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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기독교의 통일을 위한 만남과 협력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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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오충일 1988년 09월 79호
1. 시작말
한마을 이웃에 살면서 인사 한번 못하고, 노상에서 만나서도 멋적게 빗겨가듯이, 불교와 기독교의 관계가 그러했던 것같다. 실은 고난의 민족사 속에서 함께 살며, 민족과 민중의 고통에 함께 동참하고 협력했어야 할 두 종교가 한번도 제대로 만나 본 적이 없었다. 종파와 신앙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 끝내는 사람과 사람 사이마저 이토록 갈라 놓을 수 있는 것일까? 필자는 종교 문제로 잃어 버린 옛 친구의 생각을 떠올리고 있다. 종교가 사람을 만나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다르기 때문에 헤어져야만 했던 가슴이픈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의 어리석음과 어둠을 반성한다.
오늘 한국 사회는 다종교의 사회다. 이많은 종파들이 한사회 안에 있으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르는 기능을 한다면, 결국 종교는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분열과 갈등의 역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금년 4월의 「해인」 특집 기사 ‘종교간의 갈등 해소를 위하여’를 읽으면서 속으로 눈물이 흐름을 느꼈다. 불교와 기독교의 갈등. 아니 못난 기독교인들의 행태 때문에 불가에 걱정을 끼치고 있음을 보고 부끄럽고 미안했다. 석가세존과 예수 그리스도가 동시대에 계셨다면, 아니 지금 여기셔 만나셨다면, 오늘의 제자들인 불자들과 기독교인들처럼 빗겨가거나 반목하는 관계를 가질 것인가! 아무래도 그럴 것 같지는 않다.
더구나 지금 우리는 매우 중요한 민족사적 대과제를 앞에 두고 있다. 지난해 6월부터 민중에 의한 민주화의 대장정이 진행되면서, 금년부터는 통일 논의와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조국과 민족의 분단 반세기를 살아오면서 분단 극복을 위한 불교와 기독교의 연대와 공동 투쟁이 없었음은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1919년 3.1 독립 만세 운동때 불교, 기독교, 천도교 대표들이 종파를 초월하여 항일 독립 운동에 연대했던 것처럼, 지금 우리 불교도들과 기독교도들은 이 민족의 최대 과제인 민족지주, 평화, 통일을 이룩하기 위하여 함께 만나고 힘을 합해야 할 때다. 이 일을 위하여 기독교 목사인 필자는 이 짧은 글을 불가에 바친다.

2. 불교와 기독교는 만날 수 있다.
불교도 그러하겠지만, 기독교는 그 본래의 기독교가 있고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기독교의 모습이 있다. 지난 이천년의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역시적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상관없이 때로는 가르침에서 크게 벗어나거나 역행했던 예가 허다했다. 한반도의 한민족에게 포교된 기독교는 1882년 한미 수호 조약 이후 공식적으로 전래되었다. 서세동점의 세계사적 흐름을 타고 이땅해 전도된 것이다. 따라서 이 기독교는 팔레스타인의 갈릴리 예수와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들어 온 것이 아니고 중세 유럽의 기독교, 미국의 기독교를 거쳐 이곳에 왔다. 그러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의 긴 옷은 벗겨지고 서양 근세의 양복과 넥타이를 매고 왔다. 서양 문화의 옷을 입고 들어온 기독교의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한국인들은 서양의 문화까지 복음으로 받았다. 유일신 신앙과 함께 서양문화의 옷을 입은 복음의 수용은 곧 이땅의 샤마니즘과 무신론의 불교나 기타종교와 대립하게 되었고, 나아가서는 이 민족의 전통 문화와도 마찰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런 점들이 기독교가 이땅에 들어와서 타종교와 전통 문화와의 관계에서 갈등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근대에 들어와 한국의 기독교는 복음과 서양문화를 구별하게 되었고, 갈릴리 예수의 만남과 함께 한국 기독교 지천의 신학인 ‘민중신학’을 정립해 가고 있다. 예수와 하나님 나라 선포가 이천년 전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민중에게 있어선 역사적 구원의 복음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제국주의 식민 통치 세력인 로마, 로마와 결탁한 반민족 반민중 지배 세력인 헤롯왕, 그리고 민족,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구조 속에서도 변혁을 원하지 않는 보수 세력들과의 치열한 싸움이 곧 예수와 초대교회의 종교 운동이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이러한 점은 인도의 계급 사회 속에서, 그리고 철저히 불평등한 계급사회 구조를 지탱하는 모든 관념, 이념, 제도들 속에서 인간 해방-해달을 선언하여 ‘깨달음으로 성불’ 하는 길을 보이신 석가세존의 가르침과 다름이 아니다.
