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누리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맑은 땅 좋은 벗 - 안혜령
1999년 04월 206호
경상북도 상주군 화북면 입석리, 속리산국립공원 안의 “골짝” 마을이다. 들목의 입석초등학교를 지나 물아아 계곡의 말은 물길 만났다 헤어지며 비포장 산길을 이 킬로미터 남짓 돌아들면, 훤히 하늘이 열린다. 그 아래 소나무 울울한 백악산을 뒤로하고, 물길 양 옆으로 끼고 넓게 다진 터에 한옥 두 채가 앉았으니, 가히 ‘하늘.땅.사람살림터’ 답다.
“이 세계가 생태적 세계였으면 좋겠어요. 모든 생물이 자연 안에서 태어난 대로 잘사는데, 사람만 벗어나 있지요. 사람과 자연과, 다른 생물체가 하나로 어울려 사는 세상이 어떤 모습일까, 그런 삶이 실제로 가능한지 알아보고 싶고, 사람도 자연파 하나되는 마음만 투철하면, 살 수 있는 마을을 만들고 싶어요.”
웃는 얼굴이 쉰을 넘긴 사람 같지 않게 따뜻하고 맑은 최한실 씨가 말하듯 “마음 열린 이들이”, “하늘 땅 사람 모두가 본디 제 모습을 찾아 한껏 행복해지는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모인 생태 공동체가 푸른누리다.
무소유, 무아집, 절대평등, 늘 행복한 세상을 이상으로 하며, 이 골짜기 안에 사기도 하고 빌리기도 한 논밭 구천평을 일구어 자급자족함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최한질 씨가 이 곳 어른이자 지도자로 여겨지고 있으나, 실제 식구들 사이에 역할이나 지위의 높고 낮음은 없다. 구성원은 평등하여 모두가 푸른누리 주인이며, 함께 일하고 함께 밥먹는다. 어떤 강제적인 규율도 없으며, 모든 일을 자율적으로 하되, 문제가 생기면 ‘참밝힘’을 통해 식구들이 머리를 맞대고 풀어나간다. “제 생각을 다 내놓을 수 있고 그것을 다 받아주는” 참밝힘은 푸른누리의 고유한 의논 체계이다.
절대 평등한 존재가 사람뿐이겠는가. 자연 만물이 모두 그러한즉 이들을 섬기는 마음에 푸른누리의 일상에 베어 있으니 “똥은 밥”이므로 귀하고, 나무는 과실을 주어 고마운 “분”이다.
고기 먹을 일 드문 식구들에게 달걀이며 젖을 선사하는 닭과 염소가 몇 마·리 있지만, 이들 또한 자유롭게 해방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어떤 형태로든 집단 사육은 오늘날 인류를 죽임의 문화로 몰고 가는 크나큰 원인인 ‘생산력 지상주의’에 근거한 것인즉 결코 허용될 수 없다고 본다.
밥알하나도 존귀할 뿐더러 쓰레기로 자연을 죽이는 일을 피하고자 밥먹고 난 그릇은 물에, 국에 헹구어 말끔히 비우니, 첨단을 달리는 현대 문명 안에서 거꾸로 “반도시적” 삶을 자처하는 이들의 일상이 바깥사람이 보기에는 도무지 감당하기 어렵겠건만, 이들은 입을 모은다. “바라는 대로 즐겁게 살고 있다.”
푸른누리는 1995년 경기도 안성군 죽산면 당목리에서 시작됐다. 최한질 씨와 박의준 씨를 비롯하여 칠팔십 년대 학생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의 갖가지 사회 운동에 몸담은 이들이 애초의 식구들이었다. 그 주동자라 할 최한질 씨는 치열한 운동가였으나 “생태적 각성”을 한 이래, 인간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화와 생활양식을 모색해 오던 중이 있다.
불교환경교육원에 참여하여 ‘생태학교’ 등의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개설하며, 정토수련원의 수련 프로그램을 지도하면서 자연스레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으니, 서너 해 동안 수련을 통하여 확신하게 된 바, 인간이란 본디 자연에서 태어났고 자연과 뗄 수 없는 관계이니, 행복한 삶이란 “자연과 하나되어” 사는 삶이었다.
무소유는 푸른누리의 중심 사상이다. 만물은 자연 안에서 제 본성대로 스스로 타고나 저마다 귀한 존재일진대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다. 다만 쓰임새에 맞게 쓰이면 될 터. 내 것, 것 따지는 것은 사람의 편견이자 왜곡된 지식의 결과라 본다. 그러므로 소유욕을 버린다는 것은 온갖 “끌림에서 벗어나 나를 탁 내려놓는” 일이니, 푸른누리는 나날의 삶 속에서 ‘나’ 속에 틀어 앉은 고정 관념을 깨고 또 깨며 진실을 살펴나가기를 게을리하지 않고자 한다.
