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각에서 마친 백팔일 국토순례
음력 정월 대보름날에 출발한 이번의 행각은 올림픽의 성화봉송로인 예순한 개 시를 잇는 4,163킬로미터의 대장정이었다. 잠실에 구십육박 구십칠일만에 도착한 원공스님은 다사 강원도 화천으로 해서 최전방의 통일전망대-이 대목에서 스님은 정색하면서 어찌 통일을 전망하느냐며 ‘통일염원대’로 바뀌어야 한다고 하신다-로 돌아 백팔일째인 단오달 임진각에 도착하였다.
벽장에서 꺼내 보여 주신 대형지도에는 일백팔 일의 일정이 까만 싸인펜으로 연결되어 있다. 목포에 도착하기까지 열하루 걸렸으니 놀랍게도 스님은 하루에 일백 리 이상씩을 걸은 셈이다.
공주를 떠나 밤에 강경에 도착한 스님은 우유와 빵으로 저녁을 대신하고 찬방에 누웠던 것이 탈이 나 심한 배앓이를 하였다. 그래도 새벽녘에 일어나 이리시를 향해 걸었다. 수시로 설사를 하고 식은 땀이 등줄기로 쏟아져 내리는 가운데, 이번 올림픽은 ‘남과 북이 함께하는 민족의 대축제’여야 한다는 일념으로 걸었던 것이다.
몸이 그리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종일토록 걸었냐는 우문(愚問)에 스님은 ‘기도란 쓰러져 걷지 못할 때까지 가야 하는 일’이라며 이 행각은 ‘나 자신과 또한 나를 아는 이들과의 어길 수 없는 약속’이라 하신다. 머물음 없는 전진, 바로 진리를 추구하는 수행자의 구도행각이 아니던가.
차를 탄 적이 없는 스님이지만 섬을 향할 땐 도리없이 배를 탄다. 오직 배 밖에는 타는 걸 모르는 스님이다. 제주로 가기 위해 안성호를 타고 울돌목을 지날 때 예고없는 태풍이 몰아닥쳐 다시금 뱃버리를 목포로 돌려야 했다. 억울했지만( ?) 카페리호를 타고서야 일정대로 제주에 도착할 있었다.
문산에서는 이차선 도로에서 미군 탱크의 행렬과 만났다. 찻길을 꽉 메운 탱크의 위세에 어찌할 바를 몰라 다급하게 찻길 아래 개울로 뛰어내렸다. 그 결에 삔 손목은 아직까지 아물지 않았다.
“다니는 처처가 도량이요, 포교의 광장이야, 법당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신도를 기다리지 않을 뿐이지. 어디, 부처님께서 법당에 계셨던가! 시방세계에 아니 계신 곳 없는 분이 부처님일세.”
아홉 해 동안 스님은 숱하게 사람을 만나왔다. 산이며 촌이며 도로에서 만난 이들과 통일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부처님 말씀을 나누었다. 그렇게 만난 이들은 ‘길벗’이 되었다. 그들 중에는 산부도 있고 목사도 있다. 꼬마도 있고 신혼부부도 있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도 있다
그들은 스님을 찾아 천축사에 오른다. 이러한 인연으로 스님의 방엔 손이 끊어질 않고, 오는 이들을 위해 부엌에는 작은 밥솥과 수저통, 공기, 대접이 여나무개 마련되어 있다. 찾아온 이들에게 스님은 반드시 ‘손수’ 지은 ‘따뜻한 보리밥’을 준비하신다.
문명의 이기가 흉기로 돌변하는 세상 도로를 따라 길을 가는 동안 원공스님은 무수한 주검을 본다. 박살난 자동차, 치어죽은 이, 소와 개, 심지어 논둑의 개구리들이 뛰어올라 질주하는 차에 치어죽는 통에 여름 한철이면 도로가 말이 아니다. 하루 도보를 마치곤 ‘오늘도 살았구나’하고 되뇌어 봄직하다.
