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흐르면서 종교는 분열한다. 불교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이른바 부파불교(部派佛敎), 종파불교(宗派佛敎)가 바로 그 결과이다. 이들의 분열 요인은 각양각색이다. 일차적으로는 교리에 대한 이견(異見) 또는 교단 내의 규약에 대한 성원(成員) 간의 불일치 등으로부터 기성 교단이 양파로 분열되는 것을 위시해서, 그 뒤로는 이와 같은 양상을 반복해서 분열 초기의 양파로부터 또 다른 분열이 계속 이어진다.
분열의 동기를 구성하는 여러 요인들은 그 분열사(分裂史)를 알아봄으로써 뚜렷해진다. 상좌부불교의 가르침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불교 최초의 부파 분열인 대중부(大衆部, Mahasamghikas)와 상좌부(上座部, Sthaviras)의 분열사를 통하여, 오늘날의 상좌부(Theravada) 불교의 가르침을 살펴보기로 하자. 최초의 분열로부터 출현한 본상좌부(本上座部, Sthaviras)를 통하여 그 후대에 출현한 상좌부(Thera-vada)의 가르침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는가라는 반문도 있을 줄 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그 둘 사이의 기본 태도에는 별로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후대의 상좌부는 본상좌부의 단순한 부활에 지나지 않는다. 곧 종지(宗旨)를 같이하고 있다는 말이다. 종지란 교리의 지엽적인 해석이며, 수평적인 교단 확장의 구심점이다.
제1차 전인도 불교도 대회
이루 말로 나타낼 수 없는 깊은 비탄에 잠긴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수브하드라(Subhadra)만은 부처의 열반 소식에 쾌재를 부른다. (사실 그 혼자만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부처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에 까스야빠(Kasyapa, 迎葉)는 법(Dharma)과 율(Vinaya)의 결집이 시급함을 절감한다. 아직 아라한과를 얻지 못한 아난다(Anan-da)를 포함해서 까스야빠에 의해 선출된 오백명의 아라한이 라자그리하(Rajagrha)에 모여 이윽고 제 1차 전인도 불교도 대회를 열었다. 이른바 ‘일차결집(一次結集)’이 바로 그것이다. 이 대회의 성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꼽을 수 있다.
첫째, 종교적인 면에서는, 범우주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질서를 회복하였다.
둘째, 현실적인 면에서는, 샹그하(Samgha) 전체의 결속과 아울러 사망 이후의 교주(敎主)의 지속적인 권위를 다시 확인하였다.
셋째, 아난다와 츠한나(Channa)의 징계를 통하여 교단 내의 정화(淨化)를 도모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집회는 분명히 교단의 정전(正典)을 결집하기 위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어떠한 문헌 가운데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많은 학자들은, 몇 가지 이유에 근거하여, 그 대회의 개최 여부조차 깊이 의심하고 있다.
제2차 전인도 불교도 대회
불멸 일백년 뒤에 브리지뿌뜨라까(Vrjiputraka) 비구들은 기존의 계율을 수정한, 열 가지의 새로운 법〔十事〕을 들고 나왔다. 야샤(Yasas)는 곧 이를 비난하고 나섰다. 하지만 혼자만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야샤의 요청으로, 의장에 선출된 레바따(Revata)가 싸르바가민(Sarvagamin) 장로에게 ‘십사(十事)’에 대해 질의하는 식으로, 제 2차 전인도 불교도 대회는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십사’는 비법(非法)이라는 선언과 함께 이 대회는 막을 내렸다.
이 대회의 의의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네가지 상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문제된 ‘십사’는 다음과 같다.
1. 전날에 시주받은 소금은 이튿날에 다시 쓸 수 있다.
2. 하루 한끼 외에도 해그림자가 두 손가락을 붙인 폭만큼만 지나가면 다시 먹을 수 있다.
3. 절 문을 나서면 또 먹을 수 있다.
4. 같은 도량 내에서 두 번 이상의 포살이 가능하다.
5. 먼저 갈마법(羯磨法)을 행하고 난 뒤에. 이에 대한 사후 승인을 받을 수 있다.
6. 전례(前例)르 따르면. 설사 율이 아니더라도 이를 범하는 것이 아니다
7. 식사 외에 꿀. 설탕 등을 발효유에 타서 마실 수 있다
8. 치료를 위해서는 덜 익은 술을 마실 수 있다.
9. 몸의 크기에 맞추어 좌구(座具)를 지어 가질 수 있다.
10. 금, 은. 돈 따위로도 보시를 받을 수 있다.
둘째, 많은 학자들은 이 대회가 열리는 동안에 최초의 교단 분열이 있었던 것으로 믿고 있다. 곧 대충부와 상좌부의 분열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실질적인 쟁점은 위의 ‘십사’ 가운데 열번째 항목인 금은정(金銀浮)이었다.
