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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얼마나 회향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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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도윤 1999년 04월 206호
아침 저녁으로는 바람이 쌀쌀하나 들녘엔 어느새 봄빛이 완연하다. 아직 새 잎사귀를 달지 않았건만 힘차게 물오르고 있는 가로수를 보고 있노라면 자연의 신비와 아름다움에 경건해지지 않을 수 없다. 내일 모레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인데도 봄이면 활짝 기지개 켜는 그들의 순환이 처음인 듯 놀랍고, 생명감이 깊게 전해 옴을 느낀다.
계절의 순환에서 봄이 첫 문턱이듯, 행자시절은 출가자의 첫걸음이다. 첫걸음을 어떻게 디디느냐에 따라 길이 달라지기 마련이어서 출가수행자에겐 행자시절이 목표 지점에 연결되는 중요한 첫출발이 아닐 수 없다. 요즘 종단에서 행자교육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 것은 그런 뜻에서 바람직한 일이다.
나에게 행자시절은 출가 전에 익힌 것들을 모두 털어내고 아주 깊이 하심한 시기였다. 그리고 좋은 스승을 만나 참사람이 무엇인지 깨우치던 시기이기도 했으니 , 짧은 기간이었으나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광복과 동족과의 전쟁, 4 -19 같은 격동기를 거친 내가 서른이 다 된 나이에 속리산 복천암을 찾았을 때는 이상과 현실의 조화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 만큼 안 뒤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 선산에서 두 해 남짓 농사를 지으며 농촌운동을 꾀해 보았으나 개인의 힘으로는 불가능함을 체험하고, 살기 어려운 탓으로 접어둔 학문에의 갈증으로 찾아간 곳이 복천암이었다. 속가의 당숙인 김동화 박사가 거기에 계신 관응스님을 소개해 준 것이 내 출가에의 첫 인연이었다. 그저 공부나 실컷 해 보자는 욕심으로, 한 삼년 스님 밑에서 지도 받고 싶다는 내 말을 들은 관응스님께서 삼십 년 있을 생각을 해야 한 ‘삼년 있게 되는 게 절집 생리이지’하시며 , 다른 말씀 안하고 거두어 주셨다. 나름대로 고뇌에 싸여 있던 내게 관응스님은 이 세상사람이 아닌 듯싶었다. 깨끗하고 고고한 모습을 어찌 학과 비교할 수 있을까. 천진난만한 외양과 총명함과 생기를 담고 계셨고, 말씀 하나하나가 물욕을 떠나 있었다. 비로소 진인眞人을 대한 듯 온몸으로 느낀 전율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구도자란 무릇 누구에게나 그러한 떨림을 줄 수 있어야 하리라. 오랜 시간, 혼신을 다해 정진했을 때만이 그러한 힘을 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 복천암엔 학인 일고여덟 명과 행자 몇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깨끗한 모습에 나이는 나보다 거개가 밑이었으나 성숙해 보였다. 머리를 기르고 양복을 입은 채 그들과 함께 있자니, 내 모습이 마치 소시장에 말 매어 놓은 듯한 것이 군더더기 그 자체였다. 하여 사흘 만에 옷을 빌려 입고 머리를 깎고 행자로서 그들과 합류했다.
관응스님을 따라 직지사로 옮겨가기까지의 석 달은 출가 생활 가운데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공부하고 나무하며 그들과 함께 그 곳에 있는 것말고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던, 완벽하게 순수한 시간이었다. ‘서장’을 함께 읽으며 공부하는데 그렇게 재미있고 좋을 수가 없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균형된 조화를 이루는 일이 행복의 큰 조건 가운데 하나일진대, 우린 그 때 스승과 대중, 대중과 스승이 하나가 되었으니 , 일체가 됨이 무엇인지를 체험했다.
사람이 사는 데에서 남과 나 모두에게 상처를 주는 것 가운데 하나가 교만이며, 아만이다. 수행자에게도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아만을 버리는 일이다. 행자시절이 중요한 것은 그 때가 아만을 버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자신이 출가하기 전에 익힌 모든 것을 그 시기에 놓아야 한다. 자신이 누구라는 것, 무엇이었다라는 것, 얼마만큼 알고 있다는 생각을 다 떨쳐 버리고 백지 상태로 돌아가야 하는 시기가 행자시절이다. 나는 그 때 그 곳에 있던 대중이 거의가 나보다 나이가 적었으나 다 스승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청결하고 한치 어긋남 없는 생활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때 내가 대중보다 나은 게 있었으니 , 다름 아닌 나무를 해 져 나르고 농사 짓는 일이었다. 학교 다닐 때 씨름이며 수영을 익힌 덕도 있거니와 학비를 충당하려고 방학이면 했던 노무자 생활과 출가 전에 농사를 지은 경험으로 늘 남보다 서너 배 되는 나뭇짐을 져 나르고, 모심고 벼 베는 일에 언제나 일등이었다. 다 떨어진 고무신을 신고 일하고 공부하는 데에서 복이 솟아남을 느끼던 시절이었다.
복천암에서 직지사로 오니 입승으로 우룡스님 , 강사로 지금 총무원장인 고산스님, 주지로 봉인스님이 주석하고 있었다. 관응스님께서 섬세하고 간결하며 틀린 것은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 성품이었다면, 봉인스님은 호인이요 무애도인이었다. 때로는 실수도 하던 그 분이 하루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살다 보면 좋은 때도 있고 나쁜 때도 있기 마련이니, 인생이란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다.”
간결했으나 그 말씀이 내 가슴을 후려치며 지나갔고, 선도리輔道理를 그 말씀에서 배웠다. 한번은 또 지나가는 나를 불러 이런 말씀을 하셨다. “돼지를 보았는가. 그들은 구정물을 먹고 살지만 많은 것을 세상에 회향한다.” 세상엔 공것이란 결코 없는 법, 얻어먹은 만큼, 아니 그 보다 몇 배로 갚아야 한다는 스님의 말씀을 평생의 귀감으로 삼아, 내가 세상에 회향할 바가 무엇인지를 늘 염두에 두고 살게 되었다.
자비와 엄격함을 함께 갖추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제자를 두루 살피시다가도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앞뒤가 안 보일 만큼 호되게 나무라시던 관응스님께서는 나를 무척 아끼셨다. 학인들에게 내·외전을 두루 익히게 하고자 한 스님께서는 대학에서 동양사를 전공한 내게 국사와 동양사를 강의하도록 배려하셨다. 행자와 학인의 위상은 하늘과 땅 차이, 해서 한자리에 편히 앉지도 못함은 물론 무릎을 꿇고 있어야 할 만큼 규율이 엄격하던 그 때의 직지사 법도이고 보면 파격이 아닐 수 없었다. 관응스님께 귀여움을 받은 덕에 행자로서 늘 스승으로 여기던 학인 스님들을 가르쳤으니 황감한 노릇이었다.

행자 생활을 한해 만에 마치고 관응스님을 은사로, 또 계사로 모시고 계를 받은 지 어언 사십여 년이 흘렀다. 그저 땀을 흘리지 않는 불한당不汗黨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은사스님의 가르침대로 열심히 정진하여 사물을 바르게 보고 바르게 행동하려고 한평생 애썼으나 세상이 내게 준 것보다, 그리고 내가 깨달은 것보다 얼마나 더 세상에 회향했을까. 지금 이대로 온전하게 세상에 회향할 수 있을 만큼 잘살았는가, 봄이 오는 길목에서 가만히 반문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