이런 깨우침과 삶을 확산하기 위하여 푸른누리에서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다달이 수련 프로그램을 갖는다. 4바 5일의 ‘참나를 찾아서’에서는 자아를 포함한 일체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진정한 나는 어떤 것인가를 살피며, 이 수련을 마친 이들을 위한 ‘참사람 살이’는 ‘나’에서 ‘우리 모두’로 드넓게 열린 자기를 체험함으로써 자연과 내가 한 몸임을 깨우치는 과정으로 8박9일 동안 열린다.
수련원 운영은 농삿일 못지않게 푸른누리에서 정성을 쏟는 일이며, 이와 함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여름 캠프 ‘자연과 하나되어’를 해마다 열고 있다.
학생, 교사, 노동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수련원을 거쳐 나갔는데, 육백명쯤 되는 이들은 푸른누리 회원으로서 농삿일은 물론이고 크고 작은 푸른누리 살림살이를 살뜰히 챙긴다.
여기 식구가 되려면 다른 정해진 규칙이나 조건은 없지만, 기본적으로 이 수련 과정을 거쳐야 하며, 때로는 우선 예비식구로 몇 달 실면서 그 사이에 수련을 받기도 한다. 현재 푸른누리에는 열세살 난 최한질 씨 맏이와 어른 넷이 살고 있으며, 3월 안으로 식구들이 더 늘어날 예정이다.
죽산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 97년 2월이었다. 그때만 해도 다락논 뿐, 허허벌판이었던지라 우선 아랫마을에 짐을 풀었다. 남녀노소 해서 열명 남짓한 사람들이 방 두 칸짜리 집한 채에서 나눠 지며 농사를 짓는 한편, 그 해 여름부터 터를 닦고 집을 짓기 시작하여 지난해 6월, 곡절 끝에 스무 평 남짓한 한옥 두 채를 세우게 되었다. 한 채는 수련원이고, 또 한 채는 다용도로 쓸 수 있는 생활관 이었다.
“우리 집은 우리 손으로” “그 지역에서 나는 재료, 즉 흙으로 흙 집 짓는다’는 원칙을 세우고 시작했으나, 기술도 경험도 없는 식구들에게 집 짓기는 고되고 벅찬 일이었다.
회원들이 재정적 후원뿐만 아니라 몸 쓰는 일에까지 발 벗고 나서 흙 이기고 개고, 나무대패질하고 깎고, 기둥 세우고, 지붕 올리기까지 열성을 다한 일은 푸른누리 안팎의 유대감과 공동체 정신의 투철함을 확인하는 흐뭇한 대목이었겠다. 다달이 수련회 거르지 않고 어린이 캠프 무사히 치러낸 것도 회원들의 힘이 컸다.
반면, 중간에 짐을 싼 식구도 몇 명 생겼다. “세상에 가장 행복한 삶을 살겠다고 들어왔는데, 일하고 밥 먹고 자고, 막상 이래 살아보니까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너무 힘들어 지쳐나가 떨어진” 것이었다.
지난 두 해는 푸른누리의 재정립기라 볼 수 있을듯하다. 박의준씨가 족산에 눌러앉음으로써 푸른누리에서 떨어져나갔고, 몇몇 젊은 식구들이 떠났으며, 무엇보다 이 공동체가 지향하는 바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들이 이루어졌다.
집을 지으면서 숱하게 열린 ‘참밝힘’에서 가장 크게 논란이 된 것은, 예컨대 난방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전기며 전화를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 등이었다. ‘무소유 생태 공동체’라는 이상에 걸 맞는 생활방식을 주장하는 젊은 식구들의 목소리가 컸으나, 수련원 운영을 위해서 결국 전기와 전화, 나무 겸용이긴 하나 기름 보일러까지 갖추게 되었으니, 최한실 씨는 “선생님은 덜 철저하다”는 소리 들어야 했다.
심지어 “괜히 수련이란 걸 붙여 놓다 보니까 본디 지향하는 바대로 삶을 꾸려나가지 못한다”하여 수련원을 닫자는 의견도 나왔고, 실제로 집을 다 지은 뒤 올라와 살다가 이런 이유로 떠난 이들도 있다.
그러나 청출어람이라고, 최한질 씨는 그 식구들의 꼿꼿한 자세를 옳다고 본다. 다만 ‘바깥에서 아직도 개발과 성장의 신호에 빠져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고 체계를 돌아보고, 삶의 실체를 살펴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이런 정도 수련원 운영하는 것도” 그이가 할 수 있는 사회적 역할이라 여긴다.