셋째, 이 대회를 통하여 교단 내의 ‘보수’ 대 ‘진보’는 말할 것도 없고 재가신자들과 사원 조직 사이의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넷째,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이 대회를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하고 있다.
제2의 제2차 전인도 불교도 대회
제 2차 불교도 대회 뒤-37년 뒤라고 하는 설이 지배적이다-에, 상그하(Samgha) 내의 대립 양상은 점차 심화되어 왔다. 특히, 지난 호에서도 말한 바 있듯이, 마하데바(Maha-deva)라고 하는 승려는 다음의 다섯 가지의 이유〔五事〕를 들어 아라한(阿羅漢, Arhant)을 비방하고 다녔다.
첫째, 아라한도 육체적인 본능만은 어쩔 수가 없다.
둘째, 아라한도 모르는 것은 역시 모른다.
셋째, 아라한에게도 의심이 남아 있다.
넷째, 아라한도 다른 이의 증명으로 자신의 해탈 여부를 깨닫는다.
다섯째, 아라한도 괴로웅을 탄식하며 깨달음을 얻는다.
이에 상그하의 화합이 절실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당시의 왕 마하빠드마 난다(Mahapadma Nanda)에 의해, 대립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양 파의 승려들이 한자리에 모여 ‘오사’를 주의제로 하는 안건을 표결에 부침으로써 이 대회는 시작되었다. 이윽고 승리를 거둔 마하데바의 다수파는 그들의 종지(宗旨)에 걸맞는 대중부(大衆部, Mahasamghikas)라는 불교의 한 부파를 창도하였다. 소수파는 정법수호(正法守護)라는 자신들의 종지를 확인하고, 나아가 스스로를 상좌부(上座部, Sthaviras)라 칭하였다.
이상이 상좌부 출현 당시의 교단 분열사의 간략한 골자이다.
상좌부와 대중부의 기본적인 교설은 초기불교의 그것과 거의 같다. 사성제(四聖諸), 팔정도(八正道), 삼상(三相), 오온(五蘊), 연기법(緣起法)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 차이는 아라한에 관한 견해에서 두드러질 뿐이다.
상좌부 교리의 특징
대중부가 형이상학적인 불성(佛性)에 관해 사색한 최초의 불교학파였던 것에 반해, 상좌부는 부처에게서 그 인간적인 면모를 더욱 강조하였다.
부처가 비록 대각을 이룬 완전한 인간의 본보기이기는 하지만, 그도 역시 육신(Lupakaya)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한인 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들은 생각하였다. 뒤에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는 ‘불성(佛性)’ 또는 ‘당체(當体)’로, 그리고 대승불교에서는 ‘진여실상(眞如實相)’으로 이해했던 법신(法身, Dharmakaya)에 관하여 상좌부는 다만 불설(佛說)의 총체, 곧, ‘교설신(敎說身, Body of Doctrine)’으로 받아들였다. 보살은 오직 가우타마 싯드하르뜨하(Gauta-ma Siddhartha) 한 사람뿐이며, 대각(大覺)은 선택받은 이의 특권으로서 모든 중생에게 활짝 개방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이 말하는 유일의 절대경지 곧 무위법(無爲法, asamskrta dharma)은 바로 열반(涅槃, nirvana)이다. 윤회의 세계에 존재하는 그밖의 것은 모두 상대적이며 무상하며(有爲法, samskrta),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현재만 있을 뿐이라고 한다. 정통 상좌부의 교리는 아라한은 모든 면에서 완전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권위주의에 입각한 아라한 사상은 결국 마하데바의 ‘오사(五事)’에 의해 배척당할 수밖에 없었으며, 초기 교단분열의 실질적인 실마리가 되었다. 대중부뿐만 아니라 설일체유부도 그러한 아라한 사상을 배격하였다. 아라한 역시 그의 지위로부터 타락할 수 있으며, 아무리 아라한의 지위에 올랐다고 해도 결코 그 자신의 옛날 업(業,Karma)이나 연기법의 굴fp로부터 스스로 벗어날 수는 없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하지만, 상좌부에서는, 아라한은 결코 까르마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으며, 다시 그 아래의 지위로 타락하는 일도 없다고 가르쳤다.
교리에서는 모든 불교도에게 열반의 가능성이 개방되어 있었지만, 재가 신도로서 열반에 이르른 예는 몇 사람밖에 찾아볼 수 없으며, 출가수행자 특히 비구승이 아니면 온전한 대각을 이룬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로 생각되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상좌부는 모든 면에서 권위주의적인 동시에 보수적이었다.
다음 호에는 ‘빠알리어(Pali)’ 이야기가 소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