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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의 인물열전(人物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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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향기 - 시명 1988년 09월 79호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 (中)
대각국사가 모후(母后)인 인예왕후(仁睿王后)의 간청에 의하여 송나라를 떠나 고려로 돌아온 것은 선종(宣宗) 3년 서기 1086년 6월이었다.
여행 기간은 14개월에 불과했으나, 그 성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화엄교학에 있어서 그 당시 송나라 학계는 무종(武宗) 회창(會昌)의 법란(法難)과 구대(九代)의 병화(兵火)로 인하여 그때까지 내려오던 불교 전적들이 거의 산실(散失)되어 있었다. 그래서 대각국사는 화엄교학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귀중한 지엄(智儼)의 저술 공목장(孔目章), 화엄수현기(華嚴搜玄記), 무성섭론소(無性攝論疏), 기신론의기(起信論義記) 등과 법장현수의 저술인 화엄탐현기(華嚴探玄記), 기신론별기(起信論別記), 법계무차별론소(法界無差別論疏), 섭이문론소(十二門論疏), 삼보제장문(三寶諸章門) 등과 또한 청량(淸凉)국사의 저술인 정원신역화엄경소(貞元新譯華嚴經疏)와 규봉종밀(圭峰宗密)의 저술인 화엄론관(華嚴論貴) 등을 송나라로 가지고 가서 논의하였다. 송나라의 불교학자들은 이 책을 보기 위하여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결국 대각국사의 송나라 여행은 이미 중국 불교계에 없어져 버린 화엄교학의 장소(章疏)들을 다시 고려에서 송나라로 반전(返傳)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국사는 송나라 화엄의 대가 정원(淨源)에게서 일방적으로 강의를 받아들이지만은 않았다. 그는 좀더 폭넓은 논의를 통하여, 이전의 화엄교화, 특히 고려 초기에 정치•사회사적인 측면에서 국수적이었던 화엄교학에서 벗어나 범동아적(況東亞的)인 세계 불교로 발전시키려고 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화엄학을 정립하였다. 고려는 앞서 최강국인 거란의 침입을 모두 격퇴하였는데, 이는 문화적으로 우월함을 자부하는 송으로서도 이룩하지 못한 위업이었던 바, 국사의 사상적 흐름은 당시의 이러한 국제정세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곧, 국사는 고려의 국세가 국제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음을 깨닫고 고려불교도 국제적으로 우위에 있음을 나타내려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국제주의의 기치를 내세운 국사의 사상은 민중중심에서 개경 귀족 중심으로, 지방 중심에서 중앙 중심으로, 이적(異蹟)을 중요시한 지방불교에서 국제주의 교학으로 바꾸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의 이러한 경향은 그 시대의 추세와도 일치하는 점이라 하겠다.
그리고 국사는 송으로부터 돌아올 때 불경 장소(章疏) 삼천여 권을 수집하였는데 이것은 국사 개인의 원력으로 되었다는 점에서, 또한 절반 이상의 책이 아직 고려에는 소개되지 않은 것으로서 나중에 그의 큰 업적이 될 속장경의 기초를 마련하였던 점에서 현종 이래 시작된 대장경 주조 사업에 필적할 만한 업적이다.
국사는 송에서 귀국한 뒤에 선종(宣宗)의 칙명에 의하여 흥왕사의 주지가 되었는데, 흥왕사는 문종 10년에 착공하여 21년에 완성한 고려 최대의 사찰로서 이천팔백여 칸이나 되며 항상 천여 대중이 살고 있는 거대한 사찰이었다.
국사는 송나라에서 가져온 불경들을 이곳에 봉납(奉納)하고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였으며, 송과 거란, 일본에까지 사람을 보내어 그때까지 간행된 서적을 모아서 무려 1,010부 4,740여 권의 경전을 간행하였다. 속장경에는 중국학자들의 장소(章疏)를 포함하여 신라와 고려 학승들의 장소도 전부 수집하여 수록되었으며, 거란과 일본의 것도 수록되어 있으므로 참으로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흔히 대장경은 정장경(正藏經)을 중심으로 이루어지지만, 그 경전들에 대한 후대 고승석덕들의 주석서인 장소는 일찍이 수집된 적이 없었으니 대각국사가 장소를 수집한 것은 불교사에 길이 남을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속장경 간행을 위해서 그는 자신이 몸소 섭렵하고 수집한 장소류들을 하나의 목록으로 편찬하여 선종 7년에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을 만들었다.
