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님들께 보내는 편지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죽비의 소리 - 현기
1988년 08월 78호
오랜 가뭄 뒤에 단비인가 했더니 홍수입니다. 가뭄보다 더 큰 피해가 전국을 휩쓸었습니다. 이같은 물난리 속에서는 지역 감정도 종교 대립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저 홍수 피해자들에 대한 아픔으로 우리 모두는 하나됩니다. 이것은 인간 고통에 대한 경계를 초월한 자비의 나눔이며, 인간 사랑에 대한 또 다른 확인입니다. 물론 이러한 피해에 대한 실천적인 모습은 계층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심정적인 모습은 모두가 연민과 고통을 나누고자하는 사랑의 의식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듯 근원적인 사랑과 자비가 경계를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실천적인 모습으로 서로서로에게 각인되지 못할 때, 이것은 인간의식의 한 편린일 수밖에 없읍니다. 그리고 그것은 타인의 삶이나 자신의 삶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과 자비는 감정에서 출발하지만 그 사랑과 자비의 구체적인 표현이 없을 때, 곧, 실천적이지 못할 때. 그것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일에 홍수의 피해자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기도나, 염불로 그대의 애정을 표현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방임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구체적인 실천이란 어떤 물질적 시여(施與)만이 아닙니다. 그들의 삶을 통한 그대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가령 그대가 홍수의 피해자들의 아픔을 함께 하지 못하는 향락과 사치 속의 생활을 누린다면, 그대 감정에 싹튼 연민과 사랑의 감정은 무슨 소용이 있겠읍니까? 따라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의, 홍수 피해자들과 함께 나누는 아픔이고 사랑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홍수 피해자들뿐만아니라 가난한 자, 억눌린 자, 핍박받는 자들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해야 합니다.
불교에도 오랜 가뭄과 장마가 지속되고 있읍니다. 이러한 가뭄과 장마는 벼락과 천둥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가뭄과 장마는 승단과 교단의 피폐적인 모습일 것이고, 천둥과 번개는 하나의 계기가 되는 사건, 곧, 10.27 법난이며 신흥사 살인 사건일 것이며 봉은사사태일 것입니다. 그러나 천둥과 벼락은 장마 속에서 있는 것이요, 결코 장마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번의 봉은사 사태 속에서-매스컴의 확대 보도 및 왜곡 보도가 있었지만-실망과 회의를 누를 길이 없었을 것이고, 어떤 분은 기독교로 전향하겠다는 말까지도 서슴없이 내뱉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불교의 오랜 장마와 가뭄을 이야기하지 않고 단순히 벼락과 천둥만을 문제시한다면, 그 해결점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고 또한 그러한 신행은 결코 그대의 삶과 불교에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음을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그대는 무엇 때문에 불교를 믿었읍니까? 그대는 무엇 때문에 그 많은 종교 가운데서 불교를 택했습니까?
만일에 그대가 불교라는 집단 형상에 치우쳐 불교를 신행하였다면, 그대의 삶에 불교는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었을 것이고 부처님 역시 그대에게는 존재 가치가 없는 하나의 우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에 부분적인 벼락과 천둥에 의하여 그대의 신행과 가치관이 흔들린다면, 그대의 불교에 대한 신행은 철저하게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다시 묻고 싶은 말은 그대는 무엇 때문에 지금까지 불교를 믿었읍니까? 봉은사 사태로 그대의 신심이 흔들린다면 그대는 지금껏 맹목적인 신앙을 추종한 사람일 것입니다.
제가 앞서 말한 가뭄과 장마는 우리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한 외적인 작용을 말합니다. 식민지불교와 그 뒤의 요건-이 승만과 박 정희의 관제불교화, 그리고 전 두환 정권의 불교 탄압-들이 우리를 홍수 속에 떠밀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한국불교의 성격을 말한다면 관제불교(官製佛敎) 속에서의 내부 봉건성에 기초하고 있읍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주지 싸움은 정치와 사찰 제도의 비합리적인 운영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입니다.
원시불교 교단은 비구와 비구니로 구성되어 있읍니다. 그러나 대승불교 교단은 비구, 비구니, 청신사, 청신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대승불교의 제창자들도 엄격히 말해서 재가신도에 있읍니다. 따라서 대승불교에서는 출가(出家)의 의미도 새롭게 규정을 내리고 있읍니다. 삭발염의하고 승복을 걸쳤다 해서 출가자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재가불자도 엄격히 말해서 출가자라 말하고 있읍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불교의 문제는 승려들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재가출가자(신도)들에게도 책임이 있읍니다. 따라서 한국불교가 중흥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문제는 승단과 재가신도와의 상호 연계 속에서 풀어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의 기초적인 작업은 한국불교가 관제불교와 사찰의 봉건성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한국불교는 재가 신도들의 역할과 임무를 새롭게 재무장하지 않으면 안 될것입니다.
불자님들의 신심과 원력이 새롭게 출발하기를 기원합니다. 그 속에서 오랜 가뭄과 장마를 걷고 벼락과 천둥도 거두는 신도님들의 할(喝)과 봉(棒)을 기대합니다. 우리는 그대들의 교단에 대한 책임있는 신심과 애정을 요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