작년의 일이다. 서천 부근을 지날 때 장마를 만났다. 충남 일대가 수해를 겪던 그즈음이다. 장대 같은 빗줄기가 퍼붓는 사이 물이 무릎까지 차 헤엄치듯 걸었다. 양편의 늘어선 가로수를 따라 ‘길이겠거니’ 짐작하며 가야 했다.
천둥과 번개가 끝도 없이 하늘에서 ‘번쩍 번쩍, 우르르릉 쾅쾅’ 하며 내어지르던 광란의 현장은 작고 아기자기한 이 땅의 자연에 익숙한 스님에게 온통 두려움과 공포의 자연으로 돌변해 있었다. 흠씬 젖은 채로 거대한 자연에 압도되어 ‘비 맞은 중, 중얼거리듯’ 걸어간 그날의 기억을 원공스님은 내내 잊지 못한다.
아홉 해 동안 스님이 이 땅을 품어 안으며 느낀 것은 ‘파괴되어 가는 공동체문화’ 였다.
“과거에 비해 생활은 확실히 향상되었다. 허나, 삶의 모습은 날이 갈수록 획일화되고 개인주의적으로 변하고 있다네. 예컨대, 칼라 텔리비전이 보급된 지역일수록 인심이 고약한 편이지. 텔리비전이 없는 동네는 지금도 훈훈한 정을 맛볼 수 있거든. 문명의 이기를 사용할수록 인간은 오염되고 나약해지지.”
아울러 스님은 농촌 문제, 공해 문제의 심각함을 들려주신다. 농촌마다 젊은이는 죄다 떠나가버려-그나마 몇 안 되게 남은 청년은 노총각으로 늙어간다-든든한 일꾼이 없어 장래가 어두운데에다 농산물 수입 정책 따위로 타격을 크게 받곤 하니, 농촌은 병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농촌이고 산촌이고 도시고 할 것 없이 이 나라의 지천이 ‘쓰레기 더미’로 되어가고 있다.
민족정기 되찾아야 자주화 가능
스님이 짊어지고 떠나는 바랑 안에는 어떤 물건들이 들어 있을까.
“밥 해먹는 남비랑 불-스님은 코펠이니 버너니 모두 ‘양놈의 말’이라고 하며 사용치 않는다-이랑, 대충 들어 있어.”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맞는다. 비를 맞는 일은 찌든 노독을 걷어내는 행운이다. 땀에 절은 겉모양은 ‘지지’해 보이나 속때가 땀으로 발산되므로 몸은 한결 맑아진다. 간단한 빨래는 묵어가는 집에서 널어 말려 다음날이면 다시 챙겨 입고 길을 떠난다.
그러나 스님이 말씀처럼 ‘대충’ 사는 스님인 줄 여겼다간 큰 일이다. 원공스님을 만나뵈려 한다면, 먼저 입고 있는 옷에 행여나 양놈의 글씨가 있는지를 반드시 점검해야할 게다. 범람하는 외래 문물에 정신까지도 잠식 당하는오늘의 민족현실을 스님은 참으로 마음 아파하기 때문이다.
육년을 수도정진했다는 스님의 방은 얼굴이 비칠 만큼 깔끔하다. 아무런 장식이 없는 방 안에 덩그마니 침상이 하나 놓여 있을 뿐이다. 필요한 물건은 벽장 안에 챙겨 두신다. 자주 길 떠나는 이에게 세간이 없음은 당연하게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스님 스스로가 물건을 쌓아두지 못하는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다. 신도들이 보시하는 물품들은 찾아오는 다른 이들에게 그날로 전달된다. 오직 하나뿐인 승복을 한겨울에 빨아 입다가 독감에 걸려 앓아누웠다는 일화만 들어보아도 알 수 있다. 중동에서 신도가 사왔다는 미제 커피를, 원공스님은 눈에 쌓인 계곡에 몽땅 쏟아 부었다. 쌓인 눈을 물들인 커피의 빛깔이 이역반리에서 날품 팔던 노동자의 피로 보이더란다.
도봉산 계곡에서 흐르는 차디찬 물소리가 마치 alt소리로 들려온다. 창을 열면 한 폭의 동양화가 펼쳐지고, 새소리며 바람소리가 ‘사람 사로잡는 교향악’이라는 원공스님의 사뿐한 걸음을 좇아 천축사 아래에 위치한 백운산장에 들렀다.
