뜻을 그렇게 풉니다.”
“인간A間 계화락桂花落이라. 사람의 마음이 한가로워지니, 세속의 분별이나 상대적인 마음이 끊어지닝까. 방에 앉아 있어도 꽃잎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단 말이여. 자연과 나 사이에 대화가 열려 가지고, 그것이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된다 벌이여. 야정夜靜에 춘산공春山空이라. 밤이 고요하니 봄 산이 텅 빈 것 같다 함은 마음 내 방 옆으로 난 계곡과 같이 빈단 말이지. 월출月出에 경산조驚山烏하니 시명時嗚 춘간중春潤中이라, 저녁에 달뜨는 것보고 새가 깜짝 놀래 가지고 가끔 계곡 가에서 소쩍 소쩍 운단 소리여. 비어 있는 상태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가 바로 자기 소리라는 왕유의 시라.”
쌍계사 반야실에 좌중하고 있는 덕민 강주 스님의 방밖으로는 산음 사이로 흐드러졌던 진달래도 지고, 꼭 자식놈만 같은 나무들의 녹색 잔치가 막 시작될 즈음이었다. 지는 꽃 떨기
바라기는 안쓰럽고, 사람처럼 수다스럽지 않아 아주 맘에 딱 맞는 나무 바라기가 더 구미에 맞다. 이즈음 두 어 차례 비가 실 한줄기로 내려 겨올 가뭄으로 강팍해진 산과 들을 푸근히
되살려 놓았을 뿐 아니라, 내원골 골짝 물을 충실히 채워 주었으니, 무심에서 울려 나는 계곡의 물소리는 곧 부처님의 마음자리라, 열반당 같기만 한 이 곳 반야실에서 덕민스님은 밤낮으로 법음을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