교리나 신앙 행태에 있어 다름이 있지만, 석가의 자비나 예수의 사랑, 한 개체인간 생명의 절대적인 존엄성, 경건과 순결, 자유와 평등, 섬김과 나눔의 진리들에서 서로 다름을 구별하기란 어렵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하고 민족과 민중의 고통을 해결해야 한다는 시급한 명제 앞에서 이제 불교와 기독교는 종파•교리의 문제를 논하고 있을 이유가 없다. 공론을 하다가 사람이 죽는다면, 불교나 기독교는 다 함께 이땅의 민중들로부터 돌을 맞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불교, 기독교를 말하기 이전에, 이 민족 전체가 살아야 할 과제, 민족의 자주, 명화, 통일을 기필코 성취해야 할 역사적 부름에 함께 응답해야 한다.

3. 반전•반핵, 자주, 평화, 통일 운동을 전개해야 산다
일제 지배 삼십육년간의 민족의 수치와 민중의 고통도 헤아릴 수 없었지만, 분단 사십사년간 두 동강난 강토와 민족의 분탄으로 이 민족이 지는 고난의 짐은 그에 못지 않다. 지구촌 오십억의 인류 중에 동일 민족간에 자기 땅을 오도 가도 못하는 것은 한반도의 한민족뿐이다. 이러한 민족적 수치와 아픔을 안은 채 인류의 평화제전인 제 24회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있다. 같은 민족간에 증오와 적개심으로 차서 원수로 삼고, 전세계 어디에도 없는 가공할 군사적 대결을 하면서, 군사 무기가 안보-평화를 지킨다고 억지를 쓰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다. 남북의 사회는 군사체제의 사회, 군사문화사회, 군사교육사회로 되었고, 이러한 사회에서는 자비, 사랑이 싹도 트기 어렵다. 더구나 미국이 남한 땅에 갖다 놓은 가공할 핵무기들과 이에 대응하는 소련의 핵무기들 속에서 민족의 생명, 한반도의 평화를 구한다는 것은 산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이다.
이토록 무서운 핵과 군사적 대결, 민족간의 증오심이 생긴 것들은 모두 분단에 뿌리를 두고 있다. 분단도 민족고통의 뿌리고, 민중 수탈의 틀이며, 독재의 온상이고, 민족적 죄악의 원인이다. 하늘도 땅도, 조상도 후손도 원치 않는 이 분단의 시대에 하루를 살면 하루만큼 죄를 짓고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한반도의 분단 원흉은 세계 동서 분단의 원흉인 미국과 소련이다. 그리고 이 분단외세에 놀아난 민족분열주의자들이다. 이념과 계급에 앞서 민족이 있어야 한다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 남북 오천만 겨레의 어리석음이다. 분단이 없었다면, 이땅에 전쟁도 없었을 것이고 핵도 없고 독재도 없었을 것이다. 이제 분단은 계속될 수 없다. 지난 6.10, 8.15 남북학생회담에서 이땅의 청년학생들이 보여준 분단 거부의 결연한 의지와 강렬한 몸짓은 분단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음을 보여 주었다.
저들은 ‘반전•반핵, 양키고홈’의 노래와 구호를 외치면서 민족의 자주와 평화, 통일의 과제를 우리 눈앞에 성큼 당겨놨다.
모든 분단 외세와, 외세와 결탁한 민족내 반통일 세력을 몰아내야 한다. 이것들이 있는 한 이 민족의 고통과 죽음은 끝날 날이 없다.
평화! 자비•사랑이 넘치고 정의가 강같이 흐르고 그래서 모든 생명이 꽃피고 노래하는 한반도, 한민족의 사회를, 평화 민족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바로 그 길은 통일의 길이다. 한 생명이 절대지존의 값이고, 한가족의 복이 크다면, 칠천만 민족의 생명과 번영, 영광을 위하는 통일의 길을 열기 위해 불교와 기독교가 아끼고 남겨야 할 것이 있을 수 없다. 이 길에 우리와 모든 것을 바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자기 기만이다.

