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고로쇠나무의 마음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어른을 위한 동화 - 정호승 1999년 04월 206호
전남 광양시 백운잔 정상 부근에 아기 고로쇠나무 한 그루와 엄마 고로쇠나무 한 그루가 살고 있었다.
아기 고로쇠는 고개를 들어 멀리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 실낱 같은 섬진강 아래쪽에서 아장아장 봄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엄마, 봄이 와.”
아기 고로쇠는 엄마 고로쇠를 향해 무슨 큰 발견이라도 한 듯 크게 소리쳤다.
“그래, 봄이 오는 소리가 이 엄마 귀에도 들린다. 곧 눈 녹는 소리가 네 마음을 시원하게 해 줄 거다.”
두 고로쇠나무가 그런 대화를 나눈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백운산에 봄은 왔다. 봄41 오자 엄마 고로쇠는 잎이 나기도 전에 먼저 하얀 꽃을 피웠다.
“엄마, 나는 왜 꽃이 안피는 거예요?”
아기 고로쇠는 꽃을 피운 엄마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지는 반면 꽃을 피우지 못한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다.
“아가야, 나중에는 너도 꽃을 피우게 된단다.”
“그때가 언제예요?”
“그건 네가 청년이 되었을 때다.”
“언제 청년이 되는데요?’
“글쎄, 딱히 언제라고는 말할 수 없다. 꽃이 피기 위해서는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것 외엔 엄마도 알 수 없는 일이란다.”
아기 고로쇠는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엄마의 밀에 적이 실망스러워 불만에 찬 목소리로 계속 질문을 해대었다.
“그런데 엄마, 엄마는 왜 꽃을 피우는 거예요?”
“인간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야.”
“왜 인간을 아름답게 하려고 하세요?”
“인간이 아름다우면 이 세상이 아름다워진단다.”
“이 세상이 아름다워지면 뭐가 좋아요?”
“내가 열매를 맺게 되지.”
“열매 맺게 되면 뭐가 좋은데요?”
“우리 삶에 의미가 생기게 되지. 열매를 맺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단다.”
아기 고로쇠는 잠시 말을 멈추고 엄마의 말을 곰곰 생각했다.
“그럼 엄마, 나도 열매를 맺고 싶어요”
“그래, 그래야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먼저 꽃을 피울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아기 고로쇠는 꽃이 펴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꽃이 피지 않았다. 몇 번이나 봄이 오고, 겨울이 오고,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고 했으나 꽃은 피지 않았다.
아기 고로쇠는 기다리다 못해 엄마한테 다시 물었다.
“엄마, 나는 왜 기다리는데도 꽃이 피지 않는 거야?”
“그건 네가 진정으로 기다리지 않았기 때문에야. 진정으로 한번 기다려 보렴.”
아기 고로쇠는 엄마의 말씀대로 꽃이 피기를 진정으로 기다렸다. 어떻게 해야 진정으로 기다리는 것인지 잘 몰라 기다랄 때마다 늘 별빛을 바라보았다.
그런 어느 해 봄날 아침이었다. 아기 고로쇠는 아침에 일어나 지신의 몸에 하얀 꽃송이들이 피어나 있는 것을 보고 놀라 소리쳤다.
“엄마, 나도 꽃을 피웠어!”
“그래, 너도 어느새 청년이 되었구나! 이제 너도 네 자신보다 이웃을 사랑할 때가 되었구나.” 엄마 고로쇠는 아들 고로쇠가 너무나 사랑스러워 바람을 따라가 아들 고로쇠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 때 백운산을 올라오는 사림들의 소리가 두런두런 들렸다.
“정상에 있는 놈일수록 맛이 아주 좋아. 약효도 더 뛰어나지. 위장병, 신경통, 관절염뿐만 아니라 변비나 산후통 등 아픈 데라면 두루 다 좋아. 오죽하면 골리수骨利樹라고 했겠나. 나무 수樹자말고, 물 수水 자를 써서 골리수骨利水라고도 하는데, 통일 신라 때 도선국사가 마시고 무릎이 펴졌다는 얘기가 있어. 도선국사가 백운산에서 몇 달 동안가부좌를 하고 나서 일어서려는데, 무릎이 잘 펴지지 않더라는 거야. 그래서 바로 옆에 있던 고로쇠나무를 붙들고 일어서려고 하는데, 그만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그 나뭇가지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그 걸 마셨더니 당장 무릎이 펴졌다는 거야.”