이 총독의 상권에는 경(經)에 대한 장소 561부 2,585권이 실렸으며, 중권에는 율(律)에 대한 장소 142부 467권이, 하권에는 고승들의 논(論)에 대한 장소 307부 l,687권이 수록되어 있다.
장소에 대한 정리와 속장경의 간행사업은 25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는데, 이처럼 노력하여 만은 속장경이 지금은 거의 산실(散失)되어 안타깝게도 전하여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간경사업은 단순히 외국에서 서적을 수입하고 정리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원효를 비롯한 우리나라 고승들의 장소를 송나라에도 보내어 학문적으로 폭넓게 교류하였으며, 이것이 극히 교통이 불편하고 왕래가 어려웠던 시대에 이루어졌음을 감안한다면 얼마나 지난(至難)한 일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속장경에 대한 규모나 대충의 부수는 총독을 통해 알 수 있지만 간행한 연대와 간행사업, 진행상황 및 교장도감의 조직과 규모 등은 전하지 않아 자세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약간의 원간본(原刊本)과 중수 복간(複刊) 복사 등이 얼마간 남아 있어 대체로 거란의 대안(大安)과 수창(壽昌) 연간인 서기 1091년에서 1100년 사이에 시행되었음을 추측할 따름이다. 이를 통해서, 국사의 나이 37세에서 시작하여 47세로 입적할 때까지 약 10년에 걸쳐서 간행사업이 진행되었으며, 국사가 입적한 뒤에는 그의 유업을 받들어 국사와 가장 가까왔던 원경왕사(元景王師) 낙진(樂眞) 등이 이를 완성시켰음을 알 수 있다.
세수(世壽) 47세라는 짧은 생애 동안 오직 불교교학의 연구와 그 학문적 바탕이 되는 불경의 간행과 목록의 정리에 전념하여 이룬 국사의 위업은, 그가 고려불교사에서 가장 우뚝한 봉우리임을 말해 준다.
흔히 고려불교를 지칭할 때 5교양종(五敎兩宗)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는데, 5교라는 말은 특히 국사의 문집에서 자주 인용한 것이다.
국사는 화엄종 승려로서 송나라에 유학하였으나, 중국의 제종파의 고승들과 만나 담론하였으며, 특히 운문종(雲門宗)을 비롯한 선종이 활발했던 송나라의 불교에 대하여 교학의 겸학을 주장하였다.
특히 대각국사 문집 1권에서는 ‘구사(俱舍)를 배우지 않으면 소승(小乘)을 알지 못하며 유식(唯識)을 배우지 않으면 시교(始敎)를 알지 못하고 기신론(起信論)을 배우지 않으면 돈교(頓敎)를 알지 못하며 화엄을 배우지 않으면 원교(圓敎)를 알지 못한다 따라서 모두 필수불가결한 각각의 영역을 지니고 있으므로 겸학하여야 하며 얕은 데서 깊은 데로 들어가듯이 단계적으로 수도 과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국사는 교학을 중심으로 하면서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각(覺)의 겸학을 인정하였으며, 직관적이며 초월적인 돈오(頓悟)를 부정하였다. 그러므로 자연히 직관과 초월적 돈오를 주장한 운문종과 조동종 같은 종파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비판을 가하였으며, 어느 정도 교학적인 바탕을 가지고 있던 법안종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었다.
그 뒤로 천태종의 성립에 법안종 승려들이 중요한 기점이 되었으며, 모든 교학을 포용하여 화쟁(和諍)사상을 폈던 원효대사의 원융사상은 교관병수(敎觀幷修)를 주장했던 천태종의 성립에 대단히 중요한 사상적 지반이 되었다.
다음 호에서는 대각국사의 천태종 성립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