4. 통일의 희망이 있다
불교, 기독교, 유교 등 다종교의 사회인 우리 사회는 종파간의 분열, 대립, 반목을 지양하고, 종교간에 대화, 협력, 연대한다면, 어느 민족 사회보다 풍부한 삶을 살 수 있다. 우리는 동서의 어느 민족보다 더많은 모순과 문제들을 가지고 있지만, 이땅의 제종교들이 그 지혜와 힘을 합한다면, 동서의 모든 지혜와 힘을 이 민족 문제 해결에 쓸 수 있다. 지난 날의 교리, 종파주의 전통, 제도 등의 껍질을 벗고, 새날의 새역사 창조, 새로운 민족 공동체 형성을 위해 함께 만나고 함께 일한다면 이 민족의 내일은 희망에 찬다.
다행히도, 우리는 근년에 들어 북한에 불교와 기독교가 존속하고 있다는 소식과 북한 신도들의 형편과 실상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불교의 경우는 비록 6.25 전쟁 기간에 이백여 개의 사찰이 폭격으로 파괴되었지만 육십 개가 넘는 사찰과 불교신도 일만 명, 승려 삼백 명이 있고, 조그만 암자에도 신도들이 있어 불공을 드리며, 불교 단체에서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불교 강습회를 개최하고, 많은 젊은이들이 불교를 공부하고 있다는 기쁜 소식이 있다.
또한 북한의 불교인들은 조선 불교도 연맹을 중심으로 하여 활동하며, 최고 주권 기관인 인민회의에 불교 대표자가 참석한다고 전한다.
기독교의 경우도 신도 일만 명, 목사 이 십여 명, 교회당 건물은 없지만 가정예배 처소가 평양에만도 사 오십 개소가 있고, 삼년제 신학교가 있고, 신구약 성서가 출판되었고, 찬송가가 있고, 조선기독교도 연맹이 있어 불교의 경우와 같이 활동한다는 사실을 수차의 북한 방문을 통해 확인했다. 최근의 소식으로는 금년 십일월에는 평양에 이백 명 규모와 교회당을 준공하게 된다고 한다.
비록 교세는 작다 하더라도 이처럼 북한에 불교와 기독교가 존재하고 신도들이 있다는 사실은 민족 통일을 이루기 위해 남북의 불교, 기독교가 크게 공헌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특히 북한의 불교는 민족과 오랜 세월을 같이 살아온 민족 종교로서의 지위를 가지고 있고, 1966년 이래 우리의 역사와 문화의 우수한 전통을 보전, 발전시켜야 한다는 정책하에 전쟁중 파괴된 사찰과 문화재의 발굴, 복구 작업이 추진되었다.
불교에 비해 기독교는 공산화 초기에 반공 투쟁을 전개해서 북한에서는 기독교가 미제의 앞잡이였다는 전제하에 박해를 받았고, 남한의 교회가 대부분 아직도 반공•친미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므로 통일 운동의 전개에서 기독교는 어려움이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북의 불교와 기독교가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데 공헌하고, 민족의 주체성과 자주성을 지키고 민족 문화를 창조하고, 민족 동질성과 민족 정신을 고양하는 데 기여할 때, 그 때에 비로소 불교와 기독교는 이 민족 앞에 민족의 종교로서 자리하게 될 것이다.

5. 마침말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 통일의 기운이 민중으로부터 솟구치고 있다. 세계의 흐름이 또한 평화로 가고 있다. 유럽에서 핵무기가 제거되고, 동서독이 화해와 통일로 가고 있고, 대만 사람들이 북경을 오가고 있고, 기나긴 이락•이란 전쟁이 끝났다.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통일은 우리에게만 아니라 아시아•세계 평화를 위해서도 기장 중요한 일이다.
이때, 이땅의 불교와 기독교는 깨어서 이 역사적 소명에 응답하고 나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끝으로 하나의 제안을 낸다. 불교, 개신교, 가톨릭 둥의 제 종파 대표자들이 종교간의 대화와 협력, 그리고 민족 자주와 평화, 통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종교협의회’를 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이 협의회를 통하여 민족을 위한 구체적 사업을 논의하고 연대하여 공동의 사업들을 추진함으로써, 이 민족의 민족적 에너지를 하나로 합하고, 분단의 벽을 헐어 민족의 활로를 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