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은 늘 돌아다니셨다. 그래서 각계 각층의 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셨다. 오랫동안 그렇게 생활하셨으므로 그의 말씀을 전하는 경전의 분량은 매우 많다. 그러나 그가 지닌 원칙은 단순해서 매우 단호하고 엄격했다. 그는 늘 서두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원인을 보고 원인에 대하여 말합니다. 원인이 있고 관계가 있어 세계가 이루어지므로 원인이 있고 관계가 있어 이루어지는 세계라고 말합니다”라고
원인을 말한다는 것은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정직이 된다. 본 것을 보고 보지 않는 것을 보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평범한 말을 자신있게 할 수 있으면 정직하고 행복한 사람이다.
오늘날 우리의 정치 풍토는 본 것을 보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어난 것도 일어났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광주 민주 의거가 군부에 의해 저질러지고 그것을 일으킨 권력 지향형의 잘못된 군인들이 누구 누구인지가 확실한데도 발뺌하고 변명하고 그리고 숨기려 든다. 정직하기를 기대하지는 않지만 사실조차 시인하려 들지 않는다. 결코 그들에게 원인을 들을 수는 없는 것일까. 정직이 최대의 무기라고 했던 챔벌린의 얘기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정직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사회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승객의 안전을 무시하고 무리한 채찍을 휘두르는 마부와 같다고 하면 좀 점잖은 표현일 것이다.
너희 나라에 핵폭탄이 도대체 얼마나 있느냐. 만나는 외국인들이 심심찮게 묻고 있다. 나는 모른다. 우리나라에 핵폭탄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사랑하는 내 국토에, 내 국토를 다 태우고 내 동족을 다 죽이고도 남을 만큼의 핵폭탄이 있는지 없는지를 나는 모른다. 알고 있다. 그런데 모른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을 직접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직접 보았을 만큼의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그저 막연히 그만한 사람이 그렇게 얘기하는 객관적 정황에 의거할 뿐이다. 북한이 남한의 핵을 겨냥하여 사사건건 으르렁거리지 않는다면 어찌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으랴. 사실은 결코 은폐되지 않는다. 단지 시간이 있을 뿐.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사고 때 주위에 흩뿌려진 방사능 세슘 137의 양은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 오백개분에 해당된다고 한다. 원전 사고의 원인은 기계의 결함과 인간의 실수로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원자로의 핵융합 과정은 “사실을 본다”라는 매우 단순한 이론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엄청난 에너지의 원인은 미세한 원자들의 분열 때문에 생긴다. 누군가가 그것을 관찰했기 때문에 그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원인에 의해 자칫 위험하고 불편하지만 막대한 에너지가 웅변화되었다. 원인을 보는 정직한 태도가 없으면 정의로운 사회, 또는 선진 세계로의 도약은 결코 실현되지 않는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 권력이나 정부가 오래가지 못함은 근래 일어난 동남아시아의 민중 항쟁과 그 성공이 정확히 말하고 있다.
한반도와 그 주변에 배치된 핵무기를 주축으로 수립된 미국의 동북아 핵전략은 한국, 일본, 중국에 핵우산을 제공해 소련의 핵 공격력에 대응하면서 선제 공격력을 강화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그리고 동북아시아에 배치된 미국과 소련 두 나라의 전술 핵무기는 일백삼십 메가톤에 이르러, 히로시마에 떨어진 핵폭탄이 일만 곱절에 해당된다. (한겨례신문 81호) 대다수의 국민이 이것을 알까 모를까 주저하고 있는 정부의 태도를 보면서 몹시 허약하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결국 정직을 생명으로 하지 않는 권력은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는 꼴이 되어 버린다 이에 일어난 일을 왜 숨기려고만 드는가 정부의 그 사상의 취약함을 다시 한 번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은 우리나라에 배치한 핵무기의 규모 또는 위력에 대해서 공식적인 언급을 하지 않겠다는 비밀주의 원칙을 앞세워 왔다. 우리 정부 또한 미국 눈치를 보느라고 우리나라 영토 안의 핵무기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는 비자주적인 태도를 고집하고 있다. 필리핀, 일본, 서독을 비롯한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국민의 여론을 수렴하여 핵무기에 대한 각성을 일으키고 그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지혜를 정부는 언제까지나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세계의 여러 나라와 마치 전쟁과도 같은 경쟁을 통해 국력을 키우고, 다른 나라에 피해를 주지 않고 오히려 그 나라의 발전을 도와가면서 우리의 성장을 도모하는 고도의 전략에 의한 정책을 우리 정부가 수립해 주기를 바란다. 그런 바람 때문에 웬만한 잘못들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결국 판을 깨지 않기 위해 참고 있다. 그러므로 군림해서는 안 된다. 달리 말하면 사저로 돌아갔을 때를 살피라는 얘기다. 한반도의 정치 상황에서는 무엇보다도 정직한 것이 요구된다. 결코 유능한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 모두 다 유능해지는 것만 주장했었다. 그 때문에 결국 거짓말 투성이가 되어 버렸다.