쉰은 족히 넘은듯한 점퍼 차림의 사내 이야기가 끝나자 또 한 사내가 말을 이었다.
“뜨끈뜨끈한 병에서 오징어나 북어를 고추장에 푹 찍어서 골리수랑 같이 먹으면 끝내 주는 거지. 골리수는 아무리 많이 먹어도 탈이 없어. 먹고 싶은 만큼 먹어도 돼. 어이구, 그런 말을 하니 목이 칼칼한 게 막걸리처럼 한 대접 푹 들이키고 싶네.”
아기 고로쇠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무서워 얼른 고개를 다른 데로 돌렸다. 그러다가 그만 그들과 눈이 딱마주치고 말았다.
“오호, 요놈 아직 한번도 물을 뺀 적이 없는 어린 놈이구나. 넌 아주 특효야, 특효!”
점퍼 입은 사내가 마치 보물이라도 발견했다는 듯이 아기 고로쇠를 보고 쾌 소리쳤다. 그러고는 가방에서 이런저런 물건들을 꺼내더니 아기 고로쇠의 몸에 드릴을 갖다 대었다.
아, 아기 고로쇠는 너무나 아파 한순간 기절을 하고 말았다. 그가 깨어났을 때는 사람들 손가락 굵기 만한 작은 구멍이 몸 여기저기 여러 군데에 나 있었다.
아기 고로쇠는 너무 무서워 아무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그저 사람들이 하는 짓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사람들은 곧 그 구멍에다가 비닐 호스를 부착시켰다. 그리고 그 끝에 커다란 플라스틱 약수통을 갖다 놓았다.
곧 아기 고로쇠의 몸에서는 물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한번씩 밭은기침을 할 때마다 몸 안에 있던 수액이 울걱울걱 비닐 안으로 흘러 내렸다.
아기 고로쇠는 가슴이 덜걱 내려 앉았다. 이러다가 이대로 죽는 것이 아닌가 싶어 급히 엄마를 쳐다보았다. 엄마도 맨살에 호스가 꽂힌 채 울걱울걱 수액을 토해내고 있었다.
“엄마 안 아파요?”
“아프지만 참는다. 아가야, 너도 아프지만 참아라.”
“엄마, 도대체 사람들이 왜 이러는 거예요? 엄마, 이건 우리의 피와 누물이에요.”
“아가야, 우리의 피눈물이 사람한테는 약이 된다니까 우리가 좀 참도록 하자.”
“아니에요,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에요.”
아기 고로쇠는 너무나 화가 났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사람들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 꽃을 피운다고 했는데, 정작 사람들은 엄마의 몸에 상처를 내고 수액을 빼내 가고 있지 않는가.
“엄마, 난 약이 되게 하지 않을 거야. 사람들한테 독이 되게 할거야”
아기 고로쇠는 입을 앙 다물고 말했다.
“그러면 안 된다 아가야. 그래, 우리는 조상 대대로 약이 되게 하면서 살아왔어. 그게 우리의 삶이야.”
“아가야, 모든 사랑에는 희생이 따르는 거야. 회생 없는 사랑은 없어. 사랑한다는 것은 희생한다는 것이야. 아가야, 울지 말고 내 말을 잘들어라. 회생 없는 자비가 어디 있느냐. 자기 몸을 내어 주는 것만큼 더 큰 자비는 없다. 우리는 그런 사랑과 자비를 보여 주려고 이 세상에 태어난 거야”
아기 고로쇠는 엄마의 말씀을 들으며 점점 정신을 잃어 갔다.
먼 데서 뻐꾸기가 울고 백운산에 봄은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드릴로 구멍을 내고 고로쇠나무의 수액을 계속 받아 마셨다. 그것이 고로쇠 나무의 피와 눈물임을 애써 외면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