소유란 곧 집착에서 비롯되는 것일진대 집착 가운데 가장 버리기 힘든 것이 사람에 대한 집착이라 했다. 이 문제가 집을 완성하여 옮기려 하는 과정에서 불거져 나왔으니, 결혼한 이들이 따라 나서기를 마다했는데, 개중에는 최한실 씨의 부인도 들어 있었다. 한살림하며 “니 꺼 내 꺼 없이” 사는 중에 제 자식 남의 자식, 내 남편 다른 사람 구별 없이 “마음이 똑 같이 우러나왔으면 좋겠는데 그리 안된다”는 이유였다.
“ 안되기는 다 마찬가지지. 그래도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극복하려면 끊임없이 그리로 가야 안 되겠다” 생각하는 최한실 씨로서는 많이 서운한 일이었을 터이나, 결국 부부는 떠나고, 그이의 부인은 시아버지 모시고, 두 이들 중 막내와 조카 거두어 아랫마을에 딴살림을 차렸다. 그 살림 돌볼 일이 난감했으나 시아버지 도움 받아가며 부인이 온전히 감당하는 덕에 한시름 놓았다.
사회의 기초단위로서 가족은 핏줄이라는 인연으로 하여 그 어떤 구성체보다 끈끈한 결속력을 유지하고 있는 바, 이웃과 세계, 자연을 돌아보기에 앞서 우선 ‘내 핏줄’로 향하는 ‘어쩔 수 없는’ 마음은 무소유, 무아집을 실천하려는 이들에게 가장 끊기 어려운 집착이요 걸림이라 하겠다.
임시 방면은 있다. 현재의 생활관 방여닮 칸을 하나씩 나누어 쓸 수도 있으며, 또 지금의 터는 수련원 겸 일터이니, 물길 건너쪽으로 집들을 지어나갈 계획이다. 부엌 딸린 두 칸 째 초가도 지어 결혼한 이들의 거처로 삼으려 한다. 물론 취사는 공동으로 하겠지만 가족의 내밀한 사생활은 보장될 터이다.
“무아無我로 가려는 사람들이 자꾸 아我를 강화해서 되겠는가” 염려되는 바도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사는 게 짐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도 보니, 공동체의 삶에서 가족 문제를 슬기롭게 풀어나갈 과제를 안게 되었다.
젊은 사람들 떠나보내면서 “성질도 많이 죽었을” 뿐더러 이즈음 들어서는 “엄밀한 의미에서 무소유 공동체라 표방도 못 하겠다”는 생각조차 들기도 하나, 그렇다고 해서 결코 푸른누리를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델이라고 자부해 본적은 없다.
그이가 이상으로 꼽는 것은 부처님의 삶이니. 불자는 아니지만 오늘날이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책이 그 안에 있다고 본다. 비록, 인도에서 부처님 고행의 자리를 눈으로 보고 그 철저함에 자신들이 “불가능한 일을 하려는 게 아닌가” 충격을 받기는 했으나, 그럴수록 마음을 놓아 버리려 한다. 깨달음이 깊어지면 질수록 그 삶에 좀더 가깝게 다가가지 않겠는가.
이 봄에 푸른누리는 새로운 한 해 살림 시작할 준비로 바쁘다. 겨우내 무거워진 듯한 몸 재우쳐 새벽부터 더덕 밭 복토 덮는 작업이 한창이고, 일주일에 한 번씩 열던 참밝힘을 이제 나날의 일과로 삼을 참이니, 조금은 느슨해졌을 마음 다잡아지겠다.
소식지 ‘푸른누리’도 꾸준히 펴내고, 수련원 운영에 좀더 힘을 쏟아야 할 것 같다. 보통 닷새에서 열흘까지도 걸리는 수련 프로그램이 부담스러운 이들을 위해 2박3일의 ‘숨하나’명상이라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한 탓이다. 또 오랜 꿈이었던 생태교육 중심의 고등학교 설립을 올해에는 구체적으로 추진해 보려 한다.
바깥 사회와의 교류도 빠트릴 수 없는 일인즉, 한해 평균 사백명쯤 되는 방문객은 그 다리가 되어 준다. 나아가 “죽임의 문화인 현대문명에서 살림의 문화로” 나아 가고자 하는 바깥의 단체들과 연대할 계획도 품고 있다. 지난해 굶주리는 북한 동포를 돕기 위한 모금운동을 벌인 것은 그런 한 예라 하겠다.
여러 갈래 일이되 그 꼭지는 튼실한 무소요 생태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니, 그 마을은 노자의 나라를 닮았다. 이삼십 호쯤 되어 “이웃의 닭이며 개 소리가 들리며”, 인위적인 제도나 도덕은 필요 없는 곳이다. “백성의 마음으로 제 마음 삼은” 군주라면 모를까, 그마저도 없는 것이 좋다. 옛 중국민요에 “해 뜨면 일어나고 해지면 쉬며, 우물 파서 물 마시고 밭 갈아 밥 먹으니, 제왕이 나에게 무슨 힘이 되겠는가” 하더니, 그렇듯 자연의 섭리 좇아 참 자유로운 마을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