노자는 말했다. 부드러운 것이 능히 강한 것을 이긴다. 강한 것을 주장하고 그것을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밀고 나온 북한의 현실은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을 주고 있다. 강한 군대는 무기가 좋은 군대가 아니다. 무기가 좋은 군대가 꼭 이긴다는 법은 없다. 미군이 월남에서 쫓겨간 교훈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국민에게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알리는 정부야말로 가장 강력한 정부요 신뢰받는 정부다. 권력의 정당성은 시간의 길이에 있지 않다. 권력 사실의 입증은 사상성과 행동의 바람직함에 있다. 국민이 그것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흔히 경거망동하는 발언을 서슴치 않는다. 권력의 유지를 위해 그 권력의 원천을 스스로 짓밟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선가에 발 밑을 살피라는 촌철살인의 격언이 있다. 생각이 짧은 사람이 행정부의 요직에 앉아 있다는 것은 국민들에게 매우 위험스럽게 보인다 여당, 야당, 군부 할 것 없이 독선적인 태도는 사라져야 할 것이다. 권력의 존재 이유는 대중을 위한 대중에 의한 것일 때에만 타당하다. 특정한 집단들의 대변인 노릇을 하는 꼬락서니들에 이젠 신물이 난다. 거기에는 여•야가 다르지 않다.
말이 난 김에 한 마디 더 해야겠다. 요즈음 학생들이 통일에 관하여 부르짖는 것은 정당한 부르짖음이다. 더러 과격한 논리도 있고 현실성 없는 부분도 있어 보인다. 때로 그것이 북쪽을 위해 이롭게 이용할 수 있는 소지도 있어 보인다. 그러나 학생들의 요구는 통일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매우 단호하고 절박하게 요구하고 있다. 통일은 결코 권력형 군인 정신에 의해 성취될 수 없다고 판단한 매우 이성적인 합리론에 근거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정부에게 학생들의 요구를 무조건 막을 것이 아니라 때로 우직스럽게 도와 줘 보는 것도 현명한 방법의 하나라고 권하고 싶다. 통일의 주체는 국민이지 소수의 권력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갈망해 온 통일의 염원이 권력의 힘에 의해 뚫리지 않고 있다고 보는 학생들의 시각은 실상 섬세한 민주 사회로의 이행 과정의 하나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옳다고 여겨지면 꿀 바로 실행해야 할 텐데 허우적거리는 정책이 오히려 통일의 길목을 가로막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이북의 실정을 모른다. 레이건이 기침만 크게 해도 서울의 날씨가 변한다는 속담이 생길 만큼 미국에 대해선 속속들이 들어서 알고, 또 개방 정책을 펴는 중공과 소련의 소식에도 익숙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가까운 복한에 대해선 그곳 민중들이 삼일절을 어떻게 치르고 광복절을 어찌 보내는지를 전혀 알 수가 없다. 왜 북한의 일을 알리기를 그토록 꺼리는 것인가, 아니 무서워하는 것인가. 그런 정신적 빈곤과 감정의 대립을 숨긴 채 만나서 무얼 얘기하자는 것인가. 서로가 서로를 범법자로 여기고 있으면서 어떻게 대화를 한다는 것인가.
6.29 선언을 한 지도 일년이 지났다. 이제 정치철학이 성숙할 시기가 아닌가. 진정 대화를 하고 싶으면 작은 것부터 풀어 나가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공산주의자와 대화를 하겠다는 사람들이 공산주의자의 연구 서적 출판사를 억압한다는 논리적 모순을 어떻게 해명할 수 있겠는가. 학생들의 눈에는 그것이 어설프게 보일 것이다. 뻔한 일이 아닌가.
학생들의 뜻이 백번 옳다고 해도 나는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 학생들이 던지는 화염병과 돌이다. “자기를 망각한 무분별한 행동의 과격함”이 아니고 무엇인가. 누구를 위해 화염병을 던지는가. 남북 대치의 살벌한 분위기에 불을 붙이는 짓이다. 전경들에게 화염병이나 돌을 던지는 행위가 어떻게 공산 압정에 시달리는 북쪽 민중을 해방시키는 힘으로 승화될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떤 폭력이든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학생들 스스로 그것을 실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작은 폭력은 더 큰 폭력을 사용하게 만드는 조건이며 원인이 된다. 학생들이 사용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철저한 무저항주의뿔이다. 결코 화염병과 돌맹이가 민주화를 가속시키고 통일의 염원을 성취시켜 주지 않는다. 과정은 결과 못지 않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른 식자들로부터 비난을 살 만한 비열한 행동을 결코 해서는 안 된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다 행복하라, 태평하라. 안락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