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당시에 세상에는 사성(四姓)의 차별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라문, 찰제리, 바이사카, 수드라였다. 이 사성 가운데 바라문이 가장 높아 다른 세 가지 성은 항상 바라문을 존중하고 공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들의 귀천은 그 족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상과 행동에 귀함과 천함의 구별이 생길 뿐이라고 말씀하셨다. 만약 오늘날과 같은 전산화 시대에 부처님이 출현하셨다면 무슨 말씀을 하실까 생각해 본다.
아무리 사람이 빼어난 능력과 지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컴퓨터만큼 많은 정보를 기억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러한 기억력뿐만 아니라 자제력과 자신의 모순까지도 꿰뚫어 보는 무한의 능력을 갖추셨다. 그리하여 바라문의 뛰어난 제자인 마납이라는 이에게 위없는 지혜와 행의 구족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마납아 만일 여래가 세상에 나타나면 그는 응공(應供), 정변지(正遍知), 명행족(明行足), 선서(善遊), 세간해(世間解), 무상사(無上士), 조어장부(調御文夫), 천인사(天人師), 불(佛), 세존(世尊)이다.
그는 일체의 모든 하늘, 세상사람, 사문, 바라문, 하늘악마, 범왕 중에 있으면서 홀로 깨달아 스스로 증명했다. 남을 위해 법을 설명할 때에는 윗 말도 좋고 가운데 말도 좋고 아랫 말도 또한 좋으며 의미를 구족하여 청정한 행을 행하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 바른 법을 듣는 사람은 누구나 곧 믿음과 즐거운 마음을 내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 믿고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모든 바른 수생인과 같이 장식을 버리고 모든 계행을 구족해 가려고 할 것이다.
곧 중생을 해치지 않고 칼과 몽둥이를 버리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가지며 일체를 어여삐 생각한다. 이것을 중생을 죽이지 않는 것이라 한다. 도둑질하는 마음을 버리어 주지 않는 것은 취하지 않으며, 그 마음은 청정하여 가만히 가지려는 생각조차 없다. 이것을 도둑질하지 않는 것이라 한다. 음욕을 버리고 범행을 깨끗이 닦기를 은근히하고 정진하며 욕심 때문에 물들지 않고 정결하게 머무른다. 이것을 간음하지 않는 것이라 한다. 거짓말을 버리고 지성으로써 속이지 않으며 남을 놀리지 않는다. 이것을 거짓말하지 않는 것이라 한다. 두 말을 버린다. 비록 이 말을 들었더라도 저기에 전하지 않고, 비록 저 말을 들었더라도 여기에 전하지 않으며, 갈라지는 이가 있으면 잘 화합하여 서로 친하고 공경하게 한다. 무릇 말하는 것은 화하고 순하며 또 때를 안다. 이것을 두말하지 않는 것이라 한다. 악구를 버린다. 말하는 것이 추하고 악하여 남을 괴롭히고 성내게 하는 그런 말을 버린다. 그 말은 부드럽고 연하여 원망하거나 해치지 않고 님에게 이익됨이 많으며 모든 사람이 공경하고 사랑하여 그 말을 듣기를 좋아한다. 이것을 악구하지 않는 것이라 한다. 꾸밈말을 버리어 때를 알아 말한다. 성실하여 법다우며 율(律)을 따라 다툼을 없앤다. 인연이 있으면 말하고 말을 헛되게 하지않는다. 이것을 꾸밈말을 버리는 것이라 한다.
이상적인 인간은 어떤 속성을 가진 사람일까. 지성과 덕성과 발성을 갖춘 이를 나는 생각한다. 이 삼요소를 구비한 사람은 빈약함이 없는 보람된 생을 창조한다고 본다.