원공스님을 ‘무잔장’좋아한다는 털보산장주인에게 양탕국-커피를 이렇게 서양의 탕국이란 이름으로 부른다-한 잔 주문하시는 스님은 음료 대신 물만마시고 젓갈이 들어간 김치조차 입에 대지 않는 철두철미한 수행인이었다.
“서양의 식품영양학이란 서구인의 체질에 적합한 거지. 한국인은 한국인의 고유한 체질과 습성이 있거든. 수행을 시작하면서부터 죽 지켜 온다면, 계율지키는 일쯤은 아주 쉬워.”
남들에게는 관대하더라도 스스로에게만큼은 완고한 원공스님은 ‘내 밥벌이 하고 산다’는 의미에서, 일꾼들을 동원하면 한꺼번에 짊어 나를 연탄을 날마다 새벽에 열다섯장씩 지고 오는 일을 빼놓을 수 없는 하루 일과로 삼고 있다.
민족자주성에 기초한 평화통일
아홉 해 동안 일백년 이상된 사찰은 다 돌았다. 그러면서 느끼는 건 돈 있는 자들이 군림하는 사찰 풍토이다.
“봉은사 사태와 같은 것이 요즈음 불가의 복합적인 문제들을 일목요연하게 드러낸 것일세. 재가자에 의해 사찰 운영이 이루어지고 재정이 공개된다면 절집안은 불국토가 될 걸세.”
절집안에서 민족의 동질성 회복을 위해 해야 할 역할들이 많이 있지 않겠는가라고 여쭈었더니, 의외로 이 땅의 불가는 뼈를 깎는 각고의 반성없이는 ‘통일’ 의 ‘통’ 자도 거론해선 안된다고 잘라 말씀하신다.
“철저하게 자기를 반성하고 참회해서 변화해야 돼. 자기도 제대로 가꾸지 못하는 혼란(봉은사사태를 의식한듯)의 상황에서 북한에 무엇을 제의할 겐가!”
수행에 정진하는 승가, 중생과 더불어 사는 승가의 본래 모습을 회복해 그 힘을 한 데 모을 때라야 비로소 불교가 통일에 다가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스님은 현재 ‘민족화합 공동올림픽추진 불교본부’ 의 8•15 남북통일 기원법회 제의를 ‘대단히 기쁘게’ 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소장승려들의 통일열기를 꺾어서는 안 된다는 게 스님의 입장이다.
“분단상황의 극복은 외세의 간섭없이 민족적인 양심에서 출발해야 하고, 남북의 다양한 교류를 통해서 그 길을 찾아야지. 아직도 한계를 지니고 있는 통일논의는 좀더 자유로와져야 하고, 요즈음의 반공교육은 발전적으로 재정리해야만 돼.”
남북한 상호간의 뿌리깊은 불신을 없애지 않으면 통일이 되어도 문제라고 보는 스님은 또한 사람이 몹사 다치고 죽어가면서까지 이루어지는 무력통일에는 ‘절대반대’이다. 무엇보다 원공스님은 민족의 자주성에 기초한 평화통일 만이 우리의 과제임을 강조한다.
“위로는 휴전선이, 동서남쪽의 해변에는 간첩잡는 철조망이 둘려 있으니 내 아무리 걸어 다닌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철조망 안에서 뱅글뱅글 도는 셈이지. 이런 생각이 들 적마다 분단의 한은 더욱 깊어만 가네.”
그래서 스님은 더 절절히 통일을 기원하며 걷는다.
통일이 되는 날, 남과 북이 얼싸안고 어화둥둥 춤을 추는 날, 그날이 오면 우리는 버너도 코펠도 다 빼어버린 소담한 바랑을 어깨에 걸고 버스 한 켠에 앉아 계신 스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스님은 분명 차를 타고 평양, 청진을 가고, 문산에서 다시 이어진 경의선을 타고 신의주에도 가보고, 다리 건너 중국까지 가볼 참이니 말이다.
글/이윤수