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현실 속의 지옥고(地獄苦)
앞서 보았듯이, ‘우란분재’의 참뜻은 고통받는 중생을 해방하여 본연의 위치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고통받는 중생의 해방을 단순하게 사후(死後)에나 이룬다는 식으로 소극적으로 파악해서는 안된다.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이 하나라도 있다면 나는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지장보살의 서원처럼, 죽어서 지옥고를 겪는 중생의 고통을 천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고통이 가득찬 지옥을 죽어서 가는 ‘사후의 세계’로만 이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현실 속에서 ‘지옥의 고통’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얼마전 서울에서는 가난과 질병을 비관하여 두 명의 도시 빈민이 자살한 사건(7.15)이 일어났다. 뿐만 아니라 요즘 사회 문제화되고 있는 ‘국민 소득 3,000불 시대의 결식(缺食) 아동문제’도 심각하다. 한국 어린이 보호회가 최근 서울 서부 지역 16개 국민학교를 대상으로 표본 조사한 결과, 도시락을 못 가지고 다니는 어린이가 500여 명으로 밝혀졌다. 이 수치를 서울 시내 444개 국민학교 수로 환산하면, 서울에서만도 14,000여 명의 어린이가 결식 아동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귀(餓鬼) 지옥의 상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바로 얼마 전에는 이제 국민학교를 갓 졸업했을 14살 나이인 문 송면 군이 공장에서 수은 중독으로 사망한 사건이 보도 됐다. 또 얼마 전 어린 나이에 힘든 노동을 감당하기 어려워 자기가 일하던 인형제조 공장에 8차례나 불을 지르다 붙잡힌 태 모군에 대한 기사도 있었다. 하루 11시간이 넘는 중노동에 지친 나머지, 일하던 공장이 불에 타 없어지면 쉴 수 있을 것이라는 눈물겹도록 단순한 희망이 어린 소년을 방화범으로 만든 것이다.
올림픽 환경 조성이라는 미명 아래 생존 수단을 빼앗긴 채 내몰린 서울 시내에서만도 20만명이 넘는 영세 노점상들, 천막이나마 보금자리로 간직했던 집을 강제로 철거당한 철거민들, 세계에서 가장 긴 노동 시간에도 불구하고 저임금에 시달리는 노동자, 인건비도 안 나오는 낮은 농산물 가격에다 미국 농수산물 수입까지 겹쳐 엄청난 부채 속에서 도탄에 빠져 있는 농민들, 민중의 아픔에 동참하고 이를 대변하기 위해 싸우다 아직도 쇠창살 안에서 고통받는 수많은 양심수들….
민족의 숙원인 조국의 통일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싸우다 총칼에 의해 희생된 유명 •무명의 선열들은, 아직도 새 세상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현세를 보면서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하고 지금 이 시간에도 중음의 세계를 떠돌고 있다.
죽은 지옥중생을 천도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우란분재는 무엇보다 조국 통일과 민족 해방을 위해 싸우다 산화한 선열들의 원혼들을 천도하는 것이어야 한다. 또한 아직도 이 땅의 구조악과 싸우고 있는 수많은 애국 민중들과 현실의 지옥고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많은 민중들을 해방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들은, 죽어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해방의 손길을 필요로 하고 있다.
3. 우란분재와 인간 해방
우란분재의 참뜻은 잘못된 사회 관계를 개편하여, 고통받는 민중이 스스로 주인이 되게 하는 데 있다. 민중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 바로 구원의 주제이다. 개업(個業)이 아닌 공업(公業)으로 받게 되는 민중의 고통은 민중 스스로의 자각과 결단에 의해 극복될 수 있다. 민중이 스스로 자신을 해방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몇몇이 손을 잡고서 구조악과 대결하게 된다. 몇차례의 실패와 희생을 통하여 민중들은 의식화되고 조직화되어 마침내 커다란 민중의 대해(大海)를 이루어 낸다. 이 대해 속으로 사회의 온갖 구조악과 악을 만드는 모든 요인을을 삼켜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처럼 민중은 스스로를 해방시키나, 그 해방은 타인의 고통을 야기시키지는 않는다. 그것은 ‘혼자’를 위한 해방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하는’ 해방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 해방의 노력은 부처님 같은 선각자의 영도 아래 완전한 안락과 행복을 얻게 된다. 이처럼 ‘우란분재’는 농경사회의 머슴들이 이 날 하루만 중노동의 고통에서 해방되는 그러한 일시적인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고통으로부터 영원히 해방됨을 의미한다.
우리가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 이는 민중을 고통 속에 빠뜨렸던자, 구조악을 만들었던 박해자도 해방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려고 하셨기 때문에 당연히 이들도 구제하신다. 그러나 이들은 현실 속에서 만족한 채 스스로를 해방하려 하지 않는다. 이들은 그 과보로 지옥에 떨어질 때 비로소 고통을 깨닫는다.
그들은 잘못된 사회 구조 속에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나, 그 과보로 불행해진다. 이들은 적은 노력으로 큰 성과를 얻는 것을 ‘경제성의 원리’라고 하여 미덕으로 알고 있다. 적게 일하고도 많이 가질수 있는 사회에서는 많이 일하고도 적게 가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부처님께서 “중생이 추구하는 행복은 타인의 고통 위에 쌓는 것”이라는 말씀 그대로이다. 우리의 사회 구조는 가진자가 자기 능력껏 더 많이 가질 수 있는 자유(?)가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자신의 죄과를 쉽게 반성하기도 힘들지만, 설사 반성한다고 해도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이 지은 업장(業障)이 너무나도 두텁기 때문이다.
“목련경(目蓮經)”에 나오는 목련존자가 아귀지옥에서 굶주리고 있는 어머니에게 밥 한 그릇을 갖다 주었을 때, 어머니는 그 밥을 같은 지옥중생들과 나눠 먹지 않고 혼자 먹으려고 욕심을 내었다. 그 결과 목련존자의 어머니는 더 깊은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는 자신의 업보로 지옥에 간 중생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해방하는 데는 한계가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들이 개심(改心)해서 스스로 악의 구조를 철폐해 주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고통받는 민중들은 그들이 때로 시혜를 베풀 때면 어떤 새로운 기대를 가져보기도 하지만, 그들이 그 뒤에는 언제나 더욱 큰 고통을 요구해 왔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결국 이들은 스스로의 노력만 가지고서는 해방될 수 없다. 이들은 스스로 해방될 수 없는 대신, 민중의 해방을 통해서 자신의 해방을 이룰 수 있다. 민중은 자신을 억압하는 자로부터 해방됨으로써 억압하는 자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목련존자가 ‘대중공양’을 통해서 마침내 어머니를 천상으로 천도했듯이, 민중이 자신을 해방하려는 노력 곧 보살의 행으로써만 이들의 구제가 가능한 것이다.
우란분재의 진정한 의미는 곧 고통 속에서 억압받고 있는 민중이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이며, 또한 이를 통해서 자신을 억압하는 자까지도 해방시키고 이를 기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