첫째로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선택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판단하고 선택하며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지성은 인간의 첫째가는 행동의 도구이다. 지성은 인간의 도구 중에서 가장 강하고 빛나는 도구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지혜를 빛에 비교한다. 밝음 속에서 사물을 볼 때는 조금의 잘못도 범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지성은 분류하고 분석하고 측정하고 추리하고 비판하고 기억하고 이해하고, 예견하고 사고하는 모든 것의 종합이다. 지성은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분석하며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지성은 강하다. 그러므로 힘을 갖는다. 인간이 환경에 적용하고 사회에서 행동할 때 강한 의지가 없이는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다. 이러한 추진력도 힘에 의한 것이고 이 힘을 나오게 하는 것은 강한 믿음에 바탕한다. 이러한 믿음으로 용기를 갖게 하는 것은 희망이요 이 희망을 설정하는 것은 지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지혜는 처음에서 마지막까지 강조되어 왔다.
둘째로 인간은 덕성을 가져야 한다. 덕성이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도덕적 바탕이다. 그것은 양심이요, 성실이요, 정의요, 뉘우침이요, 자신의 성찰이다. 덕성이 없는 지성은 이율배반적일 수 있다. 덕성이 없는 지성만으로는 불의와 결탁하고 부패의 원인이 되고 부정의 노예가 되며 파괴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현대 한국 사회의 비극은 지성만 난무한 채 덕성이 결핍되어 생긴 것이다. 왜 알면서도 실행하지 못하는가. 지와 행의 괴리가 생기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지식만이 인생의 제일인 것처럼 착각하는 우리의 병든 가치관 때문이다. 현대의 지식주입식 교육에서 하루 빨리 해방되어야 한다. 그래야 남과 협동하는 태도, 남의 잘못을 용서하는 너그러움, 거짓을 미워하고 진실을 사랑하는 양심, 겸손과 양보, 예의와 염치 등이 있는 성품을 갖추게 될 것이다. 이러한 덕성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동물이면서도 이 차원을 벗어나 힘에 전락하지 않고 만용을 지배하여, 불행으로부터 소중한 삶으로 나아가게 되며 건전한 사회와 인간다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것이다.
세째로 복덕성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복덕이란 물질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사람은 하루에 한번쯤 남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의 생활과 행복을 위해서 바쁜 생활을 하고 있다. 언제나 자기 중심으로 행동하고 자신의 일에 골몰한다. 첫째 내 몸, 그 다음 자식, 내 가정, 항상 이와 같이 자신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나를 중심으로 뱅뱅 돌아가는 쳇바퀴의 생활이다. 그러나 적어도 하루에 한번쯤은 이 테두리에서 벗어나 남을 위하여 봉사하는 일을 해야 한다.
주고받는 계산을 초월하여 오로지 주고 싶은 마음으로 용감하게 실천해야 한다. 꼭 물질적인 도움만은 아니다. 정성스러운 마음에서 나오는 밝은 웃음과 따뜻한 인정의 한마디 말도 좋다. 그리고 내게 오는 모든 음식물과 의복과 자연에 까지라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자. 불평과 불만이 없는 것이 최상의 복덕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이러한 생활 태도는 자신을 즐겁게 하고 우리 사회를 밝고 명랑하게 할 것이다.
얼마 전 서울특별시장이 어떻고 제주시장이 어떻다더니 이제 심지어는 교육계에서도 서울특별시 교육감이 어떻다는 신문의 보도가 있다. 마음의 밭에 지성과 덕성과 복성을 갈무리하는 방법이 바로 마납에게 말씀하신 부처님의 뜻이라 여긴다.
인생이 따분하고 삶의 의미가 느껴지지 않을 때에는 전선에 땀을 흘리는 일에 몰두해 볼 일이다. 그리하면 생의 위대함, 아름다움, 그리고 값있고 알찬 것들의 존재 가치를 인식하고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해인사에서는 언제나 삼천배의 예배를 올린다. 우리의 마음에 허영과 사치의 때를, 안일의 자취를 씻어내고 홀가분한 마음과 산뜻한 물의 건강함